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118화 (118/130)

118화. 한일 동맹

한성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인이야말로 고맙소. 일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와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한성에 온 일본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는 국왕 이척과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처음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국내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국교가 회복된 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 하나 여전히 한국 국민들에게 일본은 침략국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동양의 두 강국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결국 여러 난관을 뚫은 뒤 두 나라 정상의 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사이온지는 주도권을 잡으려는 심산인지 한국이 일본에게 도움을 청하는 형태처럼 보이게 말했다.

‘골치 아프군. 처음부터 기싸움이라니.’

사이온지의 말에 이척은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지고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렇다 해서 회담을 시작하자마자 엎을 수는 없었다.

“……도움을 청한다기 보다는 함께 손을 잡자는거요. 어지러운 작금의 정세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이웃이 필요하지 않겠소?”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 이웃이 믿을만한 지 먼저 확인을 해야겠고 어떤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지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일도 없지 않았겠소? 그리고 정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남남으로 지내야지 별수 있겠소이까?”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

두 사람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서로를 날카롭게 탐색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사이온지가 눈꼬리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강단이 보통이 아니시라 들었는데 명성대로군요. 좋습니다. 서로 나눠야 할 말도 많고 시간도 길지 않으니 의미없는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좋소. 영국이 벌써 전쟁에 다 이긴 것처럼 굴면서 극동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소. 우리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 쪽에는 엄청난 양의 국채 매입을 요구했다 들었소. 이에 대해 함께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총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생각보다 소문에 밝으시군요. 국채 매입 요구를 벌써 들으셨을 줄이야.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말씀대로 영국은 저희에게 수년 치 국가 예산을 강탈하려 들고 있고 우리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받아들이는 순간 영국의 식민지로 굴러 떨어지니까요. 일본 제국 정부는 곧 영일 동맹의 파기를 선포할 생각입니다.”

“……진심이오?”

‘이 녀석들이 단단히 각오했군. 바로 영일 동맹을 파기하겠다니.’

“그렇습니다. 동맹이란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여길 때 성립되는 것이지 한 쪽이 다른 쪽을 속국으로 여기는데 계속 유지될 수가 없지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한국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의 정보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사이온지는 탐색전을 생략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알려줌과 동시에 한국의 의사를 물었다.

“있으니 우리 쪽에서 먼저 그대들에게 접촉한 것이 아니겠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나 일본이나 스스로 깃발을 세우기는 부족하고 손을 잡지 않는다면 열강들에게 각개격파 당할 것이오.”

“인정합니다. 그럼 서로 동맹을 맺고자 하는 의사는 확인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야겠군요. 이 동맹의 목적은 어디까지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영국에 대응하는 것까지만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함께 이 동아시아를 경영하는 것까지 같이 갈 용의가 있으십니까?”

“……아직은 영국의 영향력을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서로의 영역권을 나누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있소.”

‘이 녀석들 대동아공영권을 또 하려는 건가?’

사이온지의 이야기에 이척은 자연스레 대동아공영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척은 일본이 결코 오래 믿을 수 있는 동맹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동맹 간에 서로 존중을 한다 해도 국력 차이가 있는 순간 절대 대등해질 수 없었다. 함께 동아시아를 경영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존중하는 척하더라도 일본은 시간이 흐르며 자신들이 우위에 서고 한국이 그 바로 밑에 있는 형태의 세력권을 원하게 될 터였다.

이척의 말을 들은 사이온지의 눈매는 살짝 올라갔다. 그 역시 이번 문답으로 한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력권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바로 푼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논의를 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일단은 동맹을 맺고 영국의 영향력을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까지만 목적으로 한다고 알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영국 극동 총독부가 있는 홍콩과 강남(江南) 의회 지역을 쳐야 할 텐데 한국은 전쟁을 치를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우리가 최근 2-3 년간 지출한 전비 규모와 병사들의 규모를 보면 감이 오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다만 확인 차 질문드린 것뿐입니다.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됐습니다.”

둘은 이내 동맹 체결 공표와 함께 선전 포고 시기, 출병 규모 등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둘은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러시아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는 10월 이후 저희도 따라서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월부터는 출병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문제없이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소. 추가로 협의할 사항들이 있다면 실무자들을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러시아는 어떻게 대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와 동맹을 맺는다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텐데요. 그렇다고 저희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도 조금 그렇고……”

“반발이야 하겠지만 극동에서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데 어쩌겠소? 러시아와의 관계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안 써주셔도 되오.”

이척의 말에 사이온지는 살짝 미소를 띄었다.

“일전에 저희가 드렸던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기억하고 있겠소.”

“그럼 저는 이만 본국으로 돌아가보도록 하지요. 모쪼록 한국과 우리 일본이 향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믿을 수 있는 이웃이 되면 좋겠군요.”

“동감이오.”

이척의 집무실을 나온 사이온지는 그를 수행하던 외무성 차관 모토노 이치로에게 말했다.

“한국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러시아로부터 벗어날 생각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지? 우리에겐 잘된 일이야. 한국을 방패 삼아 북방을 막고 영국과 프랑스를 몰아낸 뒤 강남 지방과 인도차이나 지방을 먹어치우면 될테니.”

“그렇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산둥 반도가 아깝긴 하지만 그깟 것 한국보고 가지라하지요. 홍콩을 포함한 강남과 무궁무진한 자원이 묻혀있는 동남아시아를 차지하면 아시아의 패권국은 단연 우리 일본 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망해버렸다 하나 아직 청이 남아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를 먹어치우며 청까지 상대한다면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저희에게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좋아 좋아. 녀석들에게 당장 강하게 나가 거부감을 살 필요는 없지. 천천히 우리 세력권에 편입시키도록 해야겠어. 상인들과 회사들에 지령을 내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한국의 성장을 냅두도록 하게. 저 녀석들이 어이없게 러시아에 밀려버리거나 청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면 우리로서는 북방의 위협에 골치가 다시 아파지게 될테니.”

“알겠습니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릴, 저 때문에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사촌 오빠가 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부탁하는 바람에 이야기하긴 했지만, 저 때문에 당신에게 피해가 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된 빅토리아 멜리타는 자신의 남편이 될 러시아의 차르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녀의 걱정에 키릴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빅토리아. 당신이야말로 부담감을 가질 필요 없소. 도움을 받았으면 응당 보답을 하는 것이 러시아 남자들이오. 그리고 우리가 영국 놈들에게 선전 포고를 하려는 것이 비단 당신 때문만은 아니오. 이 기회에 북유럽과 동유럽에 대한 우리의 지배권을 확실히 함과 동시에 독일이라는 방패를 세우려는 것이니.”

“그래도……”

“아아. 복잡한 이야기는 신경쓰지 말고 우리의 결혼에만 집중합시다. 그런 것은 결혼 이후에 생각해도 충분한 문제요.”

키릴은 그의 예비 신부에게 사랑스러운 얼굴로 키스를 한 후 방을 나왔다. 좋아하던 여인과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된 그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회의실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의 기분은 이내 짜증스럽게 변했다.

“폐하. 다시 한번 재고해주십시오. 영국과의 전쟁은 이 제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와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니콜라이 대공은 마지막까지 키릴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군부의 수장인 그는 유럽의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경우 러일 전쟁 이후 겨우 복구한 러시아 제국의 군사력이 완전히 바닥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동양과 중앙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제국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숙부, 저보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라는 겁니까?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써?”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신중히……”

“됐습니다. 영국과의 전쟁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숙부께서 해주실 일은 저 놈들을 어떻게 쓰러뜨릴지 다른 이들과 토의하는 것입니다. 저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키릴의 노호성에 니콜라이 대공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블라디미르 대공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우유부단한 그는 차마 차르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할 용기가 없었다.

반전파의 거두이던 니콜라이 대공이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스레 반전에 대한 희망을 접고 이내 참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대신, 참전 규모는 대략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략 10 에서 20 만 정도의 병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병력으로 적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간에 미국도 참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 전에 프랑스를 확실히 격파해 전쟁이 더 커지기 전에 끝내야지요. 아예 50만 명 정도를 투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키릴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는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러시아의 국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전쟁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키릴은 사람들의 경악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알렉산드르 숙부, 해군도 발틱 함대 뿐 아니라 흑해 함대까지 전부 동원하도록 하세요. 필요하다면 극동 함대를 불러오도록 하고요.”

“흑해 함대까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콘스탄티노플을 넘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합니까. 영국 지중해 함대가 전부 북해로 몰려가 헐거워진 틈을 타 봉쇄망을 돌파해야지요. 투르크 녀석들의 힘으로 우리 흑해 함대를 막진 못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외무 장관.”

“예, 폐하.”

“몽골과 카자흐를 비롯한 우리의 보호국들도 전부 동원할 수 있도록 하세요. 한국이야 영국의 극동 총독부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상대하겠다 하니 전쟁 물자와 돈이나 넉넉히 내라고 하고요.”

“……예.”

러시아 제국 내의 모든 여력 뿐 아니라 보호국들까지 전부 동원하겠다는 말에 니콜라이 대공은 마지막으로 키릴을 말리기 위해 나섰다.

“폐하. 정녕 우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것을 다 끌어모으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모르니 여력은 조금 남기는 것이……”

“그만 좀 하세요, 숙부! 어차피 이 전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중국과 인도도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설프게 참여하는 것은 그냥 중립을 지키는 것만도 못합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이 자리에서 다시 분명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저는 확실히 다릅니다. 저는 이 전쟁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고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러시아 제국의 모든 것을 걸고! 다들 알겠습니까?”

“……예, 폐하.”

힘이 실린 키릴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는 침음을 삼키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운명이 정말로 키릴이 말한대로 될 지는 모를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