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보시오, 동지들."
중국, 난창의 지하 벙커.
옌 훠의 목소리는 내부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단 한 명의 남자가 만들어낸 일이오. 적을 만났으나 파훼했고, 흩어져 있던 의지를 결속시켰소. 그리고 이제."
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 넓은 벙커 아래, 그 자신을 포함해 고작 다섯 명 정도 될까.
하지만 그들의 힘은 적지 않다.
"우리를 위한 발판이 되어주려 하고 있소."
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옌은 일부러 시간을 두었다.
만약 지금 몰아친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동의를 얻어낼 것이다. 이미 포석은 충분히 깔아 두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선 진정한 협력 관계가 될 수 없다.
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몸소 단계를 거쳐, 결론을 내려야만 앞으로의 움직임에 저항이 없을 테니까.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정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분명 저 청년이 놀라운 일을 해낸 건 맞지만, 한국은 작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만큼."
"지당한 말씀이오."
옌은 바로 말을 받았다.
당연히 나올 거라 생각한 불만이었다.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길드는 단 하나 뿐.
그곳을 제외하면 옌의 세력이 가장 강하고, 이 남자는 바로 그 아래 단계였다.
상당한 규모의 집단을 운영하는 만큼.
이런 일에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법.
곁의 세 사람도 옌의 얼굴로 시선을 모았다.
남자가 다시금 말했다.
"지당하다면…."
"걱정을 말하는 거요.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그 작은 땅에서조차 지금껏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이 없소."
"지원자가 없었기 때문 아닙니까.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건 범부가 할 수 없는 결정이니."
"그는 해냈지."
"제 질문의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시야를 조금 넓혀보시오."
빠른 템포의 대화. 옌의 마지막 한마디에 남자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거대하오. 땅덩이뿐만 아니라 인구 역시. 그런데, 그 15억의 인구 중 그 청년만큼의 성장세를 보인 이가 있었소?"
"적어도 제 기억엔 없군요."
"그럴 거요. 그럼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면. 세계를 본다면 찾을 수 있겠소? 던전이 생긴 이래, 현재까지 말이오."
"……."
남자는 입을 닫았다. 불만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는 듯 보였다.
그런 남자를 향해 스륵 옌은 용이 그려진 붉은 장포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게다가 저 청년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소. 어쩌면 이런 자리를 늘 찾아왔던 것일 지도 모르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제대로 모른다는 의미로도 들리는데, 어떤가요?"
이번엔 다른 여자였다.
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옌이 몸을 홱 돌렸다.
길게 묶어 내린 터럭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한쪽 벽을 메운 거대한 화면에선 상현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글쎄. 아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만. 아시잖소? 그는 주변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소."
"합리적이네요. 좋아요. 저희는 함께 하도록 하죠."
여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각거리는 구둣굽 소리와 함께 옌에게 다가섰다.
옌은 그녀의 손을 힘 있게 맞잡곤, 이어서 벙커 안을 돌아보았다.
"다른 분들은 어쩌시겠소? 설명이 부족하다면 더 해드릴 것이며, 내키지 않는다면 돌아가도 좋소."
성의는 보이지만, 굽히진 않는다.
그 안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걸 기폭제로, 다음 순간.
"나도 하지요."
"동참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추가로 악수를 건넸다.
이제 남은 건 가장 처음 질문을 던졌던 남자뿐이었다.
옌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돌았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더니, 주변의 사람들과 화면을 한 번씩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시선은 옌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척 포권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함께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렇다면 이것들을."
촤라락. 촤라락. 촤라락. 촤라락.
옌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자료들을 빠르게 건넸다.
처음 받아들였던 여자가 코웃음을 흘렸다.
"이런 결과가 될 거라 예상하신 모양이군요."
"그런 건 아니오.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다 생각했을 뿐이지. 우선 내용부터 확인해주시겠소?"
파락하고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옌은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이 다섯 길드가 세력을 모두 합친다면, 중앙 길드가 관여한다 해도 쉽게 제압당하진 않을 터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불을 피우는 건 쉽지 않지만, 대신 한번 피어난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으니까.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어갔다.
그걸 확인하고 옌이 입을 열었다.
"그게 여러분께 부탁드리는 역할이오. 물론 서두에서 확인하셨겠지만, 우리 길드가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을 것이고… 혹여나 의문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하시오."
"상세하네요. 언제부터 계획한 거죠?"
"이번 청소 때, 저 청년을 직접 만나고부터. 그는 영웅이 되어야 하오. 우리는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로서 남아야겠지. 아무튼, 질문은?"
옌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저곳에 정리된 정보들은, 각 길드가 맡아주어야 할 던전의 내역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고, 그만큼 던전도 많다.
하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의 생활은 극과 극이다.
중심 도시들은 다른 선진국 부럽지 않게 발달했지만, 아직 외곽은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런 곳들부터 바로 폐쇄해 나가기 시작한다는 게 이번 계획의 요점이었다.
"충분해요."
"다른 분들은?"
"나 역시."
"저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였다면 입장이 나뉘었겠지만, 그들 모두는 단번에 동의했다.
중국 정부는 던전의 유지를 주장하는 입장이었고, 당연히 '공인' 길드의 입장도 같았다.
그 덕분에 나머지, 중국의 모든 길드는 던전을 없애자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인민'들의 피해를 없애는 것.
갑작스레 게이트가 열리더라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어차피 마켓 포인트야 충분히 많다.
또한 정부는 몰라도, 협회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다.
"…좋소."
옌 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천천히 주먹을 내뻗으며 말했다.
"찬란한 불꽃은 인민을 위해."
"찬란한 불꽃은……."
네 사람이 따라 말하며 옌에게 다가섰다.
이어서 똑같이, 모두가 주먹을 뻗어 맞대었다.
"…인민을 위해."
*** 그 무렵, 상현은 고민하고 있었다.
"…뭘 골라야 하지?"
일렁이는 물결 아래, 빛에 반짝이는 황금의 성.
이곳이 이번 던전의 메인 페이즈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부엔 몬스터나 함정 따위가 헌터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고, 뚫고 나아가면 던전을 클리어할 테지만…….
지금 상현의 앞엔 정확히 세 개의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인어는, 곁에서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기다린다! 고른다! 기다린다! 고른다!"
앵무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드는 통에 이젠 신경쇠약이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고를 순 없었다.
이번 선택이 공략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게 느껴졌으니까.
'다른 길은 막혔고.'
인어가 바라는 건, 파티 하나당 하나의 공간을 골라서 들어가는 것.
혹시나 다 같이 갈 수 있을까 싶어, 모두 손을 잡아보기도 했지만 인어는 다시금 발작을 일으켰었다.
"하나! 공간 세 개! 너무 적다!"
공략을 위한 최소 인원이 셋이라는 뜻.
결국 이 세 개의 문을 모두 열어야 한다는 것인데, 내부 구조를 모르니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포지션에 맞춰야 할 텐데.'
정황상 각 공간의 구조는 분명 다를 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파티원들의 성향 역시 저마다 다르다.
머피는 방어에 특화된 능력을 지녔고, 강영훈은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광전사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상현은 당연히, 전체적인 상황의 흐름을 읽는 것에 능숙하다.
그렇기에 방을 고르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각자의 성향에 적합한 구조를 선택해야만 공략이 수월할 테니까.
그게 공략하기 수월할 테니까.
'망할.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단서가 너무 없어.'
상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힌트라고 주어진 건진 몰랐지만, 각 문에는 생전 처음 보는 상형문자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집트 벽화 따위에서나 나올 법한 종류.
당연히 상현으로선 분석해낼 수 없었다.
감응력으로 읽어보려고도 해봤으나, 흐릿한 이미지만이 떠오를 뿐.
'이 녀석이랑 비슷하겠지.'
문자를 새긴 존재가 곁의 인어와 비슷한 지능이라면.
읽어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상현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대상이 '아는 것'에 국한되어 있으니까.
"기다린다! 고른다! 고른다! 고른다!"
다시금 날뛰기 시작하는 인어.
상현은 다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잠깐! 고를게! 고를 테니까!"
"고른다!"
"그래. 한 번만 더 묻자. 여기 방 안에 뭐가 들었…."
"키리링! 으르르릉! 카카칵!"
"…망할."
아까 질문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무언가를 건네는 듯하다가, 사방으로 뽈뽈대며 돌아다니더니 콱! 앞의 무언가를 전신으로 잡아채는 행동.
나름 설명이랍시고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얻어서 준다. 움직인다. 잡는다. 대충 이 정도 느낌인데. 아무래도 더 이상 나올 건 없는 모양이고.'
다시금 녀석이 날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를게! 진정하라고! 고를 테니까!"
외치고 상현이 성대원과 비키 엘리엇을 가리켰다.
"두 분이 첫 번째 방. 저랑 수연 씨가 가운데로 갑니다. 머피랑 강영훈 씨가 마지막으로 가주세요."
"뭐 좀 알아냈어?"
"…일단 추측만 할 뿐이죠. 1번방은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것 같고, 2번은 도망치는 구조. 3번은 몬스터랑 전면전을 치를…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확실하진 않고?"
성대원의 말에 상현이 끄덕였다.
"읽히질 않아요."
"어쩔 수 없지. 괜찮을 거다. 어이! 우리 들어간다!"
성대원은 상현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인어에게 말했다. 녀석이 신난다는 듯 방방 뛰더니, 그대로 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어라?"
상현은 살짝 긴장했다.
척 봐도 딱딱해 보이는 문이다.
저 속도로 부딪쳤다간, 꽤나 다칠 것 같은데…….
하지만 쑤욱! 녀석은 그대로 문을 관통해 들어갔다.
이어서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모두해서 세 번의 움직임.
그리고 녀석이 지나간 자리엔, 녀석과 정확히 같은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열쇠."
하수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 꼴을 지켜보았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열쇠라는 게, 정말 열쇠라는 뜻이었구나……."
상현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인어에게 말했다.
"지금 들어가면 되는 거지?"
쿵! 인어가 발을 굴렀다.
"들어간다!"
"오케이. 그럼 진입… 하기 전에!"
스아아아.
상현이 핸드폰을 당겨왔다.
"아, 아.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며, 현재 저희 파티는 내부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죠. 또한 저도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상현이 씩 웃었다.
"하하핫! 아마 굉장한 녀석을 만나게 될 거란 말씀만 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럼 각설하고!"
상현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에 맞춰 모든 파티원들이 마지막으로 상태를 점검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두근대는 심장 박동과 함께, 상현은 외쳤다.
"2번 방! 돌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