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끊이질 않는군."
박형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잠을 자지 못한 여파가 이제야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쳐 있을 틈이 없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 사람은 영상 쪽 부서 넣고, 이쪽은 홍보팀으로… 이 친구는 패스."
박형석이 다시금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 그가 처리하는 건, 상현이 넘긴 수만 통의 이메일이었다.
읽지도 않은 게 태반이었고, 실질적으로 그가 뽑아야 하는 건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충 보고 넘길 순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길드장 상현의 이미지에 데미지를 줄 테고.
그건 그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가 메일함을 닫았다.
지금 정신 상태로 저리하다간,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놓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건 내용 한 줄 한 줄을 모두 읽어야 했고, 피로가 더 쌓였다간 오늘 상현을 보좌하는 것에 여파가 미칠 것 같았다.
"지금은… 헌터들부터. 후. 쉽지 않군."
이번에 그가 만진 건 '헌터'들의 지원서였다.
일반직에 비해 신청서가 많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일반직과 달리 헌터는 상시 모집하는 포지션인 탓이었다.
게다가 서류 심사 역시 무조건 통과 후, 바로 면접을 진행하는 방식이었으니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도 않았다.
이름, 등급, 현재 소속과 희망하는 포지션, 그리고 지원하는 이유까지.
딱 다섯 가지의 정보만 요구하는 식이었다.
"B급 헌터부터 면접 일정 잡는 쪽으로 하고……."
그가 메일을 하나씩 읽어가기 시작했다.
C급 헌터라면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을 우선으로 불렀겠지만, B급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뜩이나 사람도 적으니 그냥 지원하는 족족 날짜만 지정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단 한 가지.
'지원하는 이유'만은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마땅한 길드가 없어서라. 이건 뒷동네 소속이군. 재밌을 것 같아서? 이건 그냥 헌터고……."
답장을 보내던 도중, 이상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상현 씨가 좋아서♥>
"…이건 뭐지?"
박형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자신과 비슷한 맥락으로. 길드장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기에 좋아한다는 의미인가 싶었지만.
'그럼 하트는 왜 붙인 거야. 여잔가?'
생각하며 그가 이름을 확인했다.
여자라면 이해할 수는 있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도무지 여자 이름으론 보이지 않았다.
<민찬영> 그러다가 그가 멈칫했다.
어째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끝에, B급 시험. 그곳에서 상현과 함께 있었던…….
"대머리."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만난 건 3차 시험이 전부였기에 자세히 보진 못했으나, 대충 떠오르는 기억으론 상당한 실력자였던 것 같았다.
"하긴. 길드장님이 데리고 다니셨을 정도면."
상현에게 선택받았다는 건, 자신처럼 분명한 가치를 보였다는 의미 아닌가.
끝의 하트가 괜스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박형석은 결정을 내렸다.
<이틀 뒤. 면접 보시면 됩니다. 장소는 CKY 사옥이며 시간은…….> 답장을 보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형석은 뿌듯하게 웃었다.
"길드장님이 좋아하시겠는데."
아무래도 유능한 헌터를 하나 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
"거절하겠다. 우리는 그리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흐으음, 저는 꽤 끌리는 제안인데요?"
"지훈, 우리 발언의 무게를 생각해라."
"에이, 한다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요?"
두 사람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김지광은 자신의 마음이 굳게 닫혀 있다고 주장하듯 팔짱을 낀 채 말했고.
이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유들유들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현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흑나비의 수뇌부 중 나머지 두 사람. 이들을 설득해야만 앞으로의 움직임에 차질이 없을 터였다.
그나마 이지훈은 방금 상현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김지광은 달랐다.
짙은 눈썹 때문인지 더욱 확고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상현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반대다. 그리고 흑나비는 우리 네 사람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만 그 제안을 수락할 수 있지."
"원하시는 게 뭔데요?"
"없다. 나는 이대로 남아있길 원한다. 네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제안이라면 얼마든 받아줄 생각이 있지만,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김지광의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흘러나오듯 묵직했다.
상현은 어쩔 수 없겠다는 시늉을 하며 이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럼 일단 지훈 씨 먼저 여쭤볼게요. 방금 드린 제안.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른 두 분은요?"
"하수연 씨, 강영훈 씨 두 분 모두 동의하셨어요. 물론 조건은 각각 다르지만."
"저만 너무 저렴하게 넘어가는 건 아닌가요?"
이지훈의 예의 눈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상현은 그 눈빛이 마치 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건 아니지만, 마치 평가하는 것 같은.
스멀스멀 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에 상현이 순간 위축되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며 상현이 입을 열었다.
"즐거움이란 게, 그렇게 저렴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특히나 A급 헌터에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요즘 크게 관심 가지신 거 없지 않으세요?"
그 입가엔 희미한 미소마저도 걸려있었다.
상현은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을 끝마쳤다.
"약속드리죠. 저랑 같이 방송하시면, 분명 재밌을 겁니다. 자주는 아니겠지만요."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데… 지광 씨. 어떠세요?"
"동의할 수 없다."
대화의 흐름이 넘어갔다.
상현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이지훈은 말만 안했을 뿐, 사실상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남은 관문은 김지광 단 한 명.
A급 헌터를 구워삶은 것 치곤, 너무 쉬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정보의 차이지.'
하수연과 강영훈이 설명해준 약점.
이지훈이 바라마지 않는 부분을 공략한 덕분이었다.
'문제는… 이 사람인데.'
김지광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크게 원하는 것들이 없었다.
그게 물질적인 부분이건, 감정적인 부분이건.
애초에 같은 길드원들에게도 자신의 정보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니까.
상현이 그에 관해서 아는 정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껏 길드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길드 바깥의 사람들과 연락한 적 없다는 사실.
그 외에는 그저 무뚝뚝하고, 성실하며, 주변에 민폐 끼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뿐.
'쉽지 않겠는데.'
던전을 공략한 끝에, 강한 보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하수연이야 원래부터 같은 입장이었으니 도와주는 게 당연했고, 강영훈과 이지훈 두 사람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A급 헌터'임에도 충분히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제시한 덕분이었다.
마켓 포인트와 즐거움.
이미 이들은 헌터의 정점에 오른 이들이었고, 어지간한 것들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김지광에게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고민하는 게 눈에 보이는군. 가보겠다."
"에헤이,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요."
상현이 일어나려는 그를 붙잡았다.
김지광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려 그런 상현을 바라보았다.
"어떤 카드를 내밀어도, 날 설득할 순 없을 거다."
"이렇게 하죠."
상현이 급하게 말했다. 여기서 김지광을 보내버리면, 다시는 만나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느낀 탓이었다.
"실패하면 흑나비에 길드 포인트 500. 지원하겠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좋다. 10분 기다려 주지."
척. 김지광이 다시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허리를 곧게 편 채 그가 시계를 확인하곤, 상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작이다. 길드장으로서, 약속은 꼭 지켜줬으면 좋겠군."
"…물론이죠."
후. 짧은 한숨을 내쉬고 상현이 이지훈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기대된다는 듯 눈웃음과 함께 상현의 대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주완 씨랑 이미지가 비슷한데.'
문득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금세 털어내고, 상현이 김지광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이대로 돌아갔다간, 기존의 두 사람을 설득한 게 물거품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박형석 역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할 테니까.
'하나씩 따져보자.'
사아아…….
상현의 분위기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외부와의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정보와, 그의 성향.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돼.'
도시 한가운데서 모래성을 쌓는 기분이었다.
준비된 건 모래성을 올릴 수 있는 판자 뿐.
나머진 그 재료를 어디서든, 어떻게든 구해오는 일이었다.
상현이 그를 머리끝부터 훑었다.
'가정은 세 가지.'
첫째, 길드에 대한 애정이 극도로 강하다. 둘째, 관심을 둘 곳이 길드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피처 삼아 길드에 집중하는 걸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솔직히 가능성이 낮아 보이고, 첫 번째나 세 번째일 확률이 높았다.
확신을 얻기 위해선,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김지광 씨."
"말해라."
"의뢰금을 조금 더 드린다면 어떨까요? 순서를 당겨 주시는 대가로."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 규칙을 어긴다면, 쌓아놓은 신뢰를 모두 잃게 되니까."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사실, 자본으로만 따진다면 상현의 길드와 흑나비는 애초에 비교 대상도 아니었으니.
"적당히 포장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실 저희 의뢰가 먼저 들어왔었다는 식으로."
"그럴 생각은 없다."
완강한 거절에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나오리라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상현이 확인하려는 건, 답변의 내용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분위기였다.
감응력 탓에 전해져오는 김지광의 감정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만약 길드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면, 그의 감정엔 불쾌함이 담겨 있어야 했다.
두 번째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길드가 그의 전부라면, 그 정체성을 흔드는 질문엔 극도의 거부감이 나타나야 하니까.
'근데 별 감흥이 없단 말이지.'
마치 컴퓨터의 오류 메시지처럼.
그저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그런 느낌의 대답이었다.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거야. 수뇌부로서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렇군.'
아무래도 세 번째 가정이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별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사이코패스처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만약 후자였다면 이렇게 A급 자격을 따내지 못했을 테니까.
결국 이 흑나비라는 집단을.
무언가를 잊기 위한. 혹은 삶의 목적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기는 모양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함으로서.
'아무래도 가족이랑 관련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데도 연락을 안 한다고 하니까… 그리고 성격이랑 연관 지어 보면…….'
다른 이들에게 전해들은 김지광은 자기 자신에게 극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근데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단 말이지.'
만약 늘 그렇게 살아왔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생활을 권장하거나, 혹은 불편함을 드러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드원들의 생활엔 조금의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극도의 개인주의? 아냐. 그거랑은 거리가 좀 있어.'
이따금. 아니, 꽤나 자주 길드원들의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었다는 이야길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상현의 머릿속에서 정보들이 천천히 얽혀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결론으로 모였다.
극도로 단순했지만, 그의 현재 직업을 생각한다면 꽤나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속죄? 그럼 그 이유는?'
만약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은 거라면 던전을 없애려는 상현의 입장에 동의해야만 했다.
하지만 김지광은 그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광 씨. A급 헌터 되신 지 얼마나 지났죠?"
"1년."
"그럼 헌터 자격 따신 건요?"
"3년차다."
"생각보다 오래 안 지났네요?"
이미지만 봤을 땐 던전이 생겼던 10년 전. 그때부터 헌터를 했을 법한 느낌인데.
그때 추임새를 넣듯 이지훈이 끼어들었다.
"지광 씨도 정말 빠르게 올라오신 편이에요. 솔직히 재능이라기보단… 부단한 노력? 잠도 줄여가면서 훈련하셨으니까요."
"그전엔 뭐 하셨는데요?"
"군인이었다."
이번엔 김지광이 대답했다.
그리고 상현은, 일순간 그의 감정이 요동친 걸 놓치지 않았다.
'이거구나.'
해답을 엿본 기분이었다.
그 안엔 미안함과 그리움 따위의 감정이 잔뜩 들어 있었다.
속죄의 의미란 건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 더.
'도피처로 삼은 건, 이 길드가 아니었어.'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어떤 사건이 있었겠지. 그리고 헌터 일을 알게 됐던 거야. 스스로에게 위험을 지우고, 몬스터를 두들겨 팰 수 있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거고.'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집착하는 건, 길드가 아니다.
이 헌터라는 직업 자체였다.
"5분 정도 지났나요?"
"6분 20초다."
"아무래도 노선을 완전히 잘못 잡았던 것 같은데……."
상현이 양손을 깍지 낀 채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상체를 정면으로 살짝 기울여 김지광과 눈을 맞추었다.
"처음부터 다시. 얘기 좀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