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자, 잡아!"
"저거 아이템이야!"
술렁거리던 사람들이 이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험악하게 외쳤다.
바로 이어서 사냥감을 노리듯 달려드는 헌터들.
타다다닥!
팟! 타다닥!
모두 중간에 있는 상현 일행에겐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옆으로 스쳐갈 뿐이었다.
그 기세에 박민혁이 미친 듯 외쳤다.
"크하하하! 그래! 덤벼! 덤비라고! 다 박살내줄 테니까!"
'…왜? 왜 있지?'
상현은 여전히 멍하게 서있었다.
박민혁이 간 곳은, 이곳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서커스용 천막이었다.
아이템을 찾은 척 연기를 하라고 했던 것인데, 그가 진짜로 베지밀을 얻어낸 상황이었다.
'일단 도와줘야… 아니다.'
상현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박민혁에게 달려드는 헌터들이 너무 많았다.
이주완과 민찬영. 이 둘의 도움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쪽 상황은…….'
상현이 시선을 홱 홱 돌려, 쿠키가 있는 오두막집과 수레 근처 상황을 확인했다.
박민혁에게 대부분의 헌터들이 달려가고, 남아 있는 헌터들은 각각 네 명씩.
다만 두 군데 모두 길잡이가 둘씩 섞인 상태라, 실질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건 전투계열 헌터 두 명씩이 전부였다.
쿠쿵! 끼하하하! 덤비라고! 쿠콰쾅!
때마침 박민혁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음에 상현이 입을 열었다.
"…저의 계, 계획대로군요! 역시! 아이템이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하! 자, 자. 찬영 씨. 주완 씨."
"네."
"응?"
즉각 돌아오는 반응에 상현이 계획을 설명했다.
"저희는 바로 쿠키를 확보합니다. 오두막 주변. 네 사람 있는 거 보이시죠? 저 중에 둘이 길잡이에요. 실질적인 적은 두 사람 뿐이니까,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이거 참…….'
이주완이 상현을 보며 재밌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어그로를 끌어보려 박민혁을 보냈더니, 진짜로 아이템을 찾아낸 상황이다.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감…이 좋은 건가? 아니면 그냥 운인가?'
"바로 가죠, 천천히. 제대로 움직이는 건, 쿠키 반응을 보고 나서."
이주완이 갸웃하는 가운데 상현이 다시 낮게 지시를 내렸다.
저벅. 저벅. 저벅.
파티원들이 미리 약속했던 대로 움직였다.
뒤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계속 힐끔거리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느릿하게.
"잡아! 잡아!"
"야! 걸리적거리지 마! 비켜!"
뒤쪽은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박민혁이 새 베지밀을 높이 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당기고 있는데다, 서로서로 눈치 보며 아이템을 빼앗으려 들었다.
슬금슬금.
자연히 상현이 움직이는 쪽은 돌아볼 정신도 없어 보였다.
쿠키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히! 하! 호! 후아!"
녀석이 경계하듯 몸을 마구 뒤틀었다.
닿지도 않을 거리인데도 마구 주먹과 발을 내질렀다.
'저게 그 정도 파괴력이라니.'
상현은 긴장했다.
그냥 보기엔 우스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저 한방에 날아간 헌터들을 벌써 몇 명이나 보았다.
"조금만 더요."
상현은 눈을 부릅뜬 채 바닥 한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껏 저 괴력의 쿠키가 헌터들을 펑펑 쳐 날리면서도 벗어나지 않았던 영역.
'여기야.'
정확히 바로 그 앞까지.
"…히! 하!"
쿠키는 여전히 난동을 부려대고 있었다.
언뜻 뒤를 돌아봤지만, 헌터들은 여전히 베지밀과 박민혁. 그리고 서로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럼…….'
상현이 조심스레 품에서 베지밀을 꺼내어 쿠키에게 내밀었다.
"히?"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갸웃할 뿐 특별히 반응하진 않았다.
'이. 이게 아닌가?'
분명 아이템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할 때 문득 눈에 들어온 한 줄의 채팅.
[쿠키 베지밀에 찍어먹어도 맛있냐?ㅋㅋㅋ]
"…설마."
진작부터 여러 번 나왔지만 반은, 아니 9할이 장난기 섞인 거라 제쳤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어째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애초에 쿠키니까."
헛바람을 내뱉고.
슬쩍.
상현이 쿠키를 조준해서 촤락! 두유를 살짝 뿌렸다.
동시에.
"호롤롤롤롤로!"
"……!"
쿠키가 격하게 반응하며 몸을 뒤틀었다!
마치 너무 행복하다는 듯!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되, 된 거야?'
상현이 손을 슬쩍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히! 하!"
녀석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너무 조금 뿌렸나? 어쨌든 이거 맞는 것 같지?'
상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번에는 촤라락! 병의 반쯤 되는 분량을 쿠키에게 뿌렸다.
"호롤롤롤롤! 호롤롤롤롤! 호롤롤롤롤!"
쿠키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많이 뿌려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좋아하던 녀석은 어느 순간 휘청. 몸이 기울어지더니, 풀썩하고 땅으로 엎어졌다.
"……."
상현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보았다.
꿀꺽!
긴장감에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얌전히 뻗은 쿠키가 들어왔다.
퐁당!
쿠키를 베지밀 병에 넣고 단단히 뚜껑을 잠그자.
"헉?"
"뭐야 저거! 제압했어?"
뒤통수에서 경악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변을 지키던 네 사람의 헌터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상현을 보고 있었다.
"제압하세요! 지금!"
천금 같은 타이밍.
그들이 반응하기 전에 상현이 한 발 빨리 외쳤다.
파밧! 파바밧!
이주완과 민찬영.
딴청 피듯 슬금슬금 길잡이들 곁에 다가와 있던 두 사람이 즉각 반응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빠아악!
두 개의 타격음이 동시에 겹쳐 들렸다.
전투계열이 아닌 길잡이들은, 기회만 노리던 이주완과 민찬영의 일격에 바로 쓰러졌다. 한 명은 쓰러진 채 왈칵! 피까지 토해냈다.
'어. 어? 저거 너무 세게 친 거 아냐?'
사고다 싶었던 상현은 곧 가슴을 쓸어 내렸다.
슈르륵!
쓰러진 두 사람이 영화처럼 흐릿해지는 모습에 잊었던 게 생각났다.
그랬다. 이건 시험이고 여긴 시험장이다. 저 사람들은 진짜로 다치는 게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짜 요상한 세상이야…….'
사람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끌어 들이고, 다른 사물을 만들고, 일정 이상의 데미지가 들어가면 즉각 원래 세계로 되돌리는 시스템이라니.
새삼 빨리 C급을 넘어서 B급 헌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 제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원칙.
뭔가 대단한 것에 한 발 한 발 가까워진다는 느낌에 이제는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이, 이봐! 이쪽에…!"
타다다닷! 타다다닷!
길잡이가 쓰러지자 남은 두 명의 헌터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이주완과 민찬영이 각각 그들에게 쇄도했다.
채앵!
"크윽!"
그래도 상대 역시 헌터. 그는 이주완의 단검인 앵거바딜을 막아내고 즉각 뒤돌려 차기로 반격했다. 하지만.
휘익!
"헛?"
흡사 유령처럼, 이주완이 뒤에 나타나 그의 뒷목을 후려 갈겼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싸움을 도장에서 배우셨나보네요. 실전에서 그렇게 큰 기술을 맞추긴… 정말 힘들 텐데."
'굉장하잖아?'
상현은 혀를 내둘렀다.
이주완은 진짜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아까의 쇄도는 거의 잔상만 보일 정도였고, 이번에 뒤치기를 들어갈 땐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악! 악! 으아아악!"
문득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에 상현이 놀라 돌아보았다.
다름 아닌 민찬영. 그가 나머지 헌터 하나를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웃흥! 어머나. 이 탄탄한 복근. 갑빠……."
"……."
그런데 그 제압과정이 너무 끔찍했다.
번질번질한 구릿빛 근육의 대머리가, 같은 남자 헌터의 갑옷 틈에 손을 넣고 주물럭거리는 모습.
그리고 그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흐이이익! 하지 마! 만지지 마! 더듬지 말라고!"
"으으으으……."
상현은 보다말고 진저리를 쳤다.
붙잡힌 헌터가 눈물을 좍좍 쏟아내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갔다.
상현 자신 같아도 공포에 떨었을 테니까.
"자기, 튼실하네? 우리 따로 만날까?"
하지만 잔혹하게도 민찬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는 반질반질한 대머리를 들어 발광하는 남자의 귓가에 대고. 후욱! 숨을 불었다.
슈르르륵.
왠지 붙잡힌 남자가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남자가 마지막 힘을 다해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 나 포기할래! 시험관님! 저 시험 포기요!"
후륵!
그리고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어머어머. 아쉬워라."
'명복을 빕니다. 부디.'
상현은 고개만 저었다.
데미지 판정에 정신적인 것도 들어갔다면 진작 끝장이 났을 공격이었다.
'자. 자. 다시 집중!'
일단 주변이 정리되자 상현은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는 길잡이였고 전투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할 건, 다음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를 경우의 수를 분석하는 것!
홱!
'박민혁. 아직 잘 해주고 있고.'
베지밀로 어그로를 끌었던 그는 아직까지 잘 싸워주고 있었다.
천성적인 싸움꾼인 모양이었다.
그를 빨리 합류시키긴 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지금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수레.'
홱!
이동 수단을 확인 한 상현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이템을 확보하기 위해 박민혁 주변으로 몰려간 사람들 외에, 수레 위에 일단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마침 상현 자신을 보고 무엇인가 다음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 쿠키 데려간다!"
앙칼진 목소리.
이전 시험에서 상현을 배신했던 그 약삭빠른 여자였다.
안 그래도 악연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끝장을 보자는 거지?'
"모여! 이쪽으로 모여! 쿠키 데려간다고! 저거 막아! 멍청이들아!"
"제기랄! 주완 씨! 찬영 씨!"
방법이 없었다.
상현은 이를 악물고 즉각 판단을 내렸다.
박민혁에겐 미안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그냥 다 망하는 것뿐!
"수레 확보하세요! 얼른!"
타다닥!
말과 함께 상현이 수레를 향해 달렸다.
쉭! 쉬쉭!
이주완과 민찬영이 즉각 반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앞서 나가는 이주완. 그리고 서너 걸음 앞에서 자신을 호위하듯 쫘악! 팔을 벌리며 울끈불끈한 근육을 드러내는 민찬영.
"자기들! 나랑 놀다 갈래?"
"우웁……!"
일순 휘청했던 상현이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들을 향해 노골적으로 달려드는 헌터들.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제압하세요! 수레 타고 돌파합니다!"
*** '이상한데?'
유혜림은 의문을 가졌다.
처음에 박민혁이 아이템을 들어 보일 때만 해도 그녀 역시 그를 잡으려 달려들었었다.
그러다 슬금슬금, 상현 일행이 쿠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퍼뜩 떠올렸다.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다면?'
그녀는 머피가 추가로 합격시킨 참가자였다.
그녀 역시 나름 길잡이 포지션이었고, 상현만 아니었다면 지난 시험에서 나머지 헌터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았었다.
재수 없게도 막판에 상현에게 엿을 먹고 말았지만.
촤라락! 풀썩!
그리고 그녀의 판단이 맞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라 생각하며 항시 경계대상으로 세웠던 상현이, 무슨 수를 썼는지 저 괴력 쿠키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너 때문에 친구가……!"
"악!"
홰액! 퍼억!
게다가 박민혁.
이미 아이템을 들고 있는 싸움꾼은 집요하게도 자신만 노리고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서 겨우 몸을 피한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내달렸다.
'이대로는 안 돼! 두 번째 아이템이라도!'
어차피 박민혁의 주위는 위험했다.
그녀를 노리는 미친 싸움꾼은 둘째로 치고, 그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었다.
어차피 노리는 아이템은 단 하나.
서로가 견제를 위해 마구 자신의 무기들을 휘둘렀고, 가까이 붙기만 해도 바로 교전이 일어나는 난장판이었다.
유혜림은 신속하게 판단했고, 즉각 그 자리를 이탈했다.
"수레! 수레 확보해요!"
"엉?"
"저기! 저 녀석들이 쿠키를 제압했다고요!"
유혜림의 말에 수레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상현을 향해 홱 돌아갔다.
유혜림이 반드시 보복해주고 말겠다고 결심한 상현을 중심으로 해서 상현의 파티가 촤측 정면에서 달려왔다.
"앞으로 나가 막아요! 시간 끌어요! 사람들 더 모여야 돼!"
그리고 우측에서는 유혜림을 향해 다른 헌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레 하나를 두고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유혜림은 앞서 나간 자신의 파티의 헌터들 중 두어 명이 앵거바딜을 든 이주완에게 당해 퍽 퍽 나뒹구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이게 다가 아니야! 절대!'
머피의 성향은 모르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그간 B급에 합격한 헌터들에게 아양을 떨며 바지런하게 모은 정보로는 그랬다.
시험이 다 끝났다고,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관문이 하나 더 있더라고.
'B급 마지막 시험이 이정도로 끝날 리가 없어! 기회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