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상현이 부정적으로 말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렇다고 안 되는 걸 된다고 할 순 없잖아.'
하늘에서 불을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괴물을 당최 무슨 수로 지나쳐간단 말인가.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어렵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지만, 보고 나니 차원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힐끗 사람들을 보니 다들 또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어렴풋이 계약 어쩌고 라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상현이 불안감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훈이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잠깐만요. 저 상현 씨한테 뭐 좀 물어볼게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상현이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상현 씨, 방금 말씀하신 거 상현 씨를 기준으로 말씀하신 거죠?"
"…네."
상현이 얼빵하게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질문은 계속 날아왔다.
"그럼 그냥 다음 방으로 넘어간다는 가정만 하신 거네요?"
"그렇죠."
"몬스터를 잡는다는 계획은 당연히 없었고요."
"…네."
"그럼 만약에."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지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상현이 몸을 떨어댔다.
싱글거리며 지훈이 말을 이었다.
"상현 씨가 아니라 저희가 그 녀석을 잡는 거라면, 그래도 방법이 없을까요?"
"……."
떨림이 멎었다.
영상을 보던 도중 은연중에 했던 상상이었다.
'내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라면 어떨까'라고.
그러나 확실하게 아는 게 없었기에 말 그대로 상상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훈이 말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잠시만요."
상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시늉을 하며 상황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잘하면 가능할 수도 있어. 근데… 만약에 이걸 해낸다고 하면, 이 사람들이 날 가만히 둘까? 절대 아니지. 이미 지금만 해도 늦은 거나 마찬가지야.'
차분하게 생각들이 단계를 밟아 가는 도중.
상현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떠올랐다.
'잠깐, 이미 늦었다고? 그러면… 그래. 지금 이 사람들한테 나는 그냥 좀 뛰어난 '놈'이야. 무조건 잡아야 하지만, 아주 큰 메리트는 없는. 근데 아까 반응들을 봤을 때… 이걸 해낸다고 치면 꼭 모시고 싶은 '분'이 될 것 같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다른 방식의 해결책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차라리 후자가 낫겠어. 어차피 팔리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그래, 발언권이라도 좀 키워놔야지.'
결정이 서자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받아놓아야 할 게 있었다.
"한번 해볼게요. 일단 아이템, 스킬, 개인 성향 같은 정보들 정리 좀 해주세요. 당장 여기서 사용 가능한 것들 전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남아있는 건 수연뿐이었다.
한 가지 더 약속을 받아놓아야 할 때였다.
상현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쭤볼게요. 지금 제가 집에 간다면, 바로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다른 헌터들이 온다거나 하는 것들요."
잠시 고민하다가 수연이 말했다.
"…아니. 아직은."
"그럼 집에 보내주세요.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방송 시간은 좀 지키고 싶습니다. 도망 안 갈게요. 어차피 도망가기라도 하면, 방송도 못 하잖아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상현은 테이블 밑에 숨긴 손을 말아 쥐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다.
수연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답이 돌아왔다.
"알았어."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도 수연은 너무나 쉽게 허락했다.
"아, 감사합……."
"대신 혼자는 안 돼."
고마움에 인사를 하려던 상현이 멈칫했다.
어쩐지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나도 같이 가."
"……."
이어진 수연의 말에 상현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 집에 도착한 상현은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기본적인 것들만 서둘러 점검한 다음 바로 제목을 적어 넣는 상현.
[먹튀상현 생존신고.. 죽여주십시오ㅠㅠ...]
"젠장. 욕 엄청 먹겠는데."
가볍게 투덜거린 뒤 방송시작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채팅이 올라가는 속도를 보고 있자니 두두두두, 하고 키보드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던전 가는거 아니었음?????]
[먹튀상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집???]
[방제 씹오짐ㅋㅋㅋㅋ먹튀상현ㅋㅋㅋㅋㅋ]
[자아성찰갑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목 덕분인지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흐름만 잘 탄다면 어떻게든 좋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형님들! 다 아시겠지만, 형님들 말씀대로 원래 지금 던전에 있어야 하는데요. 일이 좀 생겼습니다……."
밝게 시작하던 상현은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뭔일임???]
[감성팔이같은데ㅋㅋㅋ]
[야 왜그러냐 상현아]
[????먼일있나보네]
그에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걱정하는 뉘앙스로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슬쩍 확인한 다음, 상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일이 좀 있었습니다, 형님들. 원래 어제까지 빡세게 준비 하려고 했는데, 너무 귀찮아서…는 장난이구요. 사실 제가 말씀만 드리면 다들 납득 하실 텐데, 개인적인 사정이라 얘기를 할 수가 없네요."
상현이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한국 최고의 헌터길드에서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일이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질 게 분명했으니까.
상현의 말에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긍은 했으나, 그럼에도 불만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다음던전 언제감??]
[공지라도 좀 써주지그랬냐ㅡㅡ]
[ㅇㅈ공지좀 써주지]
공지사항이라도 올려주지 그랬냐는 채팅들을 보자 상현도 아차 싶었다.
'그래도 그럴만한 경황이 없었는데…….'
순간 뭐라고 변명해야하나 고민하던 상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냥 사과 한 번이면 끝나는 걸, 질질 끌어봐야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결정을 내린 상현이 인상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좀 열 받네요.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있어요? 예? 형님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
[인성 드러나나요???]
[얘 왜이럼???]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상현의 모습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런 분위기를 슬쩍 확인한 다음, 상현이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톡톡 때리며 과장되게 외쳤다.
"아, 빡치네 진짜! 김상현, 미친 거 아니냐? 어떻게 형님들 기다리시는데 공지도 안 올릴 수 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새끼 뭐하냐ㅋㅋㅋㅋㅋ]
[아 진짜 이새끼는ㅋㅋㅋㅋㅋㅋ]
그런 다음 곧바로 상현이 머리를 깊게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들. 솔직히 그 생각을 못했네요.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채팅창에서 실시간으로 나오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민심'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사실 오늘 방송을 먼저 켰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한 번 사람들이 돌아서면 한 순간에 망하는 게 방송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콘텐츠가 재밌어도 그 사람이 싫어지는 순간, 끝이었다.
다시 긍정적으로 바뀐 사람들을 보며 상현이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형님들. 사실 오늘 방송 킨 것도 이거 말씀 드리려고 킨 거라서요. 일단 방송 끄고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다시 키겠습니다. 확실한 날짜 잡히면 공지… 어?"
슬슬 방송을 마무리하려던 상현이 기겁하며 캠 화면을 껐다.
언제 온 건지, 수연의 모습이 카메라에 살짝 잡힌 걸 본 것이었다.
'좆 됐다.'
상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채팅창이 폭발했다.
[여자아니냐 지금?????]
[이새끼 이유라는게 여자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걸림ㅋㅋㅋ]
[ㅋㅋㅋㅋㅋㅋ상현이 ㅈ됨ㅋㅋ]
갑작스런 상황에 진땀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아, 아하하, 아하하하. 오해십니다 형님들. 이 분은… 어……."
"언제 끝나?"
그때 수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상현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끝나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친구네 이새끼ㅋㅋㅋㅋㅋ]
[빨리끝내라ㅋㅋㅋㅋ 착한방종 ㅇㅈ한다ㅋㅋㅋㅋ]
걷잡을 수 없이 터져가는 채팅창에 상현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저렇게 웃고 떠들지만, 막상 방송이 끝나고 나면 '거짓말'이었다고 흐름이 바뀔 게 분명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송종료 전에 수습해야 했다. 이를 악물고 상현이 다시 캠 화면을 켰다.
"이, 이분은! 게스트입니다! 네, 게스트! 하하하하! 방종이라뇨, 형님들. 오늘의 콘텐츠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상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양 손을 모은 채 간절한 눈빛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앉으라고?"
무뚝뚝하게 질문하는 수연.
상현은 일말의 희망을 느끼며 급히 마이크를 껐다.
"네, 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게 그……."
상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연이 의자에 앉았다. 그게 뭐 어떠냐는 듯 한 태도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채팅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신이다...]
[마이크 왜끈거??]
[누구임? 먹튀상현 재조명ㅇㅈ;]
[여친 아닌가본데? 개이쁨 ㄹㅇㅋㅋㅋㅋ]
대체로 수연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혹시라도 저게 그녀의 기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상현이 말을 덧붙였다.
"호, 혹시 수연 씨랑 관련된 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아, 물론 다른 얘기 말고 수연 씨가 흑나비 소속이라는 거랑 A랭크 헌터라는 정도만… 제가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표정하게 수연이 상현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상현이 몸을 움츠렸다.
"해."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는 다르게, 돌아온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상현은 다시 마이크를 키고 황급히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 수연 씨. 안녕하세요. 우선 시청자분들한테 인사 한 번 해주시겠어요?"
"……."
애써 자연스럽게 말해보았지만, 역시나 수연은 인사는커녕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상현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억지로 활기차게 방송을 이어갔다.
"아, 죄송합니다. 원래 말 수가 적은 분이시거든요! 소개합니다, 한국 최고의 헌터길드 소속, A랭크 헌터, 하수연 씨입니다!"
[예?? 뭐라구요???]
[와ㅋㅋㅋ 이여자가 하수연임?]
['요가복입히자'님께서 풍선 1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883번째로 팬클럽이 되셨습니다.]
[누나 사랑해요!!!]
[오늘 상현이 말실수하면 죽는거아니냐ㅋㅋㅋㅋ]
[진짜 게스트였나본데? 미친스펙;]
폭발적인 반응과 더불어 풍선도 간간이 터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던 상현은 풍선을 쏜 사람의 아이디를 확인하곤, 드러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아, 요가복형 님. 풍선 감사합니다, 근데 이분은 그런 분이 아니시거든요. 혹시 아이디 좀 바꿔 주시면 안 될……."
['요가복입히자' 님께서 풍선 1,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건 풍선이었다.
"혀, 형님… 이분은 정말……."
땀을 삐질거리며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애쓰던 상현은, 곧 입을 닫아야 했다.
['요가복입히자' 님께서 풍선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가복 미친새끼ㅋㅋㅋㅋ]
[상현이 오늘 사망플래그네ㅋㅋㅋㅋㅋㅋㅋ]
풍선 만개는 백만 원이었다.
저 정도 금액이라면 분명 열혈팬 상위권에 들어왔을 터였다.
그리고 상현의 방송 모토 중에는 열혈팬을 대우해줘야 한다는 게 있었다.
"저, 수연 씨. 혹시 그……."
창백해진 얼굴로 상현이 수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요가복 한번만… 입어주실 수… 하,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