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황제의 결단
스위스 북부 국경 도시 바젤
“아까 식사를 너무 많이 했나, 왜 이리 졸립지.”
스위스의 국경 도시인 바젤의 시장을 맡고 있던 에밀 브렌너는 책상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그는 점심을 먹고 난 이후 몰려온 식곤증에 책상에서 졸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화장실을 잠시 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방을 나서기 전에 한 관리가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왔다.
쾅
“시장님! 큰일 났습니다!”
“살살 좀 열게, 울리히. 무슨 일이길래 기별도 없이 이리 황급히 온건가?”
에밀은 나른한 기운을 마저 떨치지 못한 채 울리히를 맞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그의 정신은 번쩍 들 수 밖에 없었다.
“독일……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놈들이 대체 왜 우리를!”
“모르겠습니다! 적들을 지휘하는 자가 대화를 요청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은…… 만나봐야겠지. 저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로 진입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에밀 브렌너는 독일군이 길을 잘못 들어서 바젤로 온 것이기를 바라며 그들의 지휘자인 레오폴트 막시밀리안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인원을 준비시킨 후 바젤 시를 나섰다.
“스위스가 우리의 이동을 잠시만 눈 감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
‘저번엔 벨기에더니 이번엔 우리란 말인가?’
독일군 사령관 레오폴트의 말에 에밀 브렌너는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이 막되먹은 놈들은 저번에는 벨기에의 영역을 함부로 침공하더니 이번에는 스위스에게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에밀은 당장이라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너희들의 땅으로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수만 명의 바젤 시민들의 목숨이 그의 입에 달려있었기에 분기를 꾹 눌러참고 레오폴트에게 답했다.
“일단 정부에 말은 전하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많은 시간을 줄 수는 없소.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독일군을 만나고 돌아온 에밀은 곧바로 수도인 베른으로 사람을 급히 보냄과 동시에 시청의 창고를 열어 안에 있던 무기들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라고 시켰다.
“시장님, 대부분의 시민들은 훈련은커녕 총 한 발 안 쏴본 이들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도시를 지킬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저항도 하지 않고 이 도시를 내줄 수는 없네. 적들에게 굴복하는 순간 우리의 주권은 끝장이야.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잠시나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게 국토가 짓밟혔던 기억은 스위스 인들 모두의 뇌리 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에밀은 그 당시의 일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바젤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러나 우리가 반항조차 하지 않고 굴복하다면 다른 도시들도 우리의 선례를 따라 차례로 독일 놈들에게 굴복할 것이고 그리 되면 이 조그만 나라는 끝장일세!”
“알겠습니다. 제가 잠시 잘못 생각했습니다. 시장님 말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길을 열어준다면 우리 스위스의 주권은 크게 훼손될 것입니다. 이 바젤 시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면 사람들도 기꺼이 협력할 것입니다.”
에밀의 말에 공감한 울리히는 곧바로 부하들을 불러 시민들에게 도시를 지켜달라고 호소하게 시켰다.
“다들 무기를 들어주십시오! 이 바젤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바젤을 위해,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일어나 주십시오!”
바젤 시민들은 관료들의 호소에 기꺼이 무기를 받고 수비군에 합류했다. 심지어 나이가 많이 든 노인까지 입대를 희망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젤이 길을 비켜달라는 독일의 요구에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바젤에서 온 전령의 말을 전해 들은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는 의회가 전쟁 준비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예비군의 소집은 예정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시 태세에 들어갔으니 국내의 모든 공장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도록 명하시오. 그리고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자산의 사용에 있어서 정부에 우선권이 있다고 국민들에게 고지하고.”
“예, 각하. 그런데 프랑스 측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일단 우리 선에서 먼저 적들을 막아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괜히 독일 놈들을 막겠답시고 프랑스 놈들이 우리 땅으로 들어오는 것도 사양이니.”
“알겠습니다.”
관료들에게 명을 내리며 스위스 대통령 아돌프 두쉐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독일 놈들. 우리는 멍청한 벨기에 놈들과는 다르다. 결코 네 놈들의 요구에 굴복해 길을 빌려주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베른, 독일군 진지
“녀석들로부터 답이 안 온 지 벌써 3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작전을 위해서 이 이상 지체할 수도 없습니다. 바젤을 짓밟고 바로 들레몽을 거쳐 몽벨리아르로 향해야 합니다.”
휘하 장교들의 보고에 4군 사령관 레오폴트 막시밀리안은 5군 사령관 루프레흐트를 바라봤다.
“루프레흐트 공도 저들의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그렇소. 사실 본인은 3일이나 여기서 기다린 것도 부담이었소. 예정대로 낭시의 1군과 만나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도 빠듯하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내심 바젤 시의 항복을 기대했던 레오폴트 막시밀리안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세를 준비했다.
“단숨에 들이쳐서 적들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되 불필요한 살상은 하지 마라!”
레오폴트는 바젤 같은 조그만 도시 따위는 금방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별다른 작전 없이 총공세를 하도록 명했다.
“전원, 장전!”
“장전!”
“발포!”
독일군이 보유한 크루프 사의 10.5 cm 펠드하우비체 야포가 불을 뿜고
“전원 정렬!”
“정렬!”
“돌격!”
탕탕
보병들에게 지급된 마우저 사의 M1898 소총들도 쉴새 없이 총탄을 토해냈다.
압도적인 군세에 맞서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한 에밀 브렌너와 바젤 시민들은 무려 3일 가까이 버텼다.
하지만 전력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시청에 백기가 걸렸습니다.”
“망할 놈들. 고분고분 엎드릴 것이지 꽤 오래 버텼군.”
“적들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할까요?”
“마음 같아서는 도시를 불지르고 무제한적인 약탈을 허용하고 싶지만 이 바젤은 5군 보급로의 시작점으로 써야 할테니 관대히 처분하도록. 대신 시민들을 징발해 방어벽을 설치하고 수송에 쓰도록 해라.그리고 루프레흐트 공에게 후위는 걱정하지 말고 빠르게 이동하라고 전하도록.”
“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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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이탈리아와 투르크의 공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속 빈 강정이 무엇인가를 이번 대전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수 아래로 봤던 이탈리아에 이어 병자로 여겨지고 있던 투르크에도 고전하는 오스트리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과연 열강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할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동맹인 독일조차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기대를 버릴 정도였다.
물론 그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강대국은 아니라 하나 유럽에서 나름 존재감 있는 두 중량급 국가를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일부 국가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지금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이탈리아 놈들이야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투르크 놈들도 제대로 제압을 못하고 있다니. 전장에 있는 지휘관들은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전장에서 올라온 보고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짜증을 내며 총리 에렌탈에게 물었다.
“두 방면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전선은 티롤과 슬로베니아 지역, 그리고 불가리아 지역 이렇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두 방면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에 오스트리아 군은 사령부를 두 개로 세워 각각의 방면을 맡도록 했는데 이는 사실상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것과 같았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건가!”
“죄송합니다.”
“에잉.”
요제프 1세는 여기서 짜증을 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턱에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제국 내에 있는 다른 민족들이 우리 오스트리아의 지도력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전쟁에 승리해도 우리 제국의 앞날이 밝지 않다. 투르크 만이라도 확실히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렌탈에게 말했다.
“불가리아 이외에 우리 편을 들겠다고 한 곳은 없나?”
본래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서 물러난 뒤 세르비아를 강제로 병합한 오스트리아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르크의 힘을 깎고자 하던 러시아의 권유와 투르크를 꺾는다면 그들의 유럽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오스트리아의 달콤한 말에 발칸 반도 국가들은 독오 동맹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점차 변해갔다.
불가리아 같은 경우는 적극적으로 나서 독오 동맹에 가입하고 투르크에 대한 선전 포고까지 한 상황이었다.
“예. 아직 다들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녀석들에게 도저히 안 달려들고는 못배길 미끼를 던져줘야지. 그리스와 루마니아, 알바니아에게 세르비아의 일부 영토를 나눠주는 대가로 참전을 요청하게.”
“예?”
요제프 1세의 말을 들은 에렌탈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렵게 얻은 영토를 이리 쉽게 포기한다니?
“끊임없이 테러 행위가 일어나는 지역이고 지금 상황에서는 제대로 관리도 안 되고 있잖나. 그리고 베오그라드 지역을 제외하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곳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스에게는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에게는 코소보, 루마니아에게는 도나우 강 인근 지방을 넘겨주면 되겠군. 아 불가리아 측에도 니슈 지방을 넘겨주도록 하고. 어차피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다 토해내야 할 지역들이네.”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그럼 그것말고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나? 있으면 내 기꺼이 그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설사 그것이 나의 왕관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라도 말이야.”
요제프의 말에 에렌탈의 말문은 막혔다.
황제의 말대로 뭔가 획기적인 반전이 없다면 오스트리아는 현재 상태로는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결국 에렌탈은 힘겹게 각 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사를 타진해보겠다는 말을 하고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요제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건지 알 수가 없군. 이탈리아를 적으로 돌린 것이 잘못이었나? 아니, 어차피 그들과는 북이탈리아 문제를 두고 어떤 식으로든 간에 한판 붙었을 텐데…… 투르크야 오래도록 싸워온 숙적이고. 갑갑하군.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강국으로 거듭났는데 우리는 이탈리아와 투르크 녀석들에게 쩔쩔매고 있다니…… 후, 일단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만 생각하자. 승리해도 앞날이 밝지 않지만 패배하면 그대로 제국은 붕괴한다.’
요제프는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대로 제국이 붕괴될 것이라 예측했다. 여러 민족들은 오스트리아가 그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의 깃발 아래 있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지도력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미련 없이 오스트리아의 품을 떠날 터였다.
그는 제국의 존속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전쟁에 승리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