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3분 정도 이야기하면 들어주겠다."
김지광은 여전히 아무런 감흥도 없는 목소리였다.
상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아마 바빠질 겁니다."
"무슨 뜻이지?"
"제 요구를 수용하신다면, 할 일이 많아질 거란 뜻이죠. 아, 물론 헌터로서 말이에요."
"……."
김지광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고, 눈썹은 위로 올라갔다.
이 얘길 하는 이유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일을 더 시켜주겠다는 말은 보상으로 내걸기엔 터무니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현은 정확히 그런 의도로 꺼낸 이야기였다.
'섣불리 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냐.'
가족 때문인지 뭔지 확실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과거는 상현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괜히 그 부분을 자극했다간 부정적인 결과만 얻을 게 뻔했다.
타인의 섣부른 위로는 불쾌한 간섭으로 느껴질 뿐이니까.
'모르는 척. 그러면서도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면 돼.'
상현이 생각했다.
그 증거로, 김지광은 상현이 조용히 있음에도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조금이나마 관심을 끄는 덴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들은 걸로 봤을 땐."
상현이 입을 열었다.
"길드 업무 중, 실질적으로 던전에 들어가는 건 지광 씨가 도맡아서 처리하신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렇게 많지는 않다."
"오늘도 그렇잖아요? 중간에 영훈 씨 돌려보내신 거 맞죠? 나머진 알아서 처리하신다고."
"그래."
그가 덤덤히 수긍했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그가 보인 긍정의 표시였다.
청신호다.
상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워커홀릭. 그런 말 있잖아요? 나쁘게 말하면 일 중독자, 좋게 표현하면……."
상현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시선을 올렸다.
기억나지 않는 단어를 떠올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뭐… 아무튼요. 일종의 사명감 비슷한 걸 가진 사람이겠죠. 아닌가요?"
'사명감'에 상현이 힘을 주었다.
묘한 뉘앙스였다.
분명 내용 자체는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곳에선 일을 해야만 한다는 듯한 느낌이 풍겨나고 있었다.
"……!"
상현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금세 돌아왔다.
스르륵 김지광이 굳게 꼈던 팔짱을 푼 탓이었다.
'가능하겠는데.'
남은 시간은 2분 여.
하지만 저 행동은 마음의 빗장이 살짝이나마 풀렸다는 걸 의미했다.
"너무 많은 걸 이야기했군."
그때 김지광이 책망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현에게 그 정보들을 알려준 당사자들은 이 자리에 없다.
저건 그저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불과했다.
"글쎄요.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거예요. 김지광 씨가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끊임없이 의뢰를 처리하시는 건진 모르지만……."
상현은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원하시는 대로, 바쁘게 움직이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드리겠다는 의밉니다. 그것도 A급 던전으로만."
"지금 그걸 조건이라고 내미는 건가. 휴일도 없이 일하라는 의미로 들리는데."
"물론이죠. 기존의 제약이 풀리지 않으면, 솔직히 성에 안 차는 의뢰도 진행하셔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골라서 받으시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요."
그에게 필요한 건 몰두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을 혹사시킬 수 있는 높은 난이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흑나비라면 B급 던전뿐만 아니라 심지어 C급 의뢰마저도 진행해야 했다.
김지광이 스스로에게 들이민 조건에는 모든 의뢰를 수행한다는 것 역시 있는 것 같았으니까.
"스릴이 넘치는 걸 좋아하시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실력을 증명하고 싶으신 건진 모르지만요… 분명히 지광 씨는 그걸 원하고 계실 겁니다. 저는 알 수 있어요."
"…확실히 너무 많은 걸 말한 것 같군."
흔들린다. 상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지광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그가 눈을 감았다.
상현은 돌아올 반응을 기다리다가, 눈동자만 움직여 정면 벽의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은 10분.
원래대로라면 김지광은 지금쯤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자리에 앉아 상현의 제안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이지훈이 찡긋, 상현을 향해 윙크를 해 보이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상현이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짓만으로 김지광을 가리키곤, 그대로 출입문으로 향했다.
자리를 피해주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딜 가는 건가, 지훈."
하지만 김지광도 전투 계열의 A급 헌터라 그 정도 기척은 놓치지 않았다.
이지훈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차. 걸렸나요?"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상현은 아쉬움에 작게 혀를 찼다.
이지훈 때문에 김지광은 고민을 멈추었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 그냥 피하는 건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데 방해될까봐. 수연 씨한테 미리 말 해놔야 할 것 같아서요."
김지광의 관심이 완전히 이지훈에게로 돌아섰다.
"무슨 뜻인가."
"속이고 몰래 가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희 사이에 그런 게 있겠어요? 그냥……."
이지훈이 다시금 예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곧 동의하실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하라고 말해두려고 했죠. 네 명 다 동의했다곤 해도 절차란 게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아직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요. '곧' 동의하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이어 이지훈은 히죽 웃더니, 훌쩍 나가버렸다.
상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두 사람 사이를 움직였다.
'곧 동의할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상현이 의문을 품었다.
같은 길드에서 지내다 보니,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건지 궁금했다.
김지광은 잠시 말이 없다가, 곧 우울하게 상현을 바라보았다.
"던전을 폐쇄할 생각이라고 들었다."
"그렇죠?"
"이젠 더 숨길 것도 없으니, 솔직히 말하겠다. 난 그게 두렵다. 내가 할 일이 사라지는 게. 던전이 없어진다는 건, 결국…."
"절대 그렇지 않아요."
상현이 바로 대답하고, 김지광은 입을 꾹 닫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든 던전을 없애는 건 불가능해요. 그리고 던전에서 나오는 UEL 결정. 그것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렇죠. 세계 각지에서 시위라도 일어날 걸요?"
"그렇다면…."
"무작정 폐쇄하는 게 아닌, 협회의 제한된 인력으로도 확실하게 관리할 수 있는 정도만 둘 겁니다. 상위 던전뿐만 아니라, 하위 던전도 마찬가지죠."
그게 상현이 세운 계획의 핵심이었다.
일정 수의 제한된 던전만을 남겨놓고, 인식 장애 및 UEL 유통 과정에 부과되는 수수료를 투자한다면, 그리고 그런 자본으로 기존에 던전을 공략하던 헌터들을 던전의 '유지 및 보수'에 배정한다면?
던전을 안전하면서도 꾸준한 UEL결정의 공급원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헌터들이 부담해야 하는 위험성 역시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무작정 자격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교육 과정을 편성함으로서 헌터를 육성할 수도 있다.
"지금처럼 무작정 돈만 보고 뛰어드는 헌터들도 상당수 줄어들 거고, 던전이 내포한 잠재적 위험성도 사라지겠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상현이 씩 웃었다.
"최상위권 헌터들은 죽어라 바쁠 겁니다. 지금처럼 길드장 자리에 앉아서 놀 수 없을 테니까요. 내부에 쌓이는 UEL을 해소하려면 공략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A급 헌터들뿐이니."
다른 헌터들에겐 끔찍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김지광에겐 아니다.
상현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런가."
역시나 김지광은 처음으로 상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리는군.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건가. 그런 계획은 협회를 움직일 수 있는. 정상에 올라야만 실행 가능한 내용이다."
"물론 알고 있죠. 그러니까 제가 김지광 씨 앞에 앉아있는 거 아니겠어요? 협회라는 거대한 언덕에 비비려면……."
상현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적어도 한국의 길드만큼은 한 뜻으로 모아놔야 할 테니까요."
***
"후아."
상현은 흑나비 사옥을 빠져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하니, 박형석이 차량 옆에서 딱 대기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상현은 괜스레 양복 깃을 탁탁 털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박형석이 질문했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결과를 예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럴 법한 게, 상현은 지금 뿌듯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물론이죠. 흑나비 전원 동의했고,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의뢰만 넣으면 돼요. 비용도 상당 부분 절약할 수 있을 거예요."
촤악 상현이 품 안에서 검지와 중지만으로, 명함 비슷한 걸 꺼내 보였다.
"의뢰 할인 쿠폰! 이건 저희만 쓸 수 있는 겁니다. 다른 길드는 한 군데도 받은 적 없어요."
"역시… 길드장님이라면 해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 쿠폰,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겁니까?"
"아니죠."
상현이 피식 웃으며 다시 품 안으로 쿠폰을 챙겼다.
"장난삼아 만들어준 것 같아요. 이지훈 씨라고, 장난기 넘치는 분이 계셔서."
"이해했습니다."
"바로 가죠. 일정 빠듯하니까."
상현이 차에 올랐다.
흑나비라는 보너스 과제는 처리한 셈이었고, 이제 남은 건 바운티였다.
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즐기며 상현이 운을 뗐다.
"식사 메뉴는 뭐예요?"
"괜찮은 레스토랑이라는 것까지만 들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다고 전해달라더군요."
"흐으으음. 레스토랑이라. 꽤 비싼 곳이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내키지 않는데……."
상현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상당한 돈을 벌었음에도, 상현은 그런 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포크랑 나이프가 왜 몇 개씩 있는 거냐고…….'
나이프는 썰고, 포크는 찍고, 단지 그런 역할일 뿐인데, 무슨 요리마다 식기류가 계속 바뀌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고작 요리를 먹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장소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할까요?"
"아뇨. 그럴 것까진 없어요. 그냥 가죠 뭐."
상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친근한 콘셉트로 밀고 나간다 했으니, 대충 그런 맥락에서 이해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때 신호에 걸린 건지 차가 멈추었다.
동시에 박형석이 상현에게 팔을 뻗어 간략한 서류 몇 장을 건넸다.
"아, 길드장님. 보고드릴 사항 있습니다."
"…보고요?"
상현이 의아하게 받아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괴상한 소리로 감탄했다.
"그사이에 또 일하셨어요?"
"물론입니다. C급부터 B급까지. 대략 60여 명 가량의 명단입니다. 그리고 뒤쪽엔……."
서류에 적힌 건 길드에 가입신청을 넣은 헌터들과, 일반인들의 신상명세였다.
"좀 쉬시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현은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휘유 놀랍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전체 헌터들 중, 자그마치 3분의 1가량이 B급 헌터였다.
'엄청 많은데?'
전체 비율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수였다.
하지만 소속을 보니 B급 중 상당수가 뒷동네 주민인 듯 보였고, C급 중에서도 그쪽 출신이 꽤 보였다.
'괜찮은 흐름이야.'
이제 이 소식이 점점 퍼져나가기만 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터였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넘긴 순간.
"잠깐만. 이 사람도 지원했어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이지은 씨요."
이전에 합방을 진행했던 여캠 BJ였다.
상현의 길드에 들어오는 것보다, 그녀가 버는 풍선이 몇 배는. 아니, 몇 십 배는 많을 텐데.
"아. 맞습니다. 홍보팀으로 배치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연예인을 쓰는 것보단, 길드장님의 기존 이미지를 생각해 인터넷 방송 쪽에서…."
"네, 뭐. 그렇게 진행해주세요. 나쁠 건 없으니까. 근데 왜 여기서 일하려는 건지를 모르겠네요."
"그건 면접 때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길드장님, 마지막 페이지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상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뒷 페이지요? 뭐 있어요?"
촤락 상현이 종이를 넘겼다. 그러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거기에 적힌 이름을 뚫어져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박형석을 바라보았다.
"이, 이 사람은…."
"역시 아시는 분이시군요. 일부러 따로 빼두었습니다. B급 시험에서 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박형석이 무어라 설명했지만, 상현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순결이……."
"예?"
"아닙니다."
상현은 반쯤 패닉에 빠진 채 급히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에 적힌 길드에 지원한 이유를 읽곤, 전신을 살짝 떨었다.
"내, 내가 좋아서라니……."
"만족스러우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끝에 하트를 붙여둔 게 찜찜했는데, 기우였나 보군요."
박형석의 헛소리에 상현이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대체 어딜 봐서 만족한 걸로 보이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으나, 차마 표면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이건 박형석이 밤새 일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으니까.
상현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면접… 바로 진행하죠. 고생하셨어요. 뛰어난… 전력을 얻어서 너무… 기쁘네요. 정말로… 예."
"그러실 줄 알고."
박형석이 뿌듯하다는 듯 말했다.
"이미 잡아두었습니다. 바로 내일 모레, 면접 진행하시면 됩니다."
"잘하셨어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박형석을 향해 상현은 파르르 떨리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푸하아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