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기분이 묘하단 말이지."
상현은 포탈을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눈앞엔 팔렘 신전의 입구가 있었다. 박도진에게 인정받겠답시고, 일전에 공략을 진행했던 던전.
남부터미널 때도 그랬지만, 이럴 때면 남다른 감회가 밀려들었다.
그때 상현을 발견한 출입관리 직원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기 허가증이랑……."
"괜찮습니다. 이미 연락 받았으니까요."
"아, 하긴."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에서 자격증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상현은 머쓱하게 직원의 뒤를 따랐다.
곧 던전에 들어서자 어두운 복도가 펼쳐졌다.
첫 공략 땐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현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방송을 세팅했다.
"뾰로롱?"
곁에 있던 뾰롱이가 상현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이전에도 가끔 하던 행동이지만, 훈련을 마친 이후 더욱 잦아졌단 느낌이었다.
'동기화율이 올라가면서 더 친해진 건가?'
상현은 한손으로 대충 놀아주며 준비를 마쳤다.
[B급 던전 양학]
심플한 제목.
이전이라면 어떻게든 어그로 끌릴 법한 제목을 선택했겠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상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시청자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제목이라도, 그 정도 수의 시청자가 있는 방송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열흘간의 훈련 탓에 시청자들은 목을 뺀 채 방송을 기다리는 상황 아닌가.
[ㅁㅊ상현이다ㅋㅋㅋㅋㅋ]
[상현아!!!! 기다렸다!!!!!]
[이제 훈련 끝난거냐???]
역시나 폭발적으로 밀려드는 시청자들과 그들의 채팅. 자연스럽게 채팅 채널이 분할되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춰졌다.
대기 중인 상황실 직원들이 손을 쓰기 시작한 것.
"자아아아!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김상현이고, 오늘 공략할 던전은 B급 던전! 저번에 한 번 왔던 곳이죠?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 겁니다!"
척! 상현은 오른손을 뻗어 복도 너머를 가리키며 외쳤다.
"순수한 던전 공략이 아닌, 타임어택! 최대한 빨리 이 던전을 폐쇄하는 쪽으로 갈 겁니다! 훈련의 성과는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속전속결!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멘트. 이미 상현은 복도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시청자들을 모아서 갈 테지만, 이곳 말고도 몇 개의 던전을 공략할 테니 그냥 출발하는 편이 낫다.
"오늘의 목표! 30분 내에, 팔렘 신전 클리어!"
후우우웅. 상현은 천천히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뒤에서부터 밀려와 힘을 실어주었다.
삽시간에 복도를 지나고 시야에 들어온 문. 손을 올리자 문이 열리고, 화악! 방 안의 불이 켜졌다.
사방은 휘황찬란한 보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상현은 감탄하는 대신, 미련 없이 힘을 끌어 올렸다.
"1번방 도착! 이건 전부 가짜죠!"
후우우욱! 바람이 상현을 휘감고 돌며, 주변의 보물들을 건드렸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감추는 녀석들. 이건 애초에 환상이었다.
"바로 이쪽에,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그 친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얻어야 하는 오브젝트는 보물상자 형태의 몬스터인 미믹이었다.
녀석은 구석진 곳에 대기하다가, 상현이 다가서자 움찔 떨었다.
"이야, 정말 반가운데요?"
멘트를 치면서도 상현은 녀석과 뾰롱이 사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이어진 빛의 선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였구나.'
그땐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당시엔 뾰롱이가 미믹을 길들인 것처럼 느꼈고, 미믹은 상현의 편에서 몬스터와 싸우기까지 했다.
이게 바로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미믹은 상현이 다가서자 입을 쩍 벌렸다.
침이 툭툭 떨어지며 바닥을 녹여냈지만, 그건 공격하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마치 강아지가 헥헥거리는 행동과 같았다.
상현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감정이 분명하게 전해졌으니까.
***
"이런 속도라니……."
박형석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상현이 보여주는 공략 방식은 그의 상식과는 궤를 달리했다.
방금 던전에 들어섰으면서, 처음 약속했던 30분은커녕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팔렘 신전을 마무리하는 단계였으니까.
가고일은 단 일격에 쓰러졌으며 마지막 방의 수호병들은 몰아치는 폭풍에 짚단처럼 쓰러졌다.
뾰롱이가 뽈뽈대며 결정을 회수하고, 상현은 이제 출구에서 던전의 UEL을 회수하는 상황.
이제 저것만 마치면 하나의 던전이 폐쇄되는 것이었다.
- 이렇게 팔렘 신전! 마무리하게 될 텐데요, 그렇다고 여기서 쉴 순 없지 않겠습니까?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야죠. 오늘은 추억팔이도 할 겸, 역시나 공략했던! 월광 소나타로 넘어가겠습니다!
"포탈! 포탈 열어요! 다음 좌표 월광 소나타!"
멍하니 지켜보던 박형석이 급히 외쳤다.
상현은 방송을 진행하듯 말했지만, 저건 분명 박형석에게 포탈을 준비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우우우웅!
상현의 앞에 거대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월광 소나타로 연결된 포탈이었다.
상현이 바로 들어서고, 이어진 광경에 박형석은 다시금 놀라야 했다.
"…미믹도 갈 수 있는 거였어?"
상현이 포탈에서 벗어나고, 미믹이 그 뒤를 따른 탓이었다.
마족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삐약이라는 매개체가 공간을 연결해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역시 길드장님은……."
새삼스레 동경심이 싹트는 걸 느끼며 박형석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월광 소나타의 1번방은 역시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진행할수록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방식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긴장되진 않았다.
궁금한 부분이라고 해봤자 상현이 이번 던전을 얼마나 빨리 깰지, 혹은 라이칸 스로프를 제압하는 데 얼마만큼의 전력이 들어갈지 정도.
- 착한 사람은 동물을 괴롭히지 않죠!
역시나. 상현은 헛소리와 함께 그대로 치고 나갔다. 토끼나 사슴 따위의 동물들이 놀라 도망치고, 상현은 그 사이로 파고들 듯 전진하는 식이었다.
삽시간에 1번방을 벗어나고, 이내 2번방.
동물과 몬스터의 경계에 위치한 녀석들이 보였다.
뿔 달린 호랑이라던가, 흉악한 발톱을 지닌 불곰 따위가 상현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 시간이 없단 말야, 자식들아!
후우우웅!
솟구치는 바람에 녀석들은 하늘로 치솟았다. 각 몬스터 한 마리마다 하나의 소용돌이가 일며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상현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나아갔다. 이내 뒤에서 묵직한 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월광 소나타의 핵심은 막 도착한 마지막 방인 이곳이었다.
'여기선 그래도 시간 좀 걸리시겠…….'
생각하다가 문득 박형석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실이 너무 조용했다.
직원들의 타이밍 소리, 이리저리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
뒤를 돌아보니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상현의 영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형석의 시선이 닿았다는 걸 느끼자 직원들이 흠칫하며 다시금 업무에 열중했다.
박형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니터링 팀 제외하곤 그냥 보시죠. 저도 구경한다고 정신없는데, 여러분만 일 시킬 순 없으니까요."
직원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러나 던전의 지원 요청 따위를 관리하는 모니터링 팀만 얼굴이 시무룩해졌을 뿐.
"모니터링 팀도 교대로 작업하세요. 5분 단위. 옆 부서 직원 분들이랑."
"감사합니다!"
확 밝아지는 표정에 박형석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영상에 집중했다.
이내 뒤에서 내기가 걸리기 시작했다.
상현이 이번 방을 클리어하는 데 걸릴 시간이 주제였다.
예상시간은 몇 십 초에서 20분까지 적기 않은 범위였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걸 지켜보다가, 박형석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는 5분에 걸죠."
*** 우두둑. 우두두둑. 크와아아아!
하늘엔 보름달이 떠 있고, 귓가엔 기괴한 소리와 몬스터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이게 바로 월광 소나타의 3번방이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상현은 여유롭게 주위를 확인했다. 제아무리 흉악하게 굴어봤자, 지금 실력이라면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녀석들이니까.
'5분 정도 걸리겠는데?'
상현이 시간을 대충 가늠했다. 그리고 하늘의 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순 있지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첫 공략 때 저 달은 분명 푸른빛을 흘렸다. 그러나 지금은 평범한 보름달과 다르지 않다.
이번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넘어가려던 그때 주변의 색감이 바뀌었다.
"……!"
푸르렀던 나무는 불쾌한 진녹색으로, 황토색 대지는 음울한 갈색으로 변했다.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빛깔에 일순간 상현은 다른 세계에라도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뾰롱이의 상태를 확인한 상현이 당황했다.
푸른 달과 뾰롱이, 그 둘 사이에 빛의 선이 생겨난 탓이었다.
이 선은 뾰롱이가 특정 몬스터를 길들일 때 나타나는 종류였다. 그런데 '달'과 뾰롱이가 이어지다니. 설마 달을 길들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시청자 여러분, 이거……."
상현은 간만에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뾰롱이와 달 사이 생긴 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핸드폰을 당겨왔다. 하지만 채팅은 상현의 예상과는 달랐다.
[공략 안 하냐??]
[어째 똥마려운 표정인데ㅋㅋㅋ]
'아차.'
시청자들은 이 빛을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시청자들이 보지 못하는 게 낫다. 민간인들에게 무슨 수로 이 현상을 설명한단 말인가.
"캬오오오오!"
그때 몬스터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달의 힘으로 변이를 마친 듯 했다. 그제야 상현은 정신을 차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쁜 건 아니겠지. 일단 몬스터부터 처리하고…….'
생각하던 그때.
"……!"
상현의 표정이 확 굳었다. 몸에서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을 끌어내려 했으나, 입 밖으로 한 줄기 신음만 흘러나왔을 뿐.
상현은 다시금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제아무리 끙끙대도 바람의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망할, 뭐야! 왜 안 되는…….'
얼빠진 얼굴로 당황하던 상현은 뾰롱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이 힘의 근원은 뾰롱이에게 있다. 그런데 지금 녀석은, 마치 넋이라도 나간 듯 달만을 바라보는 상황.
"맙소사."
"크오오오오!"
상현의 탄식에 이어 흉악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홱, 홱. 상현이 바로 반응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벌써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상현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야겠는데.'
짝! 생각과 동시에 상현은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당황할 때가 아니었다. 몬스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상현은 생각을 정리했다.
보름달은 몬스터를 더욱 강하게 변이시킨다. 그리고 달빛이 푸르게 바뀐 건 뾰롱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효과를 정확히 몰랐고, 뾰롱이를 각성시킨 지금에야 이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그 현상이 벌어지는 와중에는 별의 힘을 빌릴 수 없다.
'지금 쓸 수 있는 전력은.'
상현의 시선이 홱홱 돌았다.
모래시계. 반지와 신발 등의 몇 가지 아이템. 그리고 이전 던전에서 데려온 미믹까지.
'절망적이군.'
생각하면서도 상현은 바로 행동했다.
탓, 타다다닷!
뾰롱이를 향해 몸을 날리며 멘트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자 여러분!"
단호한 외침이었다.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수련하겠답시고 10일이나 자리를 비웠던 녀석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어떻게든, 버틴다!'
결심을 내린 상현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이대로 던전을 마무리했다간 조금 아쉬울 것 같은데요? 첫 개시 던전을 그렇게 마무리했는데, 여기까지 그렇게 끝내면 허전하지 않겠습니까?"
헛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타임어택한다며ㅋㅋㅋㅋ]
[얘 갑자기 왜이럼??]
[뜬금없이 뭔소리하는거냐ㅋㅋㅋㅋ]
하지만 시청자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당연한 일이었다. 상현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분명 궤변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에이, 그래선 의미가 좀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던전의 셀프 돌발 퀘스트! 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길잡이의 능력만으로 버텨내기! 시간제한은……."
상현이 순간 멈칫했다.
뾰롱이가 얼마나 저 상태로 머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상현은 드러내지 않은 채 외쳤다.
"20분! 정확히 20분만 버텨보겠습니다! 저는 템빨이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길잡이로서의 능력 역시 충분하다는 걸 보여드리고자… 으갸아아악!"
스카카카!
덮쳐오는 굵직한 곰의 앞발. 상현은 한 바퀴 구르곤 벌떡 일어났다. 이젠 방송이고 나발이고, 당장 살아남는 것에나 집중해야할 때!
"어쨌든 지금부터 쇼타임! 20분 카운트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