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여걸
한성
“폐하, 저희도 군부 예산을 증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이 때 과거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저희와의 접점이 눈에 띄게 옅어졌습니다. 자강(自?)을 해야 합니다.”
중국에서 온갖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된 한국의 대신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거기에 러시아가 고압적으로 나오자 그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주장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상태였다.
“나 역시 그대들의 의견에 동의하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데 평화에 젖어있을 수는 없지. 예산이야 늘 부족하겠지만 신무기인 전차와 기관총, 그리고 야포 생산에 조금 더 많은 금액을 할당하도록 하시오.”
‘러시아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랬건만…… 생각보다 정권 유지가 잘 되는구나. 하긴 원 역사에서도 1917년에 멸망했었으니 아직 이르긴 하지.’
이척은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의회가 생긴 것을 보고 점차 권력이 의회로 이양되며 제정이 무너질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을 보고 의외로 러시아 귀족들과 황실의 저력이 튼튼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봤자 시대의 흐름을 영원히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그나저나 올가의 동생들은 어떻게 대우해줘야 하지?’
처음 올가가 한국으로 동생들을 데려오겠다고 전보를 보냈을 때 한국 정부의 심정은 ‘대략난감’ 이었다.
장기 여행이라는 명목의 정치적 망명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이것을 거절할 명분은 없고 또 러시아의 실권자인 블라디미르 대공은 가타부타 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입장을 정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올가의 말이라면 어지간하면 들어주는 국왕의 눈치도 봐야 했으니 한국 외무부는 죽을 맛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외무부의 모습을 본 이척은 혀를 한 번 찬 후 그들에게 올가의 자매들을 받아들이라고 명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황녀들의 장기 여행을 허락했다고 한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그들을 받아들이시오”
정부의 공식 방침은 ‘여행을 온 외국의 귀빈으로 맞이하겠다’였지만, 지금껏 외국 왕실의 정치적 망명자를 받아들인 적이 없던 만큼 어떤 대우를 해줘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왕비의 자매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외국 왕족들을 궁에 거주하게 할 수는 없고…… 그냥 과거출가한 공주들에게 했던 것만큼 해줘야겠군.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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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영국이 돈을 내고 산둥성 지역을 반환받을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독일군을 몰아내고 산둥 반도 지역을 점령한 영국 극동 총독부였지만 산둥성을 직접 통치하기에는 병력도 부족하고 지리적으로도 멀어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청에 산둥성 지역을 구매할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였다.
“우리 땅을 우리 돈을 주고 사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물러날 것이지, 이걸 다시 우리에게 팔아먹으려 하다니.”
“그래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뜯겼던 땅을 찾는 것이니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산둥 지역은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되찾는다면 들인 돈은 금방 회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군사력 강화에 돈을 들이면서 산둥 지역까지 사들이기에는 여력이 없다는 것이오.”
개혁에 한창이던 청나라는 과거 한국이 그랬듯이 만성적인 재정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은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의 전례를 따라 여러 회사들을 설립해 주식을 발행하고 거래소를 만들고 서양 상인들을 끌어들이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과거에 정부가 사천 지방의 민간 회사를 강제로 해산시키려 했던 기억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히 남아있었기에 사람들은 쉽사리 회사 주식을 사려 하지 않았다. 만주 출신 황실과 정부 수뇌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외국 상인들도 뇌물을 항상 요구하는 청의 관리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장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극동 전쟁이 서양의 농간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을 혐오했고 심할 경우 위해 행위를 가하는 일도 있어 서양인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재정 확보도 생각처럼 잘되지 않고 있는데 바로 옆의 산둥 반도 지역을 영국이 점령하고 중국 공화국과 중화민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청국 수뇌부는 불안감을 느껴 다른 부문의 예산들을 깎아 군비에 쏟아붓고 있었다.
“어떻게든 마련해봐야지요. 일차적으로 황실 자산의 일부를 활용하고 부유층들에게 공채를 판매합시다. 그렇게 하고서도 부족한 금액은 사람들에게 특별 세금으로 거둬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영국의 제의를 받아들이자고 앞장선 이는 순친왕 재풍이었다.
황제의 아버지인 이친왕 재순이 영향력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기에 그는 이번 산둥성 지역 병합 건을 추진하며 정부의 주도권을 계속 손에 쥐고자 했다.
“지금도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큰데 여기에 특별 세금까지 매기자고요?”
“지금까지 세금과 관련하여 봉기나 반란이 일어난 적도 없었고 사람들의 반발도 감내할 수준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일회성 특별 세금이니 한 번만 어떻게 넘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청국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굉장히 높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에서 세제 개편을 하긴 했지만, 세율은 여전히 살인적인 수준이었기에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중한 세금 부담에 청국 국민들의 허리가 휘어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불만을 속으로 삭히며 감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반란이나 소요 사태가 발생해 나라가 위태로워지거나 무너지면 말 그대로 인세의 지옥이 펼쳐진다는 것을 바로 밑의 중국 공화국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채와 세금은 그렇다 쳐도 황실부터가 돈을 마련하기 어렵소. 아시다시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개혁에 황실의 돈도 많이 투입하였기에……”
황실 자산을 맡아 관리하던 재순은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재풍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지만 정말로 청 황실의 자산은 거덜 나 있었다.
재순의 말에 재풍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없습니까. 황실에 온갖 보석들과 사치품들로 가득 찬 금고를 몇 개씩이나 보유하고 있는 분이 계시잖습니까? 그 분의 자산을 활용하면 되지요.”
재풍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은 오묘해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경친왕 혁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친왕의 말이 맞소. 태후 마마의 금고를 활용하면 영국에게 산둥성을 사들일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오.”
“……그 금고를 활용하는 것에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 자금들을 쓰려면 융유 태후 마마의 허락도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위에 계신 분들께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성합니다. 태후 마마께서 금고를 연다면 다른 황실 인사들도 이를 본받아 주머니를 풀 것입니다.”
“이때까지 저희들은 여러 특권을 내려놓고 관료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이제는 태후 마마께서도 이 나라를 위해 일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순친왕에 이어 경친왕까지 서태후의 금고를 열자는 주장에 동조하자 다른 이들도 목소리를 냈다. 한때는 만주 황실의 제일 윗 어른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던 변법파를 숙청하고 청을 좌지우지하던 서태후였다.
황제 위에 군림한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그 권세가 비견할 바 없을 정도였지만 나이가 들고 골골대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그녀는 물어뜯기 좋은 사냥감이었다.
“태후 마마들께는 누가 의견을 올리시겠습니까?”
“…….”
다수의 목소리에 밀린 이친왕 재순까지 태후의 금고를 활용하는데 동의하였지만 가장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
노쇠하였다 하나 서태후는 여전히 만주족의 웃어른이었고 푸공을 황제로 선출하는데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다. 그런 서태후에게 정면으로 들이박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경친왕 혁광이 손을 들었다.
“순친왕이나 이친왕께서 나서는 것은 부담스러우실테니 이 몸이 나서겠소.”
“감사합니다, 경친왕 전하.”
“괜찮소. 대신 이번 일만 끝내고 나서 본인은 은퇴할 생각이오. 나이가 들으니 격무를 이겨낼 수가 없더군.”
‘만주족에게 인망이 높은 태후 마마의 원망을 사게 되면 정치를 계속 해나가기는 어렵겠지. 은퇴할 때도 되었으니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해야겠구나. 부디 남은 이들이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나가면 좋겠군.’
이화원
“이야기는 들었소.”
서태후는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경친왕을 맞았다. 그녀의 노호성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간 경친왕이었지만 서태후가 무덤덤하게 자신을 대하자 한결 편안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소신이 못 나서 이 나라가 태후 마마의 패물까지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럴 것 없소.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오게 한 데에는 나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으니.”
말을 주고 받은 둘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찻잔에 담긴 차가 서서히 식어갈 때 즈음 서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밑에 것들에게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놓았으니 가져가면 될 것이오. 융유 태후에게도 내가 말해놓았소.”
“감사합니다, 마마. 솔직히 말해서 여기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왔었습니다.”
“호호.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단 말이오? 내가 사람 잡아먹는 귀신도 아니고.”
경친왕의 말에 서태후는 웃음을 한번 터뜨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권세와 재물을 탐했던 것은 사실이나 나라가 망하게 생긴 이 때에도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소. 그리고 나이가 일흔을 넘기니 점차 욕심이 없어지더이다. 내가 지금도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저 우리 만주족이 이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명맥을 유지하는 것뿐이오.”
초연한 태도로 위엄있게 말하는 서태후의 모습에 경친왕 혁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청나라 제일의 여걸로 손꼽힌 그녀의 명성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시는 황실의 패물까지 갖다 써야 하는 처지에 몰리지 않게끔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겠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 그리고 경친왕, 그대가 물러난다고 했다 들었는데.”
“송구합니다. 고령이어서 이제는 정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대의 뜻은 알겠지만 조금 더 수고해줬으면 좋겠군. 순친왕과 이친왕 둘은 아직 젊소. 자칫 젊은 혈기로 나라를 그르칠까 두렵구려.”
“허나 마마. 늙은이가 자리를 비켜줘야 젊은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청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이들은 순친왕과 이친왕입니다.”
“그 어린 것들은 벌써부터 서로 간에 권력을 놓고 다투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잖소?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고. 순친왕의 아들이 조금만 일찍 태어났어도 그 아이를 황제 위에 올렸을 것인데, 쯧.”
“이친왕께서도 충분히 사리가 밝으시니 순친왕 전하와 함께 협치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분 전하들의 사이는 아직 괜찮은 편이잖습니까.”
“알다시피 권력이란게 오묘하오. 누군가와 나누기에는 항상 아쉬운 법이지. 경친왕께서 조금 더 자리를 지키며 두 사람을 많이 가르쳐 주시오. 나라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으니 그깟 권력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고.”
잠시 망설이던 경친왕 혁광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서태후에게 답했다.
“……제가 어찌 태후 마마의 뜻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나라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