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왜……."
상현이 눈을 부릅뜨고 지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5층에 있던 사람의 상태가 '전투 중'으로 바뀌더니, 곧 몇 번인가 점멸하곤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남은 점은 일곱 개 뿐이었다.
불합격, 혹은 조기합격.
두 가지가 전부겠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머냐ㅋㅋㅋㅋ건물 못올라온다며ㅋㅋㅋㅋ]
[너도 잡히는거아니냐ㅋㅋㅋ]
하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뾰롱!"
요정이 힘내라는 듯 상현을 툭툭 쳤다.
'분위기가 이상해.'
요정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고층에 있던 사람이 당한 것도 이상했다.
'처음 두 사람은, 1층이었으니까 그렇다 치는데…….'
잠시 멍하니 생각하던 상현이,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손을 맞부딪혔다.
"공중 몬스터!"
이제야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형님들, 하피 같은 놈들 있잖습니까? 그런 거에 걸린 것 같은데요?"
고층 건물 중, 벽면이 유리로 된 종류.
그런 곳이었다면 공중 몬스터에게 걸렸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렇게 납득하고, 상현이 현재 자신이 위치한 방을 살폈다.
좁은 창문 몇 개뿐이었고, 잠긴 문 앞에는 책상 따위를 쌓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했다.
이론상으로 봤을 땐, 절대로 안전한 공간.
하지만 무언가를 빠트린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뭔가 놓치고 있어. 이건 무조건… 뭔가 있긴 한데.'
이유 모를 불안감.
하지만 무작정, 아무런 계획 없이 이곳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게 몇 배는 위험할 테니까.
지금 해야 할 건 세 가지였다.
이미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는 것. 그리고 12시간 동안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한, 도주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단 최대한 준비를 해서… 버텨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혼 없는 멘트.
상현은 건성으로 방송을 진행하며 머리를 굴렸다.
'몬스터가 나오는 구역은 총 네 개. 아까 몰려있던 놈들이 대충 20마리 정도였으니까… 비슷하다면 대략 80에서 90마리. 그리고 위험구역 선정. 이게 핵심이겠어. 그리고……. 잠깐.'
상현이 멈칫했다.
'만약 둘러싸인 구역 전부가 위험구역이면? 그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는데. 무작위 선정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잖아.'
새로 추가된 룰 하나 때문에, 문제가 훨씬 복잡하게 바뀌었다.
이젠 한군데서 머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여차하면 두 개의 구역을, 30분 안에 빠져나가야 할 수도 있었다.
거리상으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중간에 몬스터를 만난다면.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벌떡.
상현이 몸을 일으켜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그때.
지도 위의 점들이 거의 동시에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길잡이들도 문제점을 알아챈 것 같았다.
'보물 상자와 전화기. 염두에 둬야 돼. 그럼 먼저 해야 할 건…….'
각 구역. 경찰서에 배치된 붉은 전화기를 작동시키는 것과, 곳곳에 놓인 상자를 최대한 많이 여는 것.
랜덤 효과라고 했으니, 가급적이면 많이 얻어두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안전한 구역이 많은 지금.
'나가야 한다.'
구역이 하나씩 폐쇄될 때마다, 열 수 있는 상자가 줄어드는 셈이었으니까.
상현이 결정을 내리고 요정을 돌아보았다.
"뾰롱아, 여기 밖에 몬스터들 있는지 좀 봐줄래?"
창문을 열어주며 상현이 말했다.
"뾰롱!"
신난 듯 빠져나가는 요정을 확인하고, 카메라를 돌려 얼굴을 비추었다.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상현이 말했다.
"형님들, 일단 밖으로 나가보겠습니다. 분위기 보니까 그냥 이렇게 있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나오는 몬스터는 80마리 이상. 한 시간 반 단위로 위험구역이 설정되고, 구역은 여덟 개. 시간이 12시간이니까… 어?"
상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에서부터 근질근질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요정이 사라진 걸 알아챘던, 그 때의 느낌과 같았다.
그리고 그때 올라온 채팅 한 줄.
[그럼 마지막구역 남았을 땐 전부 위험구역 아니냐??]
"……!"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상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작하자마자 구역 하나가 폐쇄되었고, 한 시간 반마다 위험 구역이 늘어난다.
그 말은 점차 시간이 지나고, 종료까지 한 시간 반이 남았을 때.
그때 남은 마지막 구역은, 위험구역으로 선정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마지막 시간은… 도망만 다녀야 된다는 거잖아!'
생각과 동시에 빠르게 멘트를 쏟아냈다.
"형님들, 이거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는데요? 괜히 B급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얼른 효과를 얻어야… 우선 전화기부터! 그래, 전화기를……."
거의 횡설수설하다시피 하며 상현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손을 움직이며 요정을 기다리던 순간.
"으르르릉."
"카츠측. 크락."
꽤 가까운 거리에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상현의 몸이 굳었다.
정확히 지금 있는 건물의 가장 아래층.
그곳에 몬스터들이 들어온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쾅! 콰쾅! 쩌저적!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뒤따랐다.
"문을… 부쉈어?"
상현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래 하급 몬스터들은, 시야 밖의 사냥감을 쫓지 않는다.
후각으로 쫓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직접적인 감각의 범위 안에 들어와야만 사냥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녀석들은, 건물 안에 사냥감이 있다고 '예상'하고, 문을 뚫고 있는 것이었다.
"으르르릉!"
다시 목울림이 들리고, 쿵쾅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문짝이 바로 떨어져 나간 듯 충격음이 들려왔다.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녀석들은 이 건물 안을 '수색'하고 있었다.
"미친."
상현이 짧게 내뱉고, 바로 주위를 확인했다.
상현이 지금 위치한 곳은 5층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사무실에 흔히 있는 얄팍한 나무 책상과, 청소도구 따위를 담아놓는 도구함.
냉장고와 푹신해 보이는 침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몸을 숨겨야 했다.
그게 가능한 장소는, 침대 밑, 도구함 안쪽. 그리고… 책상 아래.
하지만 그런다고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은 문만 부수고 바로 다음 층으로 올라왔다.
지능이 높아졌다곤 해도, 결국 그 정도.
그렇다면, 숨으면 괜찮다!
"뾰로롱!"
마침 결정을 내리자 요정이 뾰롱대며 돌아왔다.
"쉿! 쉬시싯! 쉬이이잇!"
상현이 검지를 입에 대고 황급히 바람소리를 냈다.
요정이 갸웃하며 팔랑대다가, 이내 상현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곧바로 상현이 침대 아래로 몸을 우겨넣었다.
"쿨럭!"
먼지가 피어올라 상현이 크게 기침을 했다.
[미친ㅋㅋㅋ살떨리네ㅋㅋㅋ]
[진자 못찾는거맞냐??ㅋㅋㅋㅋ]
[살겠다는 의지보소ㅋㅋㅋㅋ]
유쾌한 채팅이 우르르 올라왔다.
이건 시험이었고, 결국 실제로 다치진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접 이 상황을 마주한 상현은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후우우."
긴장된 호흡만 내뱉던 가운데.
몬스터들이 바로 아래층까지 올라온 게 들렸다.
쿠쿵! 쩌저적!
문을 부수는 소리.
'이제 올라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취에에엑! 취이익!"
"크르르릉!"
오히려 거칠어진 몬스터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뒤이어.
콰드득! 쿠쾅! 쿠콰쾅!
마구 뒤엎는 듯한 소리가 따랐다.
"……!"
상현이 눈을 크게 떴다.
척 들어도, 아랫방에 놓인 물건들을 이잡듯 뒤지는 소리였다.
"어, 형님들?"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좆 됐는데요?"
저렇게 녀석들이 내부를 뒤진다면, 이곳에 숨어있는 건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셈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묘한 타이밍에 상현이 발끈했다.
하지만 의문을 풀어낼 시간 따윈 없었다.
지금 당장.
이 방을 벗어나야 했다.
후다다닥.
상현이 빠르게 침대 밑에서 빠져나와, 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몬스터들의 흉성이 잠잠해지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쓰읍!"
짧게 기합을 넣고, 상현이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철컥! 쿵!
거칠게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소리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몬스터들마저 굳어버린 건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그대로 계단을 오르려던 상현이 슬쩍 발을 움직였다.
이어서 계단의 손잡이 사이, 그 틈으로 아래층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엔.
샛노란.
마치 뱀의 눈동자와 비슷한 것이.
상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상현이 말하고.
눈을 마주친 녀석이, 혀를 쭉 내밀었다.
그 꼴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여, 온몸에 소름이 좌악 돋았다.
"흐, 흐아아아아!"
상현은 비명을 내지르며, 미친 듯 계단을 뛰어올랐다.
쿠쿵. 쿠쿵. 쿠쿵.
"크라라라락!"
바로 따라붙는 녀석들.
[강제 런닝맨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추격전 개꿀잼이고~ㅋㅋㅋㅋㅋ]
갑작스레 벌어진 레이스.
녀석들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반 층 만큼의 계단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곤, 녀석들의 다리 구조가 계단을 오르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상현은 이를 까득 갈아대며 속도를 올렸다.
그 상태로 몇 칸의 계단을 오르자, 마침내 회색빛 철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옥상!'
그대로 들이받듯 상현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절컥.
손잡이가 절반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잠겼잖아!"
상현의 비명.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방송천재ㅋ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폭소.
쿠쿵. 쿠쿵. 쿠쿵.
뒤를 따르는 몬스터들의 발걸음.
세 가지 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마구 시선을 돌리던 그때.
상현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몬스터들과의 거리는 이미 절반 가까이 좁혀진 상태.
빛의 시작점은, 옆에 놓인 화분 아래였다.
쿵! 와르르르.
상현이 엎다시피 화분을 뒤집자 빛의 정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쇠!"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물음표로 막혀 있던 문장 하나가 드러났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이 시험장의 모든 문은, 근처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라이!"
격하게 외치며 상현이 바로 몸을 돌려, 손잡이에 열쇠를 쑤셔 넣었다.
이어서 철컥!
문이 열렸다.
그대로 몸을 문으로 밀어 넣고.
"크라라라라!"
몬스터들의 울음을 뒤로 한 다음.
철컥!
문을 닫고, 급히 잠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 문으로 벌어낼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
그 안에 다른 해결법을 찾아야 했다.
상현의 시선이 빠르게 옥상을 훑었다.
'오크랑, 놀 정도. 가장 강한 녀석은 오크 전사. 지능이 높진 않아. 뭘 뒤집어쓰고 숨기만 해도… 정 안 되면 싸우는 것도 염두에 둬야… 망할.'
생각하던 상현이 인상을 구겼다.
쓸 만한 게,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크르르릉!"
"크카칵! 카루루루!'
그때 몬스터들이 도착했는지, 울음소리가 문 바로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쿠쿵! 쿠쿵!
문이 움푹움푹 파이며 녀석들이 내려친 자국이 남았다.
차근차근 부서지는 문.
상현이 미간을 좁힌 채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상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높아! 저거라면…….'
옥상 문이 위치한 벽면.
아니, 벽면이 아니었다.
흔히 물탱크 따위를 올려놓는, 마치 옥탑과 비슷한 공간.
그곳에 달린 녹슨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었다.
녀석들이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무게를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설령 사다리를 타는데 성공하더라도.
'한 놈씩 걷어차면 그만이지!'
탓.
상현이 발을 거세게 박찼다.
그 반동으로, 문 바로 옆의 사다리에 매달렸다.
쿠쿵! 쿠쿵! 쿠쿵!
문을 두드리던 묵직한 충격음에.
쩌저적! 철컹!
마침내 얄팍한 철문이 떨어지고, 몬스터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크르르릉."
"취륵. 취이익!"
으르렁대는 녀석들.
하지만 상현은 이미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간 이후였다.
몬스터들이 잔뜩 당황한 게 상현의 눈에 들어왔다.
몸을 잔뜩 낮춘 채, 상현이 눈만 찔끔 내밀어 녀석들을 지켜보았다.
[ㅋㅋㅋㄹㅇ미션임파서블찍네]
[오늘 레전드각이다ㅋㅋㅋㅋㅋㅋ]
행여나 숨소리가 새어나올까 상현이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온몸이 저릿저릿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녀석들이 이대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하급 몬스터의 지능이란 그 정도여야 하니까.
하지만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상현의 예상은 완벽히 무너졌다.
"카르르륵."
녀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상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목울음을 흘리더니, 너나할 것 없이 사다리로 달려들었다.
상현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대체 왜 아는 거야! 무슨 몬스터가!"
어이가 없는 나머지 상현이 소리를 내질렀다.
이렇게 몬스터의 지능을 올릴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지능이 높은 녀석들을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은가.
쿠쿵! 쩌저적!
그나마 상현의 예상대로, 녀석들이 손을 댄 순간 떨어져 내리는 사다리.
"크르르릉!"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분노를 토해내는 녀석들의 모습에, 상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혀, 형님들. 일단은 살았습니다. 네, 일단은 살았구요. 이제 방법을 천천히……."
그리고 그때.
"끼야아아아아!"
"끼이익! 끼이이이!"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에, 상현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상현이 아는 소리였다.
하피 특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멀찍이 모습을 드러낸 하피들을 노려보며 상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