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새로운 한국
런던
영국 내각은 러시아에 심어둔 스파이로부터 전해진 보고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유혈극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얼마 전 트로츠키를 체포한 러시아 정부는 전격적으로 그를 광장에서 공개 처형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던 그의 죽음은 사람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츠키가 사망한 후 그가 일궈놓은 사회주의 세력을 접수한 스탈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봉기를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과 경찰, 군 병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러시아 내부는 완전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거이거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가는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버리는 패라 치고 한번 밀어준 것뿐인데 그들이 이런 성과를 가져다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흠흠. 이 일을 추진한 것이 나였단 것을 잊지 마시오. 하하.”
회의실 내에 한바탕 웃음이 이어진 후 총리 아스퀴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러시아 놈들이 애가 타겠군.”
“그렇습니다. 차르는 우리 손에 있고 국내는 혼란에 휩싸였으니 아주 볼만 할 것입니다.”
아스퀴스의 말에 맞장구를 친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에 이어 외무장관 그레이가 말을 받았다.
“러시아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독일도 당황한 눈치입니다. 저희에게 약속대로 빠르게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고 애걸하고 있습니다.”
“그때랑 상황이 달라졌는데 굳이 빠르게 휴전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는 없지요.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저러다 러시아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이 전쟁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고 저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상무 장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조금 상황을 지켜봅시다.”
심술궂은 미소와 함께 나온 상무 장관 윈스턴 처칠의 주장은 다수의 호응을 얻었고 그렇게 전쟁은 연장되는 듯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신은 공평했다.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계속 지원할 뜻을 내비쳤던 미국의 공화당 정권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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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민주당 선거본부
“태프트가 급사했답니다!”
“하핫. 선거 승리는 이제 따 놓은 당상입니다.”
“미리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전국 유세 중 과로로 쓰러진 태프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워싱턴의 민주당 선거본부는 환호성을 질렀다.
민주당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 역시 경쟁자의 사망 소식에 속으로는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흠흠. 그래도 다들 자제하도록 하시오. 상대방 후보가 사망했는데 웃고 떠들 수는 없는 일이잖소.”
윌슨은 승리가 확정된 이상 괜히 초상난 상대방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환호를 지르던 민주당 선거본부는 애써 감정을 가다듬고 짤막하게 태프트의 사망을 애도한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당신네들의 야욕은 정말로 역겹군. 꼭 그렇게 해야만 했소?”
“…….”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백악관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공화당 각 계파의 수장들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전국을 두 번이나 횡단하고 1주에 3번씩 유세를 하는 강행군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더군. 태프트를 죽인 것은 당신들이오.”
“……죄송합니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루스벨트의 말에 공화당 의원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태프트의 사인은 과로였고 그가 과로하게 만든 것은 공화당이었기 때문에.
“꼴도 보기 싫으니 내 눈앞에서 사라지시오! 그리고 임기를 마치는 대로 공화당과 나의 관계는 끝이오.”
루스벨트는 어떻게든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그의 친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공화당 의원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공화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고 그렇게 당내 최대 계파이던 태프트와 루스벨트의 세력이 선거에서 손을 떼자 자중지란에 빠진 공화당은 허무할 정도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의 헌법을 준수하며 보호하고 보전해나갈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새롭게 대통령으로 당선된 우드로 윌슨은 취임 선서를 마침과 동시에 그가 공약으로 내세웠었던 명예로운 휴전을 주장했다.
“길게 이어졌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습니다. 우리 미국은 이 전쟁에서 명예롭게 빠집시다! 더이상 국민들의 소중한 생명과 세금을 유럽의 전쟁에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독일에 휴전을 제안했고 미국이 빠지면 전쟁을 더이상 이어나가기 힘들었던 영국과 프랑스 역시 미국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급작스레 일어난 소요사태로 인해 마음을 졸이고 있던 독일은 상대측에서 휴전협상을 하자고 제의해오자 반색하며 대표단을 스톡홀름에 파견해 협상을 하도록 했다.
스톡홀름
“전쟁 이전으로 유럽의 국경을 되돌리고 서로 간에 손해 배상은 없는 것으로 합시다.”
영국 외무장관 그레이의 제안에 프랑스 측의 대표인 피숑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한 것은 독일이었는데 저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숑과 반대로 독일 측 대표인 뷜로우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에 모로코는 약속대로 중립국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중립지대로 삼아 함께 관리하는 것으로 하지요.”
배상을 어떻게 처리할지와 모로코에 대한 처우가 일단락되자 러시아 측 대표인 알렉산드르 대공이 물었다.
“차르 폐하는 언제 보내주실 것입니까?”
“……협정이 체결되는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면 프랑스와 영국 측에서 아국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을 끊으셨으면 하는군요.”
“러시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우리 독일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개입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독일과 러시아의 말에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알겠다고 답했다.
“좋습니다. 대신에 우리 역시 동양에서 잃은 식민지를 되찾을 생각인데 한국과 일본에 대한 지원을 말아주시지요.”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본 영토에 대한 침입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식민지를 되찾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협상으로 해결할 생각입니다. 연이어 전쟁을 치르기에는 부담되니까요.”
“한국 측에 미리 말을 해놓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전후처리에 관한 일이 일단락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국 측 대표인 제임스 레이놀즈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과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제 연합을 설립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국제 연합이요?”
“그렇습니다. 각 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서로 간에 충돌을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해당 안건은 다음에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안건인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본국에 일단 미국 측의 의견을 전달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휴전협상은 마무리 되었고 스톡홀름 조약이 체결되며 전 세계를 7년 동안 휩쓸었던 세계 대전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전쟁이 끝나자 각국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독일은 돌아온 키릴을 앞세워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다.
“동맹인 러시아 제국을 구원하러 간다! 제군들이 그동안의 전쟁으로 지친 것은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들은 동맹을 구원한다는 명분 하에 세계 대전 때 러시아에 진 빚을 갚고 영향력을 강화할 생각이었다.
독일이 동쪽으로의 진군을 하는 사이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과 일본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성
“우리에게 강남 지역을 돌려줌과 동시에 멋대로 강남 지역을 점거한 것에 대한 배상을 하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외무장관 김가진과 마주한 영국 공사 맥도널드의 요구였다.
“강남 지역을 돌려줄 수는 있지만, 배상은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한국의 답변에 영국 공사 맥도널드는 머리를 굴렸다.
‘한국도 우리와 더이상 전쟁을 할 의사는 없나 보군. 식민지만 돌려받아도 이득이긴 한데 그래도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러나면 내가 욕을 먹겠지?’
그가 본국으로부터 받은 지령은 강남 지방의 회복과 영국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적절한 보상이었다. 처음 지령을 받았을 때 그는 본국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광동과 광서를 전부 먹어치운 한국이 순순히 물러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김가진의 반응을 보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김가진에게 조용히 말했다.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합시다. 강남 지방을 돌려주고 동양에서 희생된 우리 장병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제공한다면 더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본국에서도 내게 더이상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
맥도널드의 말에 김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로 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간의 관계를 전쟁 이전으로 돌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혹시 일본 측과의 회담도 주선을 좀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그쪽은 저희와는 달리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해결해야겠지요.”
“잘 해결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맥도널드와의 회담이 마무리된 이후 김가진은 이척의 집무실로 향해 결과를 보고했다.
“해서 이렇게 영국과의 일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수고했소, 외무장관.”
“폐하께서 저들에게 많이 양보를 해줘도 상관없다고 하셔서 이렇게 회담이 마무리되었지만 아쉽긴 합니다. 장병들이 피를 흘려 얻어낸 영토를 이리 쉽게 돌려줘야 하니 말입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직 우리가 영국과 맞붙기는 부족하니까. 세계에 우리가 만만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으니 그것으로 됐소. 러시아 쪽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 하오?”
“말도 아니랍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들이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졌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일부를 비롯한 소수 지역만 정부의 통제에 남았답니다. 독일이 러시아를 돕겠다고 나서긴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독립을 선포해도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겠군. 이제 때가 된 것 같소. 내년에 바로 독립을 선포할 것이니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드디어 우리 한국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김가진이 나간 이후 이척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창밖을 바라봤다. 곧 점심이 되는 시간이라 그런지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해를 바라보며 이척은 독백을 했다.
“우리 한국의 앞날도 저 해처럼 솟아오르겠지. 원 역사처럼 어두운 역사를 지니지 않은,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나라로 만들어나가겠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