180.
"크읏!"
상현은 바닥을 굴렀다.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로 거대한 호랑이가 덮쳐왔다. 크아아앙! 내지르는 포효에 귀가 얼얼한 지경이다.
'저거, 맞으면 분명히 죽는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얼핏 봐도 수백 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덩치다. 공격이 아니라 깔리기만 해도 상황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
"후욱!"
숨을 짧게 끊으며 상현이 달려 나갔다.
'골치 아프게 됐어.'
준비가 안일했던 탓이다.
뾰롱이에게만 기댔고, 삐약이는 마족들의 통제를 위해 상황실에 남겨둔 상황. 추가적인 아이템 역시 구비하지 않았다.
미믹을 데려오긴 했으나, 녀석은 두어 마리의 몬스터와 대치하는 것으로도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방법이 있긴 하지.'
상현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있다.
지원팀을 호출하는 것.
사실대로 말하고 추가 전력을 부르기만 한다면. 하다못해 두어 마리의 마족만 소환해도 이런 몬스터쯤은 단번에 제압하겠지만…….
그래선 안 된다.
상현의 뒤엔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이 있다.
그리고 그 시청자들 중엔 상현이 약해질 틈만을 호시탐탐 기다리는 사람들 역시 있을 터였다.
카메라도 끌 수 없다.
그것 역시 상현이 흔들린다는 증거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이 상황에 부딪쳐 극복해 나갈 뿐.
상현의 시선이 홱홱 돌았다.
사정권에 들어온 몬스터는 두 마리지만 몰려드는 건 총 30마리 정도였다. 저 녀석들마저 합류한다면 행동의 폭이 확 줄어들 게 분명하다.
'그전에 처리해야 할 건.'
쿠쿵! 내려찍히는 앞발을 피해내며 상현이 결론을 내렸다.
허공에 떠 있는 뾰롱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분위기상 몬스터들은 뾰롱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듯 보였지만, 상현이 모습을 감춘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타닷! 상현은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뾰롱이. 당연히 몬스터들도 놓치지 않으려 발악했으나, 그런 것에 맞아주기엔 상현의 짬밥도 만만치 않았다.
"흡!"
크게 한 바퀴 구른 상현은 튕기듯 일어났고, 뾰롱이를 낚아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시금,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번쩍! 신발에서 빛이 터지며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실라페의 발걸음을 사용한 것이다. 목표한 나무 위에 뾰롱이를 올려두고, 상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밀려드는 몬스터들이 두 눈에 잡혔다.
아이템의 페널티로 호흡이 가빠오는 게 느껴졌지만, 아직은 괜찮다. 고작해야 20분이고, 지켜야 할 대상도 더 이상은 없었다.
전신에 저릿저릿한 스릴감이 차올랐다. 간만에 느끼는 감각에 번뜩이며 정신이 깨어났다.
그런 기분 속에서, 상현은 몬스터들을 향해 조롱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자, 쇼타임이다!"
***
"일단 내기에서 이기긴 글렀고."
박형석은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사실 내기의 결과가 어떻게 나던 상관없다. 그러나 도무지, 상현이 왜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화면 속 상현은 구르고, 달리고, 방향을 꺾으며 필사적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분명 어떤 생각이 있긴 하시겠지만…….'
계획대로라면 상현은 지금쯤 월광 소나타를 마무리하고,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고 있어야 했다.
진입하기 전만 하더라도 오늘은 빠른 속도로 공략해나갈 거라 말했으니까.
그때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니, 하수연이 어느새 다가온 상황.
그녀는 늘 그렇듯 무감정한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심하신 건가.'
그는 대충 생각하며 넘겼다.
하수연이라면 이미 그의 지휘권한을 넘어선 존재다. 어떤 행동을 하건, 위급상황을 제외하면 자율적으로 두어도 되는 입장이다.
다시 영상을 지켜보다가, 박형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건지… 뒷말은 삼켰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야."
하수연이었다. 박형석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예?"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고."
같은 내용의 대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박형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니.
이전 던전에서부터 상현은 놀랄 정도의 힘을 발휘했었다. 길잡이가 아닌, 전투계열 헌터조차 압살할 정도의 실력.
그런 힘이 있는데 저 몬스터를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약이 생겼어."
의아한 반응에, 하수연은 그렇게만 알려주었다.
B급 헌터인 박형석과 다르게, 그녀는 지금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수연은 별의 소유자.
그리고 뾰롱이와 달 사이의 선을 그녀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그녀도 대기실에서 영상을 지켜보다가, 상황이 심상찮다는 생각에 나온 것이었다.
뾰롱이가 몬스터를 길들인다는 건, 놀랍긴 해도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각각의 별은 제각기 놀라운 능력을 보였고, 그 능력의 범위 역시 굉장히 넓다.
하수연의 경우엔 응축된 에너지를, 그리고 성대원의 경우엔 특정 구역의 시간축 자체를 틀어버릴 수 있다.
거기에 연옥 길드장의 별 같은 경우엔 능력 강화 대신, 탐지나 상황 파악 따위에 유용하게 쓰이는 능력을 지녔고.
하지만 달과 연결이 되다니.
저건 기존에 보였던 능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종류가 아닌가.
"저… 그런데 일부러 저러시는 게 아니란 말씀은."
그때 박형석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하수연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몹시 불안해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러니까. 별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의미가 맞습니까? 제가 이해한 게 맞는 건지……."
"맞아."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지원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박형석은 두려움마저 느끼는 듯 보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불안정한 감정의 흐름에 사로잡힌 채 상현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안 돼."
"예? 아니, 저 상태라면 보통의 길잡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실 텐데. 저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상현이는 바보가 아니야."
하수연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성대원도 그러더니, 박형석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현이 위험하다는 사실 하나에, 그 냉철하던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이다.
역시나. 박형석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하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위험하다고 느꼈으면 구조요청을 보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
이걸로 충분하다. 하수연은 굳이 더 말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두었다. 박형석은 냉정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해했습니다."
역시나, 곧 박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잃은 건 예기치 못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지원 요청을 해선 안 되거나,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아."
"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가령 부상을 입으셨다거나, 더 이상 공략을 진행할 수 없는… 그런 사태까지 벌어졌을 땐."
"도와야지."
하수연이 대답하고, 박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상현은 유능하지만, 그런 만큼 스스로에게 과한 짐을 지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두 사람의 역할이었다.
"기준점은 뭘로 잡습니까?"
"나르둑의 모래시계."
박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었다.
나르둑의 모래시계는 일순간 사용자를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이지만, 이동 따위의 다른 행동이 제한된다.
그걸 사용했다는 건 정말 궁지에 몰렸다는 의미니까.
"그럼 투입한 마족들 복귀시키고……."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움직이려는 박형석을 제지하고, 하수연은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직접 갈 거야."
*** '이거 위험해.'
상현은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쳐냈다. 일단은 숲으로 들어왔고, 두터운 나무 사이로 잠깐이나마 몸을 숨긴 상황이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몬스터 반응을 계산하면, 이대로만 있어도 걸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문제는 그 작은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달빛이 푸르게 바뀐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칸스로프들이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들은 첫 공략 당시에 보았던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몬스터로 변이했다.
"크오오오오오!"
포효 소리마저도 거의 충격파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3번방 몬스터의 절반 정도가 모여서 만들어진 늑대인간. 녀석은 거대한 빌딩과도 맞먹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쿠구구궁! 쿠구구구궁!
그리고 녀석은 상현을 찾기 위해 숲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었다. 거대한 발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수십 그루의 나무가 꺾여나가고, 내리치는 주먹엔 크레이터가 생겨날 정도였다.
마치 빈대를 잡겠다며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었다. 그리고 저 몬스터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자리를 좀 옮겨야겠는데.'
늑대인간은 점점 상현과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머리 위로 저 육중한 주먹이 내려찍힐 터.
하지만 무턱대고 나섰다간 합쳐지지 않은 몬스터를 마주할 테고, 그랬다간 저 늑대인간 역시 상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후우우. 좋아."
숨을 고르고 상현은 집중했다.
눈을 감고, 근방의 지형을 머릿속에 그렸다. 지도를 보듯 숲의 구조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극도의 공간지각능력. 감응력도, 별의 힘도 아닌 상현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능력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계속해서 했다.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해당 경로로 달려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변수를 계산한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경로가 지도 위에 그려졌다.
탁. 상현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멀찌감치 보이는 미믹. 녀석은 두어 마리의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채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뾰롱이는 여전히 달과의 '교감'을 이어가는 상황.
'조금만 더 빨리.'
바란다고 되는 건 아니겠지만, 상현은 기도하듯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타다다닷!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옆으로 나무나 바위 따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방향은 늑대인간과 정확히 반대.
그렇게 달려 나가다가 멈칫한 후 상현이 자세를 낮추었다.
'우측 둘! 좌측 하나!'
몬스터의 감정이 전해져온 것이었다.
녀석들은 상현을 찾아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진한 감정은 그대로 감응력에 걸려 들어왔다.
우선 가까운 건 좌측의 한 마리.
홰액! 상현은 급히 방향을 꺾어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정확히 몬스터의 시선과 일직선을 이루는 각도였다. 그 상태로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찰나.
"크르륵?"
어째 몬스터의 반응이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녀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나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 미심쩍은 울음소린 뭐란 말인가.
"……?"
상현은 가만히 기다리다가, 정말 조심스럽게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했다.
'…맙소사.'
카메라.
몬스터의 눈앞엔 카메라가 둥둥 떠 있었다. 급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방송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보니,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크르르르……."
녀석은 카메라를 노려본 채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현은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저건 카메라 자체에 보이는 적의가 아니라, 놀랍게도 주변에 상현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이건 안 돼.'
상현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귓가로 가져갔다. 딸깍, 호출 버튼을 누른 후 상현은 속삭이듯 말했다.
"형석 씨. 이거 아무래도……."
하지만 우우우웅, 말하던 순간 몸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아니, 단순히 느낌일 뿐이었다. 마치 가만히 잠들어있던 기운이 날뛰기 시작했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 길드장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박형석의 말을 끊고 상현은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들끓는 감각 속에서 뒤쪽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뾰로롱?"
푸른빛의 후광을 뿌리는, 뾰롱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