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수레는 인형의 벽을 뒤로 하고 달리고 있었다.
상현은 덜컹대는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굳게 붙잡았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마구 날렸다.
"데이트라니……."
방금 전 민찬영과 그런 약속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당히 찝찝했다.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
구릿빛 탄탄한 몸매를 지닌 남자가, 팔짱을 끼고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 상상.
- 귀염둥이?
"으으으!"
딱 거기서 상현이 생각을 멈추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게, 여기서 더 갔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 탓이었다.
[이쁜사랑해랔ㅋㅋㅋ]
[이새끼 상상했네ㅋㅋㅋㅋ]
['축의금' 님이 풍선 333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축의금 미친새끼야ㅋㅋㅋㅋㅋ]
"풍선… 감사합니다……."
상현이 절망적인 얼굴로 멘트를 쳤다.
처음에는 시청자의 기대에 반응하는 쇼맨십이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했다.
아직 여자라고는 만나본 적도 없는 몸인데, 첫 데이트가 남자라니!
그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상현이 얼굴에 카메라를 정확히 맞추고,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성공하면 어차피 민찬영 씨도 이번 시험 합격하는 거 아니에요?"
[당했네ㅋㅋㅋㅋ]
[남자가 약속 어기는거냐???ㅋㅋㅋ]
[데이트 야방 안하면 즐찾삭제함ㅅㄱ]
하지만 시청자들의 민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니, 형님들. 이건 경우가 좀……."
애써 상현이 변명하려던 순간.
"공주님! 우리 공주님을 내놔!"
"우리 공주님 풀어줘!"
사방에서 앳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
즉시 상현이 카메라 방향을 바꾸어 정면을 찍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헛바람을 픽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 이건 또 뭐야?"
사방에서 바글바글하게 기어 나오는 녀석들은, 황금빛 쿠키들이었다.
역시 과자로 만든 듯, 조악한 창까지 든 모습에 기가 찰 지경이었다.
"주완 씨, 일단 멈춰주세요."
"그래야겠죠?"
끼이이익!
이주완이 수레를 세우고.
상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녀석들이 척. 척. 대열을 갖추었다.
'그냥 밀어버릴까?'
상현이 잠깐이지만 고민했다.
방금 전 경로를 막았던 인형들과는 달리, 지금 녀석들은 그대로 달려 나가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만들어둔 거야.'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꼴록꼴록!
지금 상현의 품안에서 베지밀을 마음껏 들이키며 수영하고 있는 무지갯빛 쿠키.
이 녀석도 생긴 것만 봐서는 헌터들을 한 방에 날릴 괴력의 소유자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생각해보면 처음… 파티원 구할 때도 그랬지. 행동이나 분위기로 상대 찾아내는 거였고.'
또한 본시험으로 들어와서는, 방심을 유도하는 생김새. 그에 속지 않는 게 주요 과제였다.
"상현 씨, 어떻게 할까요?"
이주완이 말을 걸어왔다.
"민찬영 씨가 잘 버티고 있으니, 일단 상황 파악 좀 해보죠."
상현이 뒤를 확인하고 말했다.
아직까지도 벽을 뚫고 나온 헌터는 없었다.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때.
척. 척.
대열을 다 갖추었는지, 선두에 서 있던 쿠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에 초콜릿으로 대충 투구 모양을 그려놓은 것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쟤가 대장인가?'
상현이 추측하는데, 곧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당신! 우리 공주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공주?"
상현이 멍하게 되묻곤, 손가락으로 무지갯빛 쿠키를 가리켰다.
"이거?"
"이거라니! 불경하오! 감히 공주님께!"
"……."
아무래도 시험 설정상 지금 상현이 데려온 쿠키가 공주고, 녀석들이 호위병이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나왔던 벽에 이어, 두 번째로 수레의 진로를 막아서는 장애물이었고.
[먼데 저렇게 커엽냐ㅋㅋㅋㅋ]
[아니 ㄹㅇ슈렉에 나오던 그거아님??]
[공주란다ㅋㅋㅋㅋ미친ㅋㅋㅋ]
채팅을 힐끔 확인하고 상현이 툭. 입을 열었다.
"주완 씨. 저거 그냥 돌파… 아, 아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다시 말을 바꾸었다.
혹여나 전투가 벌어졌는데, 녀석들이 상상외로 강하면 어쩔 것인가.
아무리 이주완이라도, 난전 중에 행여나 상현이 수레에서 밀려난다거나 하는 경우까지 다 챙길 수는 없다.
마릿수 자체가 워낙 많았으니 싸우는 건 마지막 방법으로 미뤄 두고, 상현은 일단 말을 걸었다.
"…너희 공주님. 그, 저기 마을로 모셔가는 중인데?"
"마을이라니! 왕궁에 계셔야할 분께 그 무슨 망발이오!"
"아니… 왕궁이 아니라, 그냥 나무 집이던데."
상현이 헛웃음과 함께 말한 순간.
"전구우우운! 전투 준비!"
"하!"
"하!"
모든 쿠키들이 일제히 상현에게 과자 창을 겨누었다.
상현은 헛바람만 연신 내쉬고 있었고, 이주완이 피식 웃으며 상현을 돌아보았다.
"…어이쿠. 상현 씨, 이거 어쩌죠?"
"일단……."
상현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턱 닫았다.
앞에 주르륵 도열한 채 살벌한 기세를 피우는 쿠키들.
자기들 딴엔 나름 진지한 것 같았지만, 생긴 게 있다 보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상현이 쿠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시간 없으니까, 그냥 돌파……."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하!"
선두의 대장 쿠키가 어울리지 않는 기합 소리를 내더니.
쿵! 쿵! 쿵!
발을 강하게 굴렀다.
"……!"
상현이 눈을 부릅떴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
하지만 녀석이 발을 구를 때마다, 수레가 조금씩이나마 흔들리고 있었다.
'미친. 얘네들이 그렇게 세다는 거야?'
경악하며 쿠키를 바라보는데, 이어서 뒤의 쿠키들까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호! 호! 호!"
"호! 호! 호!"
쿵! 쿠쿵! 쿵! 쿠쿵!
수레의 흔들림이 훨씬 격해졌다.
철컹거릴 때마다 상현의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균형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
"윽! 악! 윽! 으극!"
마치 리듬 타듯 상현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이주완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취, 취소! 주완 씨! 싸우면 안 돼요!"
"그렇겠네요."
이주완도 단번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쿵!
마지막으로 대장 쿠키가 강하게 발을 구르고, 쿠키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척!
녀석이 들고 있는 창을 높게 들어올렸다.
끄트머리에 검은색을 발라놓은 게, 흡사 빼빼로처럼 느껴지는 디자인이었다.
"전구우우운!"
척! 척! 척! 척!
그 우렁찬 외침에, 뒤의 쿠키들도 일제히 빼빼로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리고 스르륵 내리더니 상현에게 정확히 겨누었다.
'미친…….'
상현이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까 비웃었던 것과 달리, 막상 전투력을 체감하고 난 뒤라서 엄청난 위기감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대장 쿠키마저 창을 내려 상현을 겨누었다.
그리고.
"돌겨어어……!"
"잠깐! 잠깐만!"
"…어어억!"
하지만 대장 쿠키는 무시하고, 명령을 마무리했다.
두두두두!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쿠키들.
결국 상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베지밀 병을 꺼내 치켜들었다.
"너희 공주님! 공주님이… 어, 그래! 무사하지 못 할 거야! 이대로 떨어트려 버릴 거라고!"
급한 나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 녀석들이 덤벼든다면, 이대로 끝장이다.
시간 끌다가 뒤의 헌터들에게 따라잡혔을 때도 마찬가지.
"깨트린다! 엉! 같이 죽는 거라고!"
결국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단순히 위협에 지나지 않고 상현이 아예 병을 높이 치켜들자.
"이이익! 저, 정지하라! 전군 정지!"
대장 쿠키가 급히 외쳤다.
게다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뒤로 돌아 달려오는 쿠키들을 몸으로 막아냈다.
"저, 정지하라고!"
상현이 벙찐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쿠당탕! 아이코! 아야!
대열이 우르르 무너지며 여기저기서 다양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먹혔잖아?"
[개귀엽다ㅋㅋㅋㅋㅋ]
[아이코! 이지랄ㅋㅋㅋㅋ]
[솔직히 쟤네 맛있게생겼음ㅋㅋ]
흘깃 폰을 바라보자 다양한 종류의 채팅이 올라왔다.
이정도면 멘트를 칠 필요 없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을 터였다.
상현이 다시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도열! 도열! 줄 맞춰!"
대장 쿠키가 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 파티원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회복까지 20분의 시간이 걸립니다.
바로 그때 민찬영이 아웃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금 서두르셔야 되겠는데요?"
"젠장."
이주완이 지적하고 상현이 탄식했다.
이제까지 시간을 벌어준 것만 해도 선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찬영이 뚫렸으니 이제 곧 자신들을 노리는 헌터들이 몰려올 터였다.
'가만. 이거?'
그런데, 궁지에 몰린 탓일까.
문득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쿵! 쿵!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쿠키가 부대정비를 마쳤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바들바들 떨며 상현을 바라보았다.
눈썹 모양이 지그재그로 바뀐 게, 가만히 있음에도 억울함이 잔뜩 느껴지는 얼굴로 상현을 빤히 바라보며 녀석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요!"
"푸흐… 읍."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상현이 간신히 억눌렀다.
"어… 음. 대화로 풀자고. 일단 안전한 곳에 가서 공주님을 풀어줄 테니까."
"안전한 곳?"
"저기 저거 안 보여?"
척!
상현이 쿠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팔을 들어 뒤편을 가리켰다.
자신들을 향해 우글대며 몰려오는 헌터들.
"저건……!"
쿠키의 눈썹이 다시 뒤집히며 치켜 올라갔다.
긴장한 듯한 기색.
상현이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말했다.
"…당신 친구들이오?"
"친구들이라니… 저놈들 지금 뭐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이주완을 쿡쿡 찌르며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호응! 호응하세요!'
피식.
그에 이주완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맞장구를 쳤다.
"이 멍청한 놈들! 저기 저 자식들이야말로 공주님을 노리는 녀석들이라고!"
"……!"
마치 두둥!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쿠키는 정말 충격 받았다는 듯, 잠깐 사이 몇 번씩이나 눈썹 모양을 바꾸었다.
"공주님을?"
"그래! 우리는 위험에 처한 공주님을 구해서 안전한 곳으로 모시려던 중이고!"
우왕좌왕! 우왕좌왕!
쿠키라서 그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녀석들이 반응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하지만 당신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
"뾰롱! 뾰로롱!"
그 순간 갑자기 요정이 상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대장 쿠키에게로 슝! 날았다.
"…당신은?"
당황스럽게 쳐다보는 쿠키를 향해, 요정이 갑자기 몸짓을 섞어가며 무언가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뾰롱! 뾰로로롱! 뾰롱!"
'어? 쟤들하고 말이 통하는 거야?'
상현이 보고 있는 가운데, 대장 쿠키의 눈썹이 아닌, '눈'이 커졌다.
"오오오, 그렇습니까! 요정님 말씀이시라면!"
"뾰롱! 뾰로롱! 뾰롱!"
"아,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뾰롱!"
요정이 이번엔 마치 격려하듯, 쿠키를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 상현에게로 돌아왔다.
"…뾰롱아?"
"뾰롱!"
상현이 멍하니 요정을 부르고, 녀석이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머리를 부벼왔다.
그에 상현이 녀석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자, 잘하긴 했는데……."
"구원자시여!"
그때 대장 쿠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원자?"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부디 저희 공주님을 지켜주소서!"
대장 쿠키가 눈썹을 팔(八)자 모양으로 만들더니, 사극풍으로 대답했다.
"……."
어이없어 입을 벌리고 있자니 이주완이 옆구리를 찌르며 '뭐해요?'라고 입모양만으로 물어왔다.
"좋. 좋아! 그러면!"
'이젠 모르겠다!'
폭소가 터지는 걸 참으며 상현이 버럭! 손발이 오글거릴 고함을 질렀다.
"저기 저 놈들을! 무찔러라!"
"예!"
대장 쿠키가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휙 돌아 다른 녀석들을 척 척 가리켰다.
"2부대!"
"호!"
"3부대!"
"하!"
"가서 녀석들을 혼내주도록!"
"히! 하! 호!"
오오오오!
일순. 수십의 쿠키 창병들이 빼빼로를 들고 헌터들을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