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124화 (124/130)

124화. 나라를 위한 결정

중국 정주

“한국과 일본이 영국을 압도하고 있다는데.”

“그렇네. 영국 극동 총독부에서 전력의 상당 부분이 유럽으로 빠진 것도 있지만 그들의 국력이 우리 생각보다 강한 것 같네.”

“……이러면 안 되지만 그 둘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군.”

“우리도 곧 그렇게 될 수 있을걸세. 그나저나 영국의 제의는 정말로 거절할 건가?”

“내 생각은 변함이 없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리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불리한 전쟁을 할 이유도 없고 여력도 없네.”

“알겠네. 그나저나 아쉽긴 하군. 피 흘리지 않고 이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는데 엉뚱한 놈들이 끼어들 줄이야.”

황싱과 담인봉은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얼마 전 3년 간의 지리한 전쟁 끝에 마침내 펑궈장을 척살하여 중국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장작림마저 자살로 내몬 뒤 감숙성과 청해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그들의 다음 목표는 강남 지방이었다. 그들은 무력 압박과 지도층의 회유를 통해 강남 지방을 차지할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레 터진 전쟁으로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편을 들면 전쟁이 끝난 뒤 중화민국과 강남 지방의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영국의 제의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그들은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괜히 저들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휘하 지휘관들에게 주의를 주게.”

“알겠네. 그런데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이 있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한국과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것 같은데 승리한 그들이 강남 지방에 눌러 앉으려 하면 어떻게 하나?”

담인봉의 물음에 황싱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그 역시 이 경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몇 번 고민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한숨과 함께 답했다.

“휴. 일단 지켜보세나. 분하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으로는 일본은커녕 한국조차 제압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니 말이야.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잔당들을 처치하고 이번에 차지하게 된 지역들에 관리들을 파견하려면 품이 많이 들걸세.”

“……이민족들의 침략에 우리의 땅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분하군.”

“언젠가는 그놈들에게 우리가 당한 수모를 몇 배로 되갚아줄 수 있는 날이 올 걸세. 그리고 혹시 아나? 영국이 유럽에서 승리를 거두고 저 둘을 강남에서 다시 몰아낼지.”

“하긴. 전쟁이 여기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니 지켜봐야겠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힘을 기르세나.”

“알겠네. 그나저나 지주나 자본가 놈들이 요새 목소리를 다시 조금씩 키우고 있네. 전쟁도 끝났으니 계엄령을 풀고 의회를 다시 개설하자던데.”

본래부터 군수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중화민국은 외부에서 무기와 탄약 등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3년간 전쟁을 치르자 재정은 바닥이 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주나 자본가들에게 국가 소유의 토지와 이권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황싱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쥐죽은 듯이 가만있던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손을 벌리자 점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지금 시점에 와서는 다시 의회를 개설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 조금 풀어줬더니 빌어먹을 놈들이 또 날뛰는군. 회군하는 대로 녀석들을 다시 손봐줘야겠어.”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한 황싱에게 담인봉 역시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동감일세. 안 그래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그동안 소모한 재정을 채우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 기회에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자산을 압류해 국고를 채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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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루스벨트는 회의실의 상석에서 팔짱을 끼고 죽을상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관들을 바라봤다.

“영국과 프랑스가 병력 지원을 계속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희 생각보다 러시아의 저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확실히 멀리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다릅니다.”

러시아 제국의 참전은 전장의 판세를 180도 바꿔놓았다.

러시아군 총대장 쿠로팟킨은 교환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을 투입해 전선에 균열을 일으켰다. 수적인 우세에 밀린 프랑스는 독일 서부에 차지하고 있던 점령지를 모두 토해낸 뒤 벨기에 지역까지 물러나 간신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영국 함대 역시 브레멘과 함부르크를 잃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항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독일 함대와 합류하자 활동 반경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급반전한 전세에 당황한 것은 미국이었다. 러시아가 이리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적거리며 병력을 찔끔찔끔 파병하던 미국은 전선이 단숨에 밀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면 항복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자 허겁지겁 상비군을 끌어모아 유럽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흥. 내가 뭐라고 했소. 당신네들과 의원들이 밀어붙여서 어쩔 수없이 서명을 했었지만 이 전쟁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어두운 얼굴로 논의하던 장관들에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쏘아붙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참전을 거부하려 했지만, 서명을 하지 않는다면 총사퇴를 하겠다는 장관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잘잘못을 따져서 뭐하겠나.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가 중요하지.”

루스벨트의 비꼬는 말에 대통령과 장관들 사이에 싸늘함이 흐르자 부통령 태프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둘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난 모르는 일이네. 일을 저지른 사람들끼리 알아서 수습하게.”

“……시어도어, 짐을 짊어져야 하는 나도 좀 생각해주게. 몇 달 쉬고 왔더니 이런 폭탄이 터져있을 줄이야.”

“……쯧.”

빈정거리던 루스벨트는 친우의 말에 혀를 차며 손을 콧수염으로 가져간 뒤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다시 입을 열었디.

“아예 참전을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전쟁에 발을 담근 이상 쉽게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군. 사람들을 새로 징병해 전선에 파견하고 동맹군에 물자를 계속 공급해주며 어떻게든 전황을 유지하다가 적당한 시기를 봐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게 중재를 청해야 될 것 같은데.”

그의 생각에 영국과 프랑스가 쓰러지면 미국이라고 아무 일 없이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욕을 먹더라도 사람과 물자를 추가적으로 투입해 일단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그 다음에 조치를 취하고자 했다.

“……징집령을 내리신단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레 징병을 시행하면 사람들의 불만이 엄청날 것입니다. 거기에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 아닙니까.”

징병을 하겠다는 그의 말에 안 그래도 어둡던 사람들의 낯빛은 까맣게 죽어갔다. 징병 통지서가 사람들에게 도착하는 순간 지지율의 폭락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만류하려하자 루스벨트는 정말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방법이 없잖소. 나라고 징집령을 좋아서 내리는 줄 아시오? 막말로 징집령을 발표하면 욕을 먹는 건 나요. 쓸데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귀한 목숨을 낭비한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되겠지.”

“…….”

시어도어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징집령에 대한 주된 비난의 대상은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에게 다들 감사하시오. 대선 후보가 당신네들 사이에서 나왔다가는 정말로 어떻게 되든지 간에 신경도 안 썼을테니.”

“고맙네, 시어도어.”

“아닐세. 저 인간들을 제대로 말리지 못한 내 책임도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전쟁에 패배한 다면 우리 미국의 앞날에 상당한 악영향이 있을 테니, 욕을 먹더라도 나라를 위한 결정을 내려야겠지.”

그렇게 징집령과 전시 특별 국채의 매각이 발표되자 야당인 민주당은 공화당과 루스벨트를 거세게 공격했다.

“대통령과 내각은 지금의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하오!”

“참전은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일이었소. 그리 성급하게 일을 추진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오!”

“우리와 큰 상관도 없는 전쟁에 참가한 이유가 무엇이오? 혹시 영국으로부터 뒷돈을 받아먹은 것 아니오?”

공화당 대표 제이콥 갤린저는 의석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공격을 보며 이를 갈았다.

‘망할 자식들. 자기들도 좋다고 찬성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민주당은 참전 안건이 의회에 올라왔을 때 다수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지만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미국의 부담이 커질 듯하자 태세를 전환해 대통령과 내각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전이 마치 공화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양 여론을 호도하며 상대를 공격했다.

남북전쟁 이후로 근 50년 만에 1년 이상의 전쟁을 치르고 그것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 모든 잘못이 공화당의 탓인 마냥 몰아간 민주당의 여론전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잘 먹혀들었다.

공화당은 억울했지만 처음 참전 이야기가 나온 것이 공화당 쪽이었고 대통령을 압박한 것도 그들이었기에 잠자코 그들의 공세를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좋지 않다고 당원들이 불만입니다.”

“빌어먹을. 결론은 나보고 책임을 지라는 것이군.”

“……그렇다기보다는 그들로서도 불만을 토해낼 대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 돌릴 필요없네. 올해 선거가 끝나는대로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그들에게 전하게.”

“……알겠습니다.”

“선거 판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전체적으로 약세였는데 얼마 전 징병 통지서가 발송되기 시작하고서는 더 떨어졌습니다. 동부는 물론이고 서부마저 위험합니다.”

“미치겠군.”

보좌관의 말에 갤린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매킨리에 이어 루스벨트까지 무려 16년째 집권 여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은 태프트를 통해 20년 이상의 장기 집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꿈이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태프트 부통령에게 선거 유세를 조금 일찍 시작하자고 전하게. 그에게 호감도가 높은 서부를 중심으로 지지세를 결집해야겠어. 저들의 후보는 브라이언일 가능성이 높겠지?”

“브라이언이 현재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우드로 윌슨이라는 이가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고 있습니다.”

“우드로 윌슨? 그는 뭐하던 인물인가. 처음 들어보는데.”

“교수 출신으로 1908년에 처음으로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신중한 인물이긴 하나 우유부단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민주당 지도부에서는 과격파인 브라이언보다는 온건한 윌슨이 대선에서 이길 확률이 더 높다고 보고 그를 밀고 있답니다.”

“초짜를 민다니, 민주당 녀석들이 정신이 나갔나보군. 어쨌든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쉽게 꺾을 수 있을테니. 알겠네, 이만 가보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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