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흠, 흐흐흠, 흐흐흠."
성대원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커다란 배낭에 물건을 하나하나 채워 넣는 모습.
마치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곧 성대원은 도시락 통까지 챙겨 넣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김희원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길드장님."
"왜?"
"그건 뭡니까? 방금 챙기신 거."
"아, 이거? 스페셜 김밥이지! 참치랑 돈가스가 같이 들어갔다고. 하나 먹어볼래?"
"아니……."
해맑은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시계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아직 한참 남았잖습니까.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닙니까?"
"겨우 열두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
"게다가 가는데 엄청 오래 걸리잖아. 게다가 거기까지 가는 시간 감안하면 이 정도는……."
김희원이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현 길드원, 아이템 골라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러네."
성대원이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김희원이 말했다.
"꼭 가셔야겠습니까? 굳이 길드장님이 안 가셔도 대신할 사람은 있지 않습니까."
"음……."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안 돼."
단호한 태도였다.
금방이라도 반박하려던 김희원이,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대원이 저런 행동을 할 때엔, 그녀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연옥이 움직이는 것 같다며? 너무 위험해. 그리고 그 위험에 대처하려면, 적어도 길드장 정도의 권한은 있어야 돼. 바로 움직여야 하니까. 다른 놈들론 힘들어. 선 조치 후 보고. 그게 안 된다고."
"권한을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그런다고 걔네들이 자기 맘대로 할 거 같아?"
성대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에 김희원이 입을 닫았다.
호롱 길드원들은 모두 성대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권한'을 준다고 해도, 압박감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긴 힘들 터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성대원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걔네들이 실수했다고 치자. 당연히 결과가 좋지 않겠지. 그럼 책임은? 그건 내가 지면 돼. 상관없어. 난 길드장이니까… 당연한 거지. 하지만."
김희원은 그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고, 뒤에 이어질 내용도 얼추 짐작이 갔다.
"실수한 녀석들. 걔네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 때문에, 나한테 피해를 줬다고.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럼 사기가 저하될 거 아냐. 책임은 책임대로 지고, 길드 전력도 깎아먹고. 완전 손해잖아?"
"……."
나름 그럴듯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그래도 위험할 수 있다는 정도이지 않습니까. 가능성이 너무 낮……."
"아니."
성대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럴 확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그리곤 씩 웃어보였다.
"내 길드원이잖아?"
***
"후아아!"
상현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던전 공략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이 드디어 끝난 것이었다.
박도진을 설득하겠답시고 팔렘 신전을 돌았고, 그리고 직후엔 바로 옆에서 던전이 터졌다.
덕분에 애초에 계획했던 월광 소나타 공략이 한참이나 늦어졌다.
너저분하게 널린 자료들을 보니 지난 며칠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어쨌든. 드디어 가는구나… 끄으으."
상현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중얼거렸다.
계속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너무 뻐근했다.
그리고 요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뾰롱아."
하지만 요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삼일 전 처음 공략을 시작할 때.
요정은 상현 주변에서 계속 팔랑대고 있었다.
놀아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너무 바빴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보니, 언제부턴가 요정은 바로 옆에 내려앉아 짤막한 팔로 문서들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나 따라하는 건가?'
그 모습에 상현이 한 생각이었다.
상현이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요정도 종이를 넘기며 정보를 읽는 척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스르륵.
종이를 한 장 넘기는 요정.
"하, 참."
상현이 피식 웃으며 요정에게 다가섰다.
"가야지, 뾰롱아?"
"……!"
그제야 요정이 놀랐다는 듯 파르르 떨더니, 상현에게로 쪼르르 날아왔다.
곧 요정이 잠시 팔랑거리더니, 항아리 안으로 쏙 들어갔다.
"좋아. 그럼 이제… 가볼까?"
상현이 활기찬 분위기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꼭 성대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겠다고 다짐하며.
*** 길드 사옥은 꽤 가까운 편이었다.
상현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안내 직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최근 들어 자주 온 탓인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길드장실로 향하는 상현.
이제는 오히려 익숙함마저 느껴지는 복도였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자, 예의 유쾌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 들어와!"
상현이 길드장실로 들어섰다.
성대원은 무언가에 열중하는 듯 분주한 분위기였다.
"저 왔습니다."
그가 상현을 돌아보더니,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어, 일찍 왔네? 일단 아이템부터 빨리……."
그리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이번엔 상현도 말려들지 않았다.
"길드장님."
"왜?"
그리고 그때 김희원이 눈가가 움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가 무표정하게 돌아왔지만, 상현은 놓치지 않았다.
'짐작이 맞은 것 같은데…….'
생각과 동시에 상현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거?"
순순히 응해오는 성대원.
상현이 천천히, 며칠간 묵혀 놓았던 질문들을 건네었다.
"일단 게이트가 뭔지. 그리고 협회 소속이라던 헌터들……."
"안 돼."
하지만 성대원은 즉각 끊어 버렸다.
"예?"
"지금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 B급 자격 얻으면, 그때 말해주지."
상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얼마나 대단한 정보기에 저렇게 숨기는 건지.
그 표정을 읽었는지 성대원이 말했다.
"궁금한 건 알겠는데,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다. 아, 이건 말해주지. 걔네들. 그 무슨 군복 같은 거 입고 다니는 애들 말하는 거 맞지?"
"네."
"어, 특수 무력 부대. 협회 소속 헌터 집단이다. 대충 줄여서 '특무부'라고 부르는 놈들이지."
"특무부……."
상현이 웅얼거렸다.
수박 겉핥기식의 정보뿐이었지만, 그나마 궁금증 하나는 해결된 셈이었다.
그리고 성대원이 틈을 주지 않고 들어왔다.
"B급 되면 나머지도 알려줄 테니까, 일단 앉아. 걔네가 무슨 일 하는지, 그리고… 어, 그래. 게이트나 뭐 그런 것들도 깡그리 설명해주지. 너 방송 공지도 띄웠잖아? 시간 지켜야지."
그냥 숨기는 거면 모를까, 저렇게 조건을 걸어버리면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결국 상현이 포기하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그럼 아이템이나 골라보자고. 100포인트면, 어, 아마 A급 아이템도 구할 수 있을 걸? 이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 알아? 대여료만 해도 일주일에 2천은 나가는 물건들이라고."
"2, 2천이요? 일주일에?"
상현이 입을 쩍 벌렸다.
일주일 대여료가 2천만 원이라면, 연간 10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곧 상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그런 거면, 다른 길드에서 뺏으려고 한다거나……."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은, 화를 부른다.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상현은, 그 정도 상식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성대원은 조금도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호, 똑똑한데?"
놀랍다는 듯 말하더니, 그가 상현에게 설명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협회에서 아이템을 구매하는 순간, 그 아이템은 너한테 귀속되거든. 결국 본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도 없어. 뭐, 길드에서 구매하는 건, 길드원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야. 네가 소유권을 넘기지 않는 이상, 상관없어."
하지만 상현은 표정을 펴지 않았다.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넘기라고 협박한다거나……."
"그것도 힘들어."
성대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템 거래는 협회에서 주관하거든. 걔네들이 먼저 보는 게, 거래 전에 불합리한 요인들이 있었는지 그거라서. 만약 그랬다고 하면, 더 이상 헌터 생활 못 해. 아이템 못 가져가는 건 당연한 거고.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 협회 정보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놈들은 없어. 뭐, 가끔 미친놈들이 있긴 하지만."
"와……."
상현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생각보다 몹시 치밀한 구조였다.
성대원의 말대로,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금세 여유롭게 돌아온 상현의 표정.
하지만 그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1년 대여료가 10억이라는 건.'
팔아 넘겼을 땐, 그 몇 십 배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집 한 채 사는 것 정도는 우스운 일일 터였다.
상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그럼 만약에 그걸 팔면요……."
"푸하핫!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예상했는지 웃음을 터트리는 성대원.
"구매 후 30년이 지나거나, 당사자가 죽기 전까진 아이템 거래 안 된다. 아이템 하나 팔고, 헌터 생활 접으면. 협회는 헌터 인력을 잃는 건데? 걔네가 설마 그 정도 생각을 안 했을까봐?"
"아, 어, 그렇죠. 아하하."
상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잡생각은 이제 접어두시고, 아이템이나 골라보자고. 괜찮은 놈으로 골라야 하지 않겠어?"
"넵."
상현이 얌전히 자세를 잡았다.
곧 성대원이 어제처럼 노트북과, 자료들을 주르륵 펼쳤다.
"일단 먼저 선택해 봐. 낮은 등급 여러 개 할래, 아니면 A급 하나 할래?"
"으음."
상현이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러 아이템이 생기면, 초기의 방송 컨셉이 흐트러진다.
게다가 어차피 시청자들의 눈에는 B급이건, A급이건 신기하게만 보일 터였다.
그냥 아이템 하나 장만했다는 식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A급 하나로 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자, 그럼. 골라보라고."
성대원이 노트북에 카테고리를 띄워주었다.
수많은 아이템들이 좌악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화려한 외형을 지닌 아이템들.
불을 뿜어내는 마법검, 드래곤의 비늘조차 뚫어낸다는 단검. 주문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지팡이.
"와……. 호오, 이건 또……."
끊임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상현은 머뭇거리지 않고 쭉쭉 페이지를 넘겨버렸다.
그저 궁금해서 한 번씩 확인했을 뿐이었다.
'전투형 아이템은 낭비야. 어차피 나는 제대로 쓰지도 못할 테니까. 게다가 방송에 써먹을 수 있는 것들도 아니고…….'
상현이 주르륵 스크롤을 내렸다.
성대원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런 상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템을 고를지 기대된다는 눈빛.
처음 상현은 그가 어떤 조언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성대원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후우우."
상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 수 없다곤 하지만, 어쨌든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들.
그중 하나를 고르려니 손이 떨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옆의 목록엔 상현이 체크한 아이템 후보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투명화라… 나쁘진 않은데, 좀 걸려. 핸드폰을 들고 있어야 하니까. 보이지 않는 손? 이건 괜찮겠는데?'
상현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투명한 손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여기 핸드폰을 쥐어 놓는다면, 방송할 때 다양한 구도를 연출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쇠 같은 걸 들고 오는데 쓸 수도 있고……. 일단 나머지도 봐야겠어. 더 괜찮은 게 있을 지도 모르니까.'
처음으로 쓸 만한 걸 찾았다는 생각에, 상현이 들뜬 채 스크롤을 쭉쭉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하던 상현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질적인 도움도 되고, 시청자들의 호기심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이었다.
상현이 노트북을 돌려, 성대원에게 선택한 아이템을 보여주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