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곰 사냥
로스 앤젤레스
“우리 미국의 영광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휘이익
“태프트를 대통령으로!”
“태프트! 태프트!”
연단에서 연설을 마친 윌리엄 태프트는 청중들의 환호에 손을 흔든 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던 도중 그는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몰려와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다행히 넘어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후, 너무 힘들고 어지러워 죽겠군.”
“부축해드리겠습니다, 각하.”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태프트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온 이들의 부축을 받았다. 공화당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찍 선거 운동을 시작한 그는 선거 날짜가 다가올수록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서부에서 동부까지 미국 전역을 한 바퀴 돌며 유세를 한 뒤 다시 서부에서 전국 유세를 반복하는 일정은 50 중반을 넘어선 그에게 너무 혹독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던 뱃살이 홀쭉해질 지경이었다.
부축을 받으며 공화당 임시 선거 본부 내에 있는 그의 방에 들어온 태프트는 소파에 앉은 뒤 선거본부장인 넬슨 올드릭에게 물었다.
“이번 주에 남은 일정이 얼마나 되나? 조금 쉬고 싶은데.”
“모레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설을 하시고 그 다음다음 날에는 새크라멘토 그리고 다음 주에 시애틀에서 선거 유세를 하시면 됩니다. 그 후에는 미니애폴리스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세 일정에 기가 질린 태프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휴, 너무 가혹한 일정이야, 올드릭. 어떻게 조금 조절해줄 수는 없겠나? 요새 들어 정말로 몸이 안 좋네. 어지럼증도 자주 찾아오고 말이야.”
그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호소하며 일정의 조정을 요청했지만 올드릭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의 지지율이 민주당의 윌슨에 비해 약세입니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상대보다 유세를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치의가 너무 과로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시애틀에서의 유세만 마치면 미니애폴리스로 이동하며 휴식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만 힘을 내주십시오.”
자신에게 기어코 강행군을 강요하는 올드릭의 모습에 태프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대신 미니애폴리스로 이동하는 여정 중에는 다른 일정을 잡지 말게. 그리고 윌슨 쪽에서 대선 공약으로 휴전을 내걸고 있는데 우리도 이에 대한 대응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휴전보다는 영국에서 제시했던 참전 조건을 일부 공개하는 방안을 고민 중입니다.”
“당에서 조금 더 논의해보도록 하게. 국민들은 휴전을 원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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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리에주
“차르 폐하 만세! 러시아 제국 만세!”
러시아 제국의 차르 키릴은 병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의 리에주에 도착한 차였다.
그는 자신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야전 막사로 향했다.
“장군들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가 안내를 받으며 막사 내에 있는 회의실에 들어서자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팟킨과 독일군 사령관 팔켄하인이 예를 표하며 그를 맞았다.
키릴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예를 받으며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뒤 전황을 물었다.
“전선의 상황은 어떻소?”
“폐하의 용맹스런 병사들이 연일 적들을 패퇴시키며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하하. 과장이 섞여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군.”
“과장이 아닙니다. 러시아군 덕분에 정말로 전쟁이 굉장히 저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하. 당연한 소리. 우리 러시아군이 아니었으면 독일이 어찌 전쟁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었겠소.”
쿠로팟킨에 이어 팔켄하인까지 러시아군을 띄우자 키릴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역시 나의 선택이 옳았어. 적들을 무너뜨릴 때는 전력을 다해 한번에 무너뜨려야지, 후후.’
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향후 작전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찌되는지 알 수 있겠소?”
그의 물음에 팔켄하인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겠소.”
팔켄하인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전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아군은 리에주에 사령부를 차린 뒤 위이(Hui)에 진을 치고 있는 프랑스 군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적들의 규모는 대략 15만, 아군은 25만입니다.”
그는 전도에 놓여진 독일군의 형상을 띈 나무모형을 들어 북쪽의 브뤼셀 방향으로 놓았다.
“이곳에서 러시아군이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저희 독일군은 브뤼셀로 향해 벨기에를 완전히 손에 넣고 그대로 프랑스 북동부의 릴을 공략하려 합니다.”
“흐음? 우회하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방에서 적들이 계속 보강되는 모습이 관측되었고 저들의 방어선이 견고해 정면에서 깨뜨리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희생도 클 것 같다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핑계처럼 들리는군. 아군이 적들에 비해 절반 이상 많은데 굳이 골치 아프게 돌아갈 필요 있나? 희생을 좀 감수하더라도 저들을 밀어버리는게 나을 것 같은데.”
“저희 독일은 이번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서 가급적이면 손해를 최소화하려 합니다.”
“쯧. 겁쟁이들인가.”
“…….”
팔켄하인은 키릴의 노골적인 모욕에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지만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알겠네. 그렇게 하게나. 내가 카이저는 아니니 자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지. 나는 리에주에 며칠 더 머무르며 병사들을 위문하고 다른 곳으로 향하겠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켄하인은 딱딱한 어조로 키릴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그는 뒤에 남은 키릴과 쿠로팟킨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러시아의 차르가 거만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었는데 정말이군. 작전이 끝났을 때 저 인간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한데.”
팔켄하인은 혹여나 자신의 중얼거림을 누군가 들었는지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잰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
“장군, 독일 측으로부터 비밀리에 연락이 왔습니다. 곰을 사냥터에 풀어놨답니다.”
부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조프르는 들고 있던 장갑을 서로 마주치며 짝 소리를 냈다.
“좋아. 멍청한 불곰 놈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여줄 때가 왔군. 부대들에게 명을 내리게. 곰 사냥을 시작하자고.”
“옛!”
독일군 지휘관 팔켄하인으로부터 그들이 리에주를 떠나는 일자와 러시아군의 배치도, 그리고 전선별 취약점을 비밀리에 전달받은 조프르는 독일군이 리에주를 떠난 3일 뒤부터 전선에 남은 러시아군에 맹렬한 공격을 개시했다.
쾅쾅
“장군! 적들의 총공격입니다!”
“그동안 웅크리고만 있더니 하필이면 지금! 일단 부대를 방어선 요소요소에 배치해라! 그리고 독일 측에 다시 돌아와 달라고 전갈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쿠로팟킨은 그동안 적들의 움직임이 통 없어서 독일군이 전선에서 떠났어도 별다른 긴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경계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그 밑의 장교들도 평소처럼
그는 급작스러운 기습 속에서도 애써 정신을 차리며 적들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약한 고리만 골라서 집중적으로 타격한 프랑스의 공격에 그들은 전투가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극심한 피해를 입고 각 부대 간의 연계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저 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 부대의 배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건가! 안 되겠다.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기 전에 우선 차르 폐하부터 피신시켜야겠다.”
사령부까지 적들의 공세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자 쿠로팟킨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차르인 키릴을 피신시키고자 했다.
적들의 공격에 차르가 상해를 입거나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한다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참사도 그런 참사가 없었다.
콰콰쾅
“으음, 밖이 왜이리 시끄러운건가?”
어제 지휘관들과 폭음을 한 뒤 곯아떨어져 있던 키릴은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쟁터이니만큼 대포 소리와 총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 정도가 심했다.
그가 외부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사령관 쿠로팟킨이 부관과 함께 심각한 표정을 하고 그의 방을 찾아왔다.
“오, 쿠로팟킨 대장. 무슨 일로 여기를 왔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전장의 지휘에 힘쓰라고 했는데.”
여유롭게 그를 맞은 키릴에 비해 쿠로팟킨은 급박한 어조로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폐하, 큰일났습니다. 적들의 기습에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이 사령부까지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게 생겼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뭐라? 아니 내 전선의 상황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루 만에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우리가 우세한 것 아니었나?”
“이틀 전 독일군이 브뤼셀 공격을 위해 병력을 돌리며 전력 차이가 많이 좁혀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예상보다 적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게 무슨……!”
쿠로팟킨의 말에 키릴은 아직 남아있던 술기운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프랑스를 격파한 뒤 어떤 조건을 내걸까 고민하고 있던 그는 상황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자 황당했다.
키릴이 충격적인 소식에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하자 쿠로팟킨은 그에게 빠른 탈출을 권했다.
“폐하, 시간이 없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자칫 잘못하다가 이 사령부가 포위당하면 적들에게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퇴로가 막히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포위라고?”
“그렇습니다. 적들이 우리 부대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서 지금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이 분리된 상태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이 우리 사령부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고 공격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건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배신자는 나중에 색출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폐하!”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한 키릴의 모습에 쿠로팟킨은 부관에게 손짓을 했다.
“독일군이 향한 브뤼셀 방향으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기가 위급하다고 알렸으니 하루면 그들과 마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부관! 폐하를 모시도록!”
“옛!”
“쿠로팟킨 대장, 자네도 같이 가겠지?”
키릴의 물음에 쿠로팟킨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 임무는 이곳 전선의 지휘입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볼 생각입니다.”
“……부탁하겠네.”
키릴은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는 쿠로팟킨에게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부탁한다는 말만 남긴 채 그의 수행원들만 데리고 말에 올라 빠르게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유럽, 아니 전 세계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