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상현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항아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뾰롱… 뾰롱뾰롱."
참가자 휴게실로 제공된 1인실 천막은 마치 매직미러처럼, 밖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한숨 자고났더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어제 감독관이 나눠준 종이엔 '해가 뜰 때 시작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슬슬 부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 순간.
"모두 집합!"
역시나 감독관의 목소리가 시험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가자, 뾰롱아."
상현은 허리춤에 항아리를 낀 채 천막 밖으로 나왔다.
집결지로 향하려는데 바로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예, 예. 저도 고르고 싶어서 고른 게 아닙니다아.'
상현은 대충 듣고 넘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기해하거나,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템의 효과를 듣자마자 킥킥거리며 비웃을 뿐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파티원이 누가 되냐는 건데.'
시험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 진 몰랐지만, 어쨌든 혼자 하는 게 아닌 만큼 중요한 건 팀원이었다.
곧 집결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 의자로 가득했던 공간이 마치 광장처럼 넓고, 깔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저 양반은 어제랑 어째 바뀐 게 없냐.'
여전히 타이트한 군복 차림의 감독관, 강진이 단상 위에 서서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잡이만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이 선… 넘지 마라."
웅웅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강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파가가가각!
동시에 돌가루를 마구 튀기며, 레이저로 긁은 듯한 선이 바닥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굳은 듯 멈췄다.
'A급 헌터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아이템?'
상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길잡이들이 앞으로 나가 섰다.
그사이엔 어제 봤던 '아가씨'의 모습도 있었다.
'쟤도 길잡이야? 그래서 그런 아이템을 골랐…….'
"김상현! 너는 왜 안 나왓!"
"으븝! 가, 갑니다!"
상현이 엉덩이를 걷어차인 듯 급히 달려 나갔다.
예상대로 상현의 포지션 역시 길잡이였다.
'어제 좀 말을 해주던가! 그럼 파티라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상현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다른 길잡이들의 정보엔 '비전투'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전투 관련 능력치가 골고루 달려 있었다.
애초에 그쪽 계열을 생각하고 왔는데, 길잡이에 배정받은 경우가 많았던 탓이었다.
파티원의 숫자가 제한된 상태에서 상현이 그들과 놓인다면, 쳐내지는 건 결국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상현이었다.
'에라이! 그냥 아무나 오셔요, 아무나.'
앞에 나와서 전투계열 헌터들의 시선을 받으니 마치 경매 물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주완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진짜, 내가 꼭…….'
상현이 이를 빠득 갈고, 곧 강진이 다시 진행하기 시작했다.
"룰은 어제 말했던 대로. 전투계열 놈들이 먼저 길잡이 앞에 서고, 길잡이는 그중에서 고르면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놈들은 무작위로 짝을 맞춰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럼, 움직여."
타다다닥.
곧 예상했던 그림이 펼쳐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정해진 자리를 찾아가듯 일사불란하게 길잡이 앞에 모여들고, 소수의 몇 명만이 어설프게 눈치를 보며 어정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현도 혹시나 누구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 상현 씨, 기다리셨죠? 제가 쌩쌩한 팀원들로 모아왔습니다!"
상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완이 여전히 밝게 웃으며, 처음 보는 남자 두 명을 데리고 다가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팬? 시청자라고?'
상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손을 맞잡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상현이 의문을 가득 담아 주완을 바라보았다.
곧 주완이 활짝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제 열심히 돌아다녔거든요. 상현 씨도 모시고 다니고 싶었는데, 도저히 어디 계신지 못 찾겠더라고요. 그래도 마침 상현 씨 방송을 아시는 분들이 계셔서 데리고 왔습니다!"
"…사라진 건 주완 씨 아니었어요?"
상현이 얼빵하게 되물었다.
분명 어제 강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홱 사라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주완은 대답 대신 남자들을 돌아보며 웅변하듯 외치기 시작했다.
"자, 자 여러분! 이분이 누구십니까! 사실상 C급 헌터나 마찬가지인 김상현 씨 아닙니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이 파티에 들어오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뭐다?"
"시험 합격자입니다!"
"C급 헌터 합격자입니다!"
두 사람이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상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반응엔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주완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앞으로 자기소개를 할 땐 어떻게 한다?"
"C급 헌터 김영근입니다!"
"C급 헌터 신호용입니다!"
"그렇죠!"
'이런 망할…….'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주완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두 남자는 상현을 향해 무한한 존경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상현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지로 머리를 굴렸다.
'싫든 좋든 이 사람들이랑 파티는 짜야 돼. 어차피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스펙들이 어떻게 되는지부터 좀 보고…….'
미간을 모으며 상현이 주머니에서 안내서를 꺼내들었다.
기대감을 살짝 품은 채, 상현은 신호용, 김영근이라 적힌 부분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어야 했다.
'찌꺼기잖아…….'
신호용은 전사계열 중 방어력을 제외하면 모든 능력치가 최하위였다.
김영근도 마찬가지로 전사계열이었지만 속도 빼곤 잘난 게 없는 그런 남자였다.
'아무리 봐도 찌꺼기 1, 2잖아.'
상현이 복잡한 얼굴로 주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주완은 계속해서 다른 두 사람에게 바람을 팍팍 불어넣고 있었다.
"두 분은 숨을 쉴 수 있습니까?"
"넵!"
"그렇습니다!"
"그럼 합격입니다!"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으며 주완이 다시 한 번 외쳤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습니까!"
"걸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럼 합격입니다!"
"와아아아아!"
상현이 이마를 턱 짚었다. 골이 지끈거렸다.
'너는 정말, 진짜로 내가 무조건 블랙 먹인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시험에서 상현의 포지션이 길잡이라는 걸 감안하면,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상현의 말을 잘 듣기만 한다면, 파티의 단합 하나만큼은 확보가 되는 거였으니까.
그때 감독관, 강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아, 거의 다 된 것 같군. 아직까지 못 짠 놈들은 내가 알아서 배치한다."
쿵! 쿵! 쿵! 쿵!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바닥에서 솟아난 벽이 머리 높이까지 올라와 각 파티별로 경계를 그었다.
"난 이런 새끼들이랑 파티 못합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쇼! 이건 아닙니다!"
곧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진의 판단을 바꾸기엔 턱도 없었다.
"시험 포기하던가. 제한시간 내에 팀 못 짰다고 탈락시켜줄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
"그래, 조용하니까 좋잖아. 그럼 본시험으로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인 룰을 알려주마."
강진의 위압감에 다들 소리를 죽였다.
상현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태에서, 저것조차도 없이 간다면 무조건 실패할 게 분명했다.
"첫째. 절대로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혀선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즉시 실격이고, 앞으로 어떤 헌터길드에도 들기 힘들 거다. 내가 보장하지. 그 뿐만 아니라, 개인 간의 사고로 경찰에 넘길 거다. 시험장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사람 팬 거랑 같다는 뜻이야. 둘째. 지금 길잡이한테 이걸 줄 건데……."
팟.
상현의 눈앞이 번쩍이더니 무언가 나타났다.
주먹만 한 금색 공이 허공에 덩그러니 떠있었다.
"……."
"이게 뭘까요?"
찌꺼기1. 신호용이란 남자가 얼빵하게 물어왔다.
상현은 가볍게 무시하며 공을 손에 쥐었다.
얼추 사과 하나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 공을 시험이 끝났을 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냈어도 무조건 실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진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삼일 간 몬스터에게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으면 된다. 물론 실체가 없는 녀석들이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유효타를 허용하는 순간 바로 이쪽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 유의하도록. 그리고…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강진이 생각에 빠진 사이 상현은 재빨리 정보를 조합하기 시작했다.
시험의 중심 주제는 고립된 상황에서의 '생존'인 것 같았다.
공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나, 삼 일간 지속된다는 점을 봤을 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거기까지였다.
곧 강진이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맞아. 이거 챙겨가야지."
파파파팟.
빛이 네 번 반짝이며 각자의 앞에 핸드폰이 나타났다.
처음 들어올 때 맡겨놨던 것들이었다.
서둘러 주머니에 쑤셔 넣고,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강진이 말했다.
"자, 시작하지. 자세한 건 직접 겪으면서 알아보도록!"
사아악!
강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 환경이 완벽히 바뀌었다.
상현의 파티는 울창한 숲 가운데서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밖에 없었다.
"사, 상현 씨. 이게 어떤 시험인가요?"
호용이 움츠러든 얼굴로 물었다.
동시에 찌꺼기 2, 영근의 시선도 상현을 향했다.
그제야 상현이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 세 명은 모두 상현의 시청자였다.
이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 이거요? 원래 이렇습니다. 이제 시작인데… 잠깐만요."
주완은 어쩌고 있나 보니, 재밌다는 듯 실실 웃으며 나무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쟤는 대체 왜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야?'
인상을 구긴 상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파티가 처한 상황부터 정확히 아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우리 전력이… 전사계열 찌꺼기 둘에, 이상한 놈 하나랑 나. 안 좋아. 그럼 시험 내용은? 아무래도 예상한 게 맞아떨어진 것 같고.'
스스슥. 스슥.
바닥에 몇 가지 그림들이 그려졌다.
규칙이랍시고 강진이 말해준 사실들과, 현 상황을 조합해보니 대충 사이즈가 나오는 것 같았다.
"저, 상현 씨."
불안감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정쩡하게 서있는 영근의 모습이 보였다.
"예?"
"저… 표정이 너무 어두워보여서요."
"아, 아닙니다. 작전 구상 중이었어요. 일단 이쪽으로 좀 모여 보실래요?"
말이 떨어지자 주완도 슥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현이 설명을 시작했다.
"대충이나마 시험에 대해서 설명을 좀 드릴게요. 기본적으론 생존이에요. 던전에서 고립됐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아까 감독관이 몬스터한테 치명상을 입으면, 실격이라고 했잖아요? 즉, 멀쩡하게 삼일 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상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공. 정확이 어떤 아이템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몬스터들이 이 공을 노릴 거라는 거죠. 결국 그놈들에게서 지켜야 한다는 소린데, 여기서 알아두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어요."
꿀꺽.
상현이 침을 삼키는 소리에 사람들이 잔뜩 긴장했다.
"감독관이 말한 두 가지 전제조건. '끝났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혀선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다른 파티의 공을 뺏어서 가진다고 해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죠."
상현의 말에 주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가볍게 쓸었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은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상현이 설명을 추가했다.
"시험을 치르는 도중이라고 했다면, 우리가 공을 뺏기는 순간 탈락이겠죠. 하지만 '끝났을 때'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물론 몬스터에게서 다시 뺏어온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럴 거라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서로 싸울까봐 그런 걸 수도 있지 않나요?"
영근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물어왔다.
상현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런 시험을 치르면서 팀원끼리 싸운다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격을 시킨다는 건 좀 과하지 않아요? 이건 공을 두고 전투가 과해질까봐 걸어둔 제약이에요. 무조건 부딪히게 될 거라는 걸 전제로 둔 거죠."
"그 말씀은……."
영근이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에 상현이 말을 이었다.
"만약 지키지 못하면, 싸워야 하는 시험이란 소립니다. 그리고 설사 지켜 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파티가 덤벼들 수도 있죠. 애초에 그런 의도로 판을 짠 거 같아요."
파티원 모두가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주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지만 상현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됐어. 그리고 다음으로 해야 할 건…….'
이제야 마음 편히 계획을 세우려던 찰나, 바로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끽? 으끼끽?"
원숭이 따위가 낼 법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