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우르르릉! 우르르릉!
흡사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휘감고, 몰아치던 바람은 이내 완전히 형상을 갖춘 상태였다.
이전에 한 번 보았을 때와 같았다.
지니는 상현의 서너 배는 될 법한 덩치와, 탄탄한 근육질 상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하체는 연기처럼 희끄무레할 뿐이고, 머리는 반질반질한 대머리였다.
"이건 생각 못했는데."
상현이 반쯤 허탈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B급 던전. 월광 소나타를 공략하던 바로 그때.
이 녀석은 그곳의 보스 몬스터를 한 주먹에, 말 그대로 '날려'버렸다. 심지어 푸른 달에 강화된 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전투력이라면…….'
몬스터를 막아낼 지도 모른다. 기대감이 싹텄다.
물론 지금 달려오는 몬스터들도 평범하진 않다.
레이더에 붉은 점으로 표시되는 것도 그랬고, 상현이 본 적조차 없다는 것 역시 그랬다.
'애초에 분위기 자체가 다르지.'
녀석들 피부 위에 새겨진 글자에서 스산하게 새어 나오던 붉은 빛. 그리고 인간형 신체에, 머리 위의 뿔까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 신화 속에서나 나오던 몽마(夢魔)들의 생김새가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상현이 중얼거렸다.
이기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진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평범하지 않은 건 눈앞의 근육 덩어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알라딘에서 나오던 램프의 요정.
마치 그것처럼 튼실한 육체를 자랑하며,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파괴력을 보이지 않았는가.
"크오오오오!"
그때 몬스터의 포효가 들려왔다.
상현이 흠칫. 반쯤 멍하던 정신을 차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녀석들은 뒤로 붉은 잔상을 남긴 채, 어느새 지척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빨라."
말하며 상현이 다시 지니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몬스터가 오거나 말거나,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눈앞의 뾰롱이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뾰롱! 뾰롱!"
"우르르릉!"
"뾰롱! 뾰로로롱!"
"우르릉!"
"……."
상현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뾰롱이는 짧은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듯 보였고, 지니는 묵직하게 팔짱을 낀 채 끄덕거리며 듣고 있었다.
분명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수로 의사소통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도 있겠지."
상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곤, 흠칫 굳었다.
"…언제?"
몬스터들이 도착했다. 총 여덟 쌍의 붉은 눈이 상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현이 아닌 곁의 실라페를 보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상현이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손끝에서 거친 나뭇가지의 촉감이 느껴졌다. 여차하면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 안 덤비지?'
녀석들은 그 상태 그대로 멈춰있을 뿐이었다.
피부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붉은 빛은, 마치 그들 무리 주위로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경계하는 건가.'
상현이 추측했다.
녀석들의 지능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니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충분히 위압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뾰로로롱!"
뾰롱이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상현이 시선을 홱 돌렸다.
녀석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건지, 몬스터를 가리키며 격하게 팔랑대기 시작했다.
"뾰롱! 뾰롱! 뾰로롱! 뾰롱!"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가, 주먹질하듯 허공에 휘두르고, 실라페의 우람한 주먹을 당겨 몬스터에게로 향하게 했다.
'저건 나도 알겠는데.'
상현은 피식 웃었다.
쟤네가 때렸으니, 혼내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우르르르릉!"
응답하듯 실라페가 거친 목울음을 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찌이잉-!
마치 레이저 따위를 쏘기 직전에 나는 듯한, 위협적인 소리가 들리고. 상현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온통 붉은 빛이 아래부터 덮쳐왔다.
그리고 실라페가 움직였다.
스슷. 스와아아아악!
"……!"
눈앞의 광경에 상현이 바짝 굳었다.
실라페는 가볍게 팔을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작지 않았다.
바람이 일어나며 벽이 되었다. 위협적으로 덮쳐오던 빛은, 그 벽에 부딪힌 순간 녹아내린 물감처럼 휩쓸리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우르르르릉!"
실라페가 가슴을 잔뜩 부풀리더니 포효했다.
그에 다시금 찌이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상현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여덟 마리 모두의 손끝에 붉은 빛 망울이 맺혀 있었다. 상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여차하면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곧이어 방금의 몇 배는 될 법한 빛의 흐름이 덮쳐왔다.
온 세상이 붉게 바뀌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푸확! 푸확! 푸화아아악!
그에 맞서는 바람의 벽이 생겨났다. 방금보다도 훨씬 두텁고, 거대한 바람이었다.
"우르르릉!"
방금은 실라페가 한 손만을 썼다면, 지금 녀석은 양손을 쩍, 좌우로 벌린 채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굉장한데.'
스르륵. 상현은 나뭇가지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실제로 양쪽의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진 몰랐지만, 일단 지금은 '대등'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뾰롱! 뾰롱! 뾰롱!"
그 뒤에서 뾰롱이가 응원하듯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포효하는 가운데, 검은 요정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오오오오!"
"삐이잇! 삐이이잇!"
"…서로 응원하는 거야?"
상현이 피식 웃었다. 한결 여유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 스스스슷, 실라페 주위로 반투명한 기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어서 녀석이 그대로 몬스터에게 쇄도했다.
상현이 감탄했다.
그 묵직한 덩치를 보고 있자니, 거대한 망치가 허공에서부터 내려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르르릉!"
쾅! 콰쾅! 투콰아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하지만 상현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첫 번째 격돌이었다.
땅이라도 갈라버릴 듯 내려선 실라페가 좌우로 바람을 쏘아내고, 주먹을 휘둘렀다. 녀석의 탄탄한 근육이 요동쳤다.
하지만 몬스터들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첫 공격에 직격당한 녀석은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머지 일곱 마리는 곧바로 물러서 실라페를 둘러쌌다.
그 상태로 잠시간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거기서 상현이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냐.'
넋 놓고 구경할 만한 때가 아니었다.
방심했다가 실라페가 지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끝이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현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쿵! 쿠쿵! 크오오오오!
다시금 격돌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상현은 그쪽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뾰롱! 뾰롱!"
동네 꼬마처럼 응원하는 뾰롱이. 신나서 허공에 손을 내지르는 녀석을 탁, 상현이 붙잡았다.
"뾰롱아."
"뾰롱?"
"저거, 네 아빠야?"
"뾰롱!"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일전에도 물어보았던 질문이었으니. '아빠'가 그 아빠가 아닌, 다른 의미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엄마나, 할아버지는 없어?"
핵심은 이거였다.
만약 저런 전력을 더 쓸 수만 있다면. 저 몬스터를 모두 제압하고, 안전하게 아마존에서 벗어나는 건 문제도 아닐 터였다.
"뾰롱?"
하지만 뾰롱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
상현은 아차 싶었다.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만약 아빠라는 의미가 자기보다 강한, 그리고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라면.
"그럼 혹시, 저런 아빠 더 있어?"
쿠르르릉! 질문하는 순간 거센 격돌음이 들려왔다.
상현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녀석들은 대등하게 맞서는 중이었고, 상현은 다시 요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뾰롱이는 한 손으로 입을 지그시 누른 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금 갸웃거렸다.
"뾰롱……."
잘 모르겠다는 반응. 상현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래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더더욱 확실하게 알아내려면…….
'감응력.'
상현이 생각했다.
한참 전, 나무를 상대할 때의 느낌 탓에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겠다 느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뾰롱이라면 크게 부정적인 여파도 없을 터였고.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상현이 우선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에러 메시지를 확인하긴 했지만, 소개팅 메시지가 온 걸 보면 인터넷은 아직 되는 상황.
"역시."
상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메신저에는 성대원으로부터 벌써 수십 통의 연락이 도착한 상태였다.
그라면 분명 이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보니 고마움이 샘솟았다.
[당장 거기서 떨어져. 그거 몬스터야.]
[새끼 마족이야. 건들면 안 된다. 절대.]
[방송 왜 꺼졌어. 어디야.]
[위치 찍어라. 가고 있다.]
[위치!! 상현아! 위치!]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 건 10분 전이었다.
'그럼 방송으로… 아니야.'
생각하던 상현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 위치를 알리기 위해 방송을 켠다? 그건 수지가 맞지 않았다.
처음 실라페를 본 성대원은 엄청 놀란 듯 보였었고, 그건 다른 길드에서 보더라도 비슷한 반응이 나올 거란 뜻이었으니까.
특히나 상현은 지금 박영찬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장의 카드 하나쯤은 만들어 놔야… 그럼 어떻게?'
상현이 일순간 고민하고, 이내 방법을 찾아냈다.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빛 띄워둘게요! 하늘 확인하세요!]
상현은 한 줄의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움직였다.
우선 핸드폰 밝기를 최대치로 키우고,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다. 그런 다음 하늘 위로 최대한 높게 띄운다.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성대원이라면 분명 볼 수 있을 터였다.
"됐어."
상현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한 셈이었다.
실라페는 여전히 마족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시간은 아직 넉넉한 듯 보였다.
상현이 뾰롱이를 양손으로 잡고,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뾰롱?"
당황한 듯 파닥이는 녀석. 하지만 이내 얌전하게 상현의 행동을 기다렸다. 다만 뭔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릴 뿐.
"후."
가벼운 한숨.
그리고 상현은 눈에 보이는 뾰롱이의 모습에 완전히 집중했다.
비행기에서의 감각. 그리고 나무 몬스터와 완전히 동화되었던 그 감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상현은 점차 나아가고 있었다.
감응력 외의 감각들이 서서히 둔해졌다.
시야도 흐릿해졌고, 쿵쿵대는 시끄러운 소리조차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상현 자신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러니까."
상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뾰롱이의 입장에서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상현의 시선이 돌았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실라페의 모습이 보였다.
실라페는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 같은 존재였다. 언제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지며, 적과 대신 싸워주는.
'이래서 아빠라고 했구나…….'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슷한 느낌이었다.
항상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넉넉한 등을 보이며 언제나 앞서가는 존재.
"그래……."
수긍하며 상현이 의식의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 알아내야 하는 건 실라페의 정체가 아니다. 저렇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다른 정령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상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제로 고개를 돌린 건 아니었다. 그저 정신적으로, 뾰롱이의 주변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없잖아?"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상현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났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었는데.
"뾰롱!"
그때 뾰롱이가 무어라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해도 못 한 채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위를 보라고?"
"뾰롱!"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상현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아."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곳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었다. 단지 거대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실라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강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뿐, 뾰롱이는 거기에 친근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압도적이지만, 같은 편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왜 뾰롱이가 아빠가 있냐 물었을 때, 고민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저 녀석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몬스터들을 모두 때려눕힐 수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후욱."
숨을 내쉬며 상현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흡! 기합을 넣곤, 뾰롱이에게 말했다.
"저거, 아빠로 만들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