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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127화 (127/130)

127화. 배신

상트 페테르부르크

“젠장, 해외 근무는 없을 거라더니. 정보부장의 말에 속아 넘어간 내가 등신이지.”

안무는 네바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김가진의 마수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한국 정보부에 입단한 그는 얼마 전 러시아의 현황을 파악해 오라는 상부의 명을 받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던 차였다.

“어휴, 여름인데도 정말 추워 죽겠군. 빨리 돌아가서 보드카나 걸쳐야겠어. 어라? 저 사람들은 왜 저러지?”

투덜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의 눈에 수상해 보이는 일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시위를 하다 왔는지 피켓과 깃발을 들고 있던 그들은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정보부원인 그의 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동 나이대 남자 넷에 여자 둘이라니. 가족이라 보기에는 구성이 안 맞잖아. 친구 사이라 보기에는 서로 간에 거리가 떨어져 있고. 함께 모여서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은데. 한번 따라가 볼까.”

그는 모습을 숨긴 채 그들을 따라갔다.

“스탈린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우리를 완전히 부하로 생각하고 있다니까.”

“그러게. 자기가 레닌 선생이랑 같이 활동했으면 활동한거지 그거 가지고 유세부리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나네.”

“그뿐인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주며 길들이려고 하고 있잖는가.”

안무의 예상대로 그들은 트로츠키가 조직한 러시아 사회주의 연맹의 조직원들이었다.

정부의 추적을 피해 숨죽이고 조용히 지내던 그들은 파리에서 스탈린이 거액의 자금과 무기를 가져오며 여력이 생기자 점점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스탈린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상당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본인의 경력을 내세우며 고압적으로 행동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 챙겼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 선생은 도대체 왜 그런 작자에게 아무 말 못하시는지.”

“그 분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걸세. 그 분이 모셨던 레닌 선생의 명을 받고 온 자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 집 앞에 도착하자 대화를 멈추고 주위를 살핀 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좀 다니게. 다른 동지들의 시간을 뺏으면 쓰나.”

“죄송합니다.”

거실에 놓여있는 큰 테이브에는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미리 와 있던 사회주의 연맹 산하 각 조직의 지도자들이 앉아있었다.

스탈린은 새로 들어온 이들에게 가볍게 핀잔을 준 뒤 그들이 자리에 앉자 감사의 말을 꺼내며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잘 활동해주고 있어서 고맙소.”

“아닙니다, 스탈린 동지께서 자금과 무기를 넉넉히 가져오신 덕분입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스탈린 동지가 아니었더라면 저희의 활동은 기존처럼 음지에서 조용히 이루어졌어야 했을 것입니다.”

스탈린의 말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아부를 떨었다. 사회주의 세력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둘은 스탈린이 파리에서 가져온 자금과 무기에 눈이 돌아가 그의 편에 붙은 상태였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겠소. 현장에서 활동해주고 있는 동지들 덕분이지.”

“공치사는 그쯤하고 회의나 속행하세.”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회의를 진행하자고 말한 트로츠키의 모습에 스탈린은 입을 살짝 실룩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회의의 안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알겠네. 다들 차르가 얼마 전 병사들을 위문한답시고 전선으로 떠난 것은 알고 있을걸세.”

그의 말에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르의 출정식은 꽤나 요란하게 이루어졌었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영국으로부터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졌네. 독일의 카이저가 말도 안 되는 제의를 해왔다더군.”

“그게 무엇인가?”

“독일이 휴전을 체결하겠다고 확약만 해준다면 러시아의 차르를 사로잡게 도와준다고 했다네, 푸하하핫.”

스탈린의 말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함께 싸우는 동맹국의 수장을 적에게 넘겨주겠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큭큭.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했었네. 뭐 그런데 자칭 영국 정보부에서 왔다고 한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니까 사실일걸세.”

“……카이저가 드디어 미쳐버린건가?”

“글쎄. 나야 모르지. 다만 독일 쪽에 연이 있는 레닌 선생께서 나름대로 알아보니 독일에서 휴전을 추진하려던 것을 러시아의 차르가 반대해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 같다더군. 큭큭.”

“……하긴 차르 외에 전쟁을 계속하자고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어쨌든 그래서 영국 측에서 이야기하기를 차르가 사로잡히면 러시아에 혼란이 걷잡을 수 없어질테니 그때를 노려 정부를 전복시키라더군.”

스탈린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차르가 적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우리가 일제히 궐기하면 정부는 손을 들걸세.”

“트로츠키 선생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정부의 지지율은 전황이 유리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유지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차르가 적들에게 붙잡히는 대패를 당한다면 국민들의 지지는 저희를 향할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신감을 내비치자 스탈린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다들 진정하게. 일단 영국 측에서 작전에 성공하는 대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하니 기다려보세나. 그리고 그때를 위해 무기를 미리 분배해주겠네. 카메네프!”

“예, 스탈린 동지.”

“다음 주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열차에 무기가 잔뜩 실려있을 테니 자네가 책임지고 분배할 수 있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세나. 그리고 지노비에프, 잠깐 남을 수 있겠나? 할 이야기가 있네.”

“옛.”

자신의 측근들만 챙기는 스탈린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 쓰발. 추워 죽겠네. 뭔 짓거리들을 하길래 아직까지 안 나오는거야. 설마 저 집에서 밤을 지새는 건 아니겠지.”

수상해보이는 이들이 들어간 집을 감시하고 있던 안무는 점점 몰려오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후, 그냥 돌아갈까? 알고보니 별 것 아니었던 것일 수도 있……!”

그가 괜히 저들을 쫓아왔다고 후회하며 진지하게 돌아가는 것을 고려할 때 집의 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뭔가 이야기가 끝났나보군. 저렇게 각자 집을 향해 가는 것을 보니 말이야. 어디보자, 저 놈들이 제일 만만해보이는데.”

일행을 나눠 제각기의 방향을 향하는 이들을 본 안무는 개중 가장 만만해보이는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이반, 스탈린이 말한 것이 정말일까?”

“뭐 사실이든 아니든 바뀔 것이 있겠나? 차르가 붙잡히면 정말로 좋은 일이고 아니어도 일단 무기는 받게 되었으니 나쁠 건 없지.”

“맞아. 무기의 배분을 카메네프 그 자식이 맡은 것은 짜증나지만 그래도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던 그들은 갈림길에 도착하자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럼 내일 보세나, 보리스.”

“그래, 자네도 좋은 밤 보내게.”

“헉!”

일행과 헤어져서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보리스 사빈코프는 누군가의 기습에 순식간에 입을 틀어막히고 제압당했다.

“쉿!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거야.”

“으읍……! 읍!”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니면 이대로 세상을 떠나고 싶나?”

날카로운 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댄 상대의 협박에 보리스의 몸부림은 멈췄다.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좋겠군.”

안무는 그를 끌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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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포슈 원수, 조프르 원수. 이번 일은 우리 프랑스의 모든 것을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하네.”

클레망소는 프랑스의 전군을 책임지고 있는 페르디낭 포슈와 조제프 조프르의 손을 붙잡고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총리 각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계획대로만 된다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일을 믿을 수 있습니까?”

“빌헬름 2세가 자신의 아들을 비밀리에 영국으로 보냈다는군.”

“……그 정도면 믿어 볼 만하겠군요. 독일의 카이저가 미친놈이기는 해도 자신의 아들까지 미끼로 쓸 인간은 아니니.”

빌헬름 2세가 차르인 키릴을 사로잡게 해준다고 처음 제안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그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함정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왕위 계승 3순위인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 왕자를 영국으로 보내 자신이 진실로 휴전을 원하고 있다고 알렸다. 자신의 아들까지 인질로 제공한 빌헬름 2세의 행동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제의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어떻게 차르를 사로잡고 전쟁을 마무리 지을지까지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상황이었다.

“인질도 있고 이전부터 독일 측에서 휴전하자는 이야기도 몇 차례 나왔었으니 빌헬름 2세가 휴전을 원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네. 러시아 측도 차르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독일에서 비밀리에 도와준다면 작전을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러시아 차르에게 위해가 가서는 안 되네. 무조건 아무런 상처 없이 사로잡아야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클레망소에게 대답을 하고 집무실을 나온 조프르는 포슈에게 물었다.

“작전의 총괄은 자네가 하겠나? 아니면 내가 할까?”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저는 전공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후후. 자네는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군.”

“저는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은퇴할 생각입니다. 늙은 몸을 이끌고 계속 전장을 전전하더니 뼈마디가 쑤시더군요. 그리고 수만의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제가 무슨 면목으로 정치를 하겠습니까?”

포슈의 말에 조프르는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나이 들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것은 마찬가지네.”

“그래도 저보다는 잘하실 것 같습니다. 정치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언론사 놈들과 마주쳐야 할 텐데 저는 그럴 자신이 없군요.”

브레멘의 대탈출로 인해 언론에서 집중포화를 받은 포슈는 환멸을 느껴 원수 위를 반납하려 했었다. 다행히 클레망소와 조프르의 만류로 계속 자리에 남았지만, 그 일은 그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이 사람들을 물어뜯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알겠네. 그럼 이번 곰 생포 작전은 내가 준비하도록 하겠네. 그동안 전선이 밀리지 않도록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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