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끄어어어…."
상현의 입에서 다 죽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눈빛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였고, 그 아래엔 거뭇한 다크서클이 생겨난 상태.
밤을 꼬박 새워가며 메일을 읽은 탓이었다.
하지만 공지를 올린 순간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신청서는, 줄어들긴 커녕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상현이 결단을 내렸다.
처음엔 마냥 즐거웠었다.
내용을 읽는 것도 재밌었고, 가끔 특이한 사람이 나오면 낄낄대는 맛도 있었다.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날 때까지만.
그리고 여섯 시간 째인 지금은, 늘어나는 메일 개수를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답장을 안 보낸다고 쳐도, 읽어주긴 해야… 잠깐.'
그때 상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거잖아? 직원을 뽑는 거니까, 일단 필요한 사람들만 뽑고, 그 사람들이 대신 처리해주면… 되겠군. 좋아.'
언제 지쳤었냐는 듯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상현의 손이 바로 움직였다.
딸깍. 딸깍. 타다닥.
가장 먼저 설정한 건 메일함 분류 카테고리.
첫 번째 카테고리엔 헌터 지원 신청서라 적힌 메일들만 전부 다 모이도록 설정했다.
'이건 200개 정도.'
충분히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개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설정한 카테고리는 바로 '비서'.
'이건… 40? 생각보다 적은데?'
상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들어온 메일의 수만 4만 통이 넘어갔다.
물론 그중 상당수가 미성년자들이 보낸 것이거나, 장난스런 내용이긴 했지만….
갸웃하며 상현이 첫 번째 메일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문장에, 곧바로 수긍했다.
[혹시 비서는 안 구하세요???]
그 문장 아래엔, 자신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부분에 자신 있다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공지를 잘못 썼네."
애초에 이런 부분을 구한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공지사항 내용만 봤을 땐, 직접 몸으로 뛰며 방송을 진행할 사람을 구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글에, '비서로서의 재능'을 가졌다는 메일을 보낼 정도라면.
"기대되는데?"
어쩌면 김희원과 비슷한 수준의 인재를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상현은 다시 처음의 그 즐거움을 그대로 느끼며, 메일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오…."
상현이 감탄했다.
예상대로였다.
자기 재능이 '비서 일'에 적합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사람들의 스펙은 한 명 한 명이 기대치를 한참이나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딸깍.
상현이 다음 메일을 열었다. 기대감이 한층 커졌다.
"어?"
상현이 당황했다.
이번엔 어떤 사람일지 기대하며 열어본 메일엔, 일전에 한 번 봤던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다가 지원했지?"
***
"상현이 그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스튜디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성대원이 중얼거렸다.
상현은 뜬금없이 오디션을 진행할 거라며 연락을 보내왔고, 무슨 소리냐는 질문에 와서 직접 보라는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참 예측하기 힘든 녀석이라니까. 갑자기 오디션이라니… 헌터를 무슨 오디션으로 뽑아?"
그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물론 길드 이름에 '엔터테인먼트'를 붙이라 권한 건 성대원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헌터 길드여야만 하니까.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김희원이 입을 열었다.
"분명 나름의 의도가 있을 겁니다."
"무슨 의도?"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추측 좋지. 들어나 보자고."
성대원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늘 그래왔듯, 김희원은 나름의 답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공개 오디션이라는 점입니다. 중계 매체는 상현 씨의 '개인 방송'에 불과하지만, 그 규모를 생각하면…."
"파급력이 작진 않겠지. 그건 알겠어."
성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보는 아니었고, 저 정도 설명을 들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에 보여주기 위해서.
"근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데? 길드원 뽑는 과정을 중계해야 하는 이유. 그걸 누구한테 보여준단 거야?"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그가 말하곤, 다시 덧붙였다.
"협회? 아냐. 괜히 심기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뭐, 시청자 수 확보?"
"그것도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뭘까?"
"그건…."
그때 차가 부드럽게 멈추었다.
우측 창문으로 바로 상현이 말했던 스튜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가자고. 직접 보는 편이 낫겠어. 계속 뭐라고 해봤자, 그건 결국 짐작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려, 김희원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예상과는 달리, 복잡한 장비들은 없었다.
그저 기본적인 개인 방송용 조명 정도만 무대 주변에 놓여 있었고, 조악한 삼각대 위에 핸드폰 하나만 올려뒀을 뿐이었다.
조촐한 무대와, 조촐한 심사위원석.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상현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빨리 오셨네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아마."
"아마는 또 뭐야."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도 길드장님… 아니,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하지? 호롱 길드장님?"
순간 당황하는 그 모습에 성대원이 피식 웃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 아니냐?"
"…그렇죠? 프하, 좀 어색한데. 아무튼 형이라면 눈치 채실 거예요."
"눈치라…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지?"
"넵. 비밀입니다.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거든요."
"좋아."
그 말에 성대원은 빠르게 포기했다.
그리고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척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시작은 언제야? 후딱 하자고. 궁금하니까."
"이제 해야죠."
상현은 씩 웃었다.
성대원까지 오는 것으로 준비는 갖춰진 셈이었다.
"그럼…."
상현도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방송을 세팅했다.
[CKY엔터테인먼트! 첫 오디션!]
심플한 제목.
어그로를 끌어볼까 싶기도 했으나, 공지에서 사람들이 보인 열띤 반응을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3만 명은 보겠지. 그 정도면… 그 사람들 귀에도 들어갈 테고.'
후욱. 크게 숨을 들이키며 상현이 방송 시작 버튼을 눌렀다.
오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앞으로 진행할 방향이 크게 갈릴 터였다.
하나. 둘. 일곱. 열다섯. 서른아홉.
시청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방송을 켰을 때의 기분을 느끼며, 상현이 기다렸다.
[ㅋㅋㅋ오디션ㅅㅂㅋㅋㅋㅋ]
[사장님!! 노예처럼 일하겠습니다!!]
[왜 제 메일은 안읽어줌ㅡㅡ]
[몇명이나 지원했어요???]
시청자 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채팅창도 엄청난 화력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몇 배는 빠르게 올라가는 그 속도가 시청자들이 이번 '컨텐츠'에 가지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여유롭겠는데.'
상현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서도 그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무대 뒤쪽.
벽면에 큼직하게 설치된 방송 화면 덕분이었다.
심사 도중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설치해둔 것이었는데, 우연찮게 시크한 컨셉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중요한 고민이라도 한다는 듯,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고, 위의 서류를 읽는 걸 반복하던 그때.
방송을 시작한지 고작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시청자 수가 4,000명에 육박하는 게 보였다.
'슬슬….'
시작해야 할 때였다.
이 정도 기세라면 다행스럽게도, 첫 번째 참가자가 나올 때쯤엔 만 명을 찍을 수 있을 터였다.
'10, 9, 8….'
상현이 속으로 카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질문들을 돌이켜보고, 시청자 수가 5천명을 채운 걸 확인한 다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훅! 시선을 우측 정면으로 돌리며 카메라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나 형님들께 일상의 활력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BJ 김상현입니다! 그리고 이젠 CKY! 참교육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이기도 하죠? 아무튼 오늘!"
타다닥! 상현이 곁에 놓인 키보드를 두드렸다.
방송 송출용 PC가 화면에 대략적인 일정표를 띄웠다.
"이런 식으로 이번 오디션을 진행할 예정인데요, 정말 감사하게도! 여러분들이 지원을 많이 해주셔서,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제껀 왜 안봐주세요!!]
[메일 읽지도않았던데ㅋㅋ]
[니들 불합격이라고 징징이들아ㅋㅋㅋ]
[몇명이나 지원했음??]
상현이 진행하기 시작하자, 채팅창이 몇 배나 빨리 올라갔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신청서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지원자 수와, 평균 시청자 수를 대비했을 때 당연히 예상했던 불만들이었다.
'방송 보는 사람들은 죄다 지원한 거 같던데.'
그렇게 생각하며 상현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추가했다.
"그 부분 제가 공지를 드렸어야 하는데, 미흡했던 부분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진행할 오디션은, 어디까지나…."
길게 이어지는 설명.
헌터들의 지원서만 먼저 확인했으며, 나머지 분야는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신청 기간은 어제 자정까지였으니 더 이상 보내지 말아달라는 부탁까지.
"이렇게 양해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제 슬슬… 오디션 진행해도 될까요, 형님들?"
[근데 헌터를 왜 오디션으로뽑음??]
[바로ㄱㄱㄱ]
[대나무라도 써는거 아니냐?ㅋㅋ]
삽시간에 가라앉은 불만들.
지원자들은 아직 자신들의 순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는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제 모든 시청자들의 관심사는.
대체 '헌터'를 뽑는 오디션의 진행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상현의 길드 소속이 되어, 함께 던전을 공략할 헌터가 누가 될 것인지.
그 두 가지 뿐이었다.
'불판은 충분히 달궈진 것 같고.'
생각하며 상현이 슬쩍 시선을 내려, 책상 아래 놓아둔 메모 몇 줄을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자아아아- 그럼 첫 번째 참가자!"
삣! 상현의 손이 책상 위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김춘삼 씨 나와주세요!"
"…김춘삼이라니."
지켜보던 성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름 가지고 그러시는 거, 실례입니다."
"나도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
그리고 잠시 후. 무대 곁에 마련된 통로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머리는 모히칸 스타일로 짧게 쳐 올렸고, 덩치는 상현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거기에 각진 얼굴 위의 한 줄기 흉터까지.
흉악한 외모의 남자는 무대 중앙까지 척 걸어 나오더니.
정면의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1번 참가자! 김춘삼입니다!"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우렁차게 외쳤다.
팔뚝과 허벅지 부근의 양복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성대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저거…."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반갑습니다. 일단 허리를 펴시고요, 혹시 준비하신 거 있으세요? 아니면 본인을 꼭 뽑아야 하는 이유라던가…."
"예, 저 김춘삼! 가진 건 힘 하나밖에…."
상현이 오디션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에 성대원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일단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현의 요구에 남자는 근육을 불끈대며 철근을 꺾고, 두꺼운 벽돌 조각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엄청난 괴력이긴 했지만 그뿐.
저 정도라면 박도진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상현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좀 약한데요?"
"크윽, 그렇다면!"
챙-!
남자가 날카로운 회칼을 꺼내더니 그걸 자신의 배에 갖다 대었다.
"저는 시청자분들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뭣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끄아아아아! 뭐 하는 거야! 치워! 치우세요! 여러분! 하하하하! 이 분이 장난기가 심하셔서…."
무대는 개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참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결국 상현이 결정했다는 듯 크게 외쳤다.
"합격! 합격! 일단 그거 좀 치워요! 합격이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잊고, 다시 태어났다는 기분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댔다.
그리고 채팅창을 보니, 시청자 반응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상황이 유쾌하기도 했고, 일반인들이 보기엔 무지막지한 힘인 것으로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성대원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뒷동네 주민 맞지?"
"맞습니다."
김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물어볼 것조차 없었다. 냄새가 너무 진했으니까.
아마 상현이 '알 수 있을 거다.'라고 말한 게, 이런 의미인 모양이었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눈을 몇 번 끔뻑인 다음. 입맛까지 한 번 다신 뒤에야.
"정말이지, 이 녀석 대체."
성대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