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97화 (97/130)

97화. 피의 즉위식

모스크바, 11월 3일

어두운 가정집 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딸깍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한 명의 남성이 숨을 고르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상석에 있던 2명 중 안경을 낀 지적인 모습의 사내가 말을 꺼냈다.

“괜찮네. 자, 그러면 작전 회의를 시작하지. 먼저 다들 추적은 없었겠지?”

“예.”

“좋아. 스탈린 동지, 마지막으로 작전을 설명해줄 수 있겠소?”

트로츠키는 옆에 앉은 스탈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겠소. 트로츠키 동지가 연결해준 모스크바 내에 있는 노동자들의 협조를 얻어 거사를 결행할 인원들과 물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요. 예정된 대로 내일 즉위식이 광장에서 열린다면 실패할 수가 없소.”

트로츠키의 말에 스탈린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작전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꽤나 긴 설명이 끝난 후 자리에 모인 모두는 눈을 빛냈다.

“퇴로는 확보됐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했소. 하지만 희생자가 안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소.”

스탈린의 말에 트로츠키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기색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인민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선 희생이 불가피한 법이지. 미안하지만 다들 부탁하겠네.”

“걱정 마십시오. 저희 모두의 목숨을 바치더라도 기필코 이번 거사를 성공시키겠습니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제외한 이들은 일어서서 차례로 둘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우리도 이만 이 도시를 떠나지. 내일 거사가 결행되면 경계가 삼엄해질테니 어서 빠져나가야 하네.”

“동지들이 목숨을 거는데 내일 거사가 결행되는 것까지는 보고 나가야 하지 않겠나?”

트로츠키의 말에 스탈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위선적인 녀석.’

스탈린은 책임감 있는 척하는 트로츠키가 아니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자네 좋을대로 하게. 나는 오늘 이곳을 나갈테니.”

“……알겠네. 그럼 파리에서 다시 보도록 하세.”

11월 4일

모스크바의 광장은 새로운 차르의 탄생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로 가득했다.

“새로 차르 위에 오른다는 분이 아직 갓난아이라던데?”

모자를 쓰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한 남성이 옆에 있던 머리가 벗겨진 친우에게 물었다.

“그렇긴 한데 선대 차르 폐하의 아드님이시니 정통성은 충분하지.”

“그래도 이 제국의 운명을 갓난아이에게 맡긴다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

“대공들께서 섭정하신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리고 무지렁이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이 사람아.”

“하긴 내가 걱정해서 뭐 변하는 것은 없겠지. 오늘도 즉위식이 끝나면 빵과 보드카를 나눠주시겠지?”

“아직 공표된 바가 없긴 한데 뭐라도 주지 않겠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모스크바의 성문 쪽에서 웅장한 음악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행렬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펑펑

미리 준비된 예포가 모스크바의 하늘을 수 놓았고 군중 속에 들어가 있던 바람잡이들이 새로운 차르의 즉위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새로운 차르에게 축복을!”

“다들 위대한 차르 폐하의 탄생을 기뻐합시다!”

“차르 폐하 만세! 러시아 제국 만세!”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길을 열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작전을 시도할까요?”

군중들 속에 몸을 숨기고 행렬을 관찰하던 이반은 옆에 있던 키로프에게 물었다.

“아직. 조금 기다려본다. 병사들의 수가 적다 하나 섣부르게 달려들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고 우리 말고도 준비하고 있는 동지들은 많으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알겠습니다.”

작전의 현장 지휘를 맡은 키로프는 침착하게 대원들을 다독이며 기회만 엿봤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왜 이렇게 경계가 허술하지? 병사들의 수도 적고…… 그리고 정말로 행사 순서가 발표된 그대로잖아?’

당장이라도 준비하고 있던 아무나 달려들면 작전을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경계 상태가 어설퍼 보이자 키로프는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대역을 썼나?’

그는 순간적으로 행렬에 알렉세이 황태자 대신 다른 이가 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의 몸이 약하니 그냥 민가의 갓난아이 하나를 대신 세워서 식을 진행할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이들은 누구보다 격식과 행사를 중시하는 이들. 그런 이들이 생에 단 한 번뿐인 즉위식에 대역을 내세울 리가.’

잠시 대역의 가능성을 생각하던 키로프는 이내 그 경우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신성한 즉위식에서 그런 장난을 친다는 것을 말도 안 됐다. 설령 대공들이 대역을 내세우기로 결정했더라도 정교회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키로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행렬이 이동하는 중에 거사를 결행하는 대신 마차에서 알렉세이와 황후가 내렸을 때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작전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르께 영광을!”

“오, 우리의 아버지시여!”

키로프와 사회주의자들이 마차에 바로 폭탄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기다린 사이 행렬은 어느새 모스크바의 광장에 이르렀다.

달칵

그리고 마차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장거리며 걸어나왔다.

“지금이다! 노동자들의 나라를 위하여!”

“노동자들의 나라를 위하여!”

키로프는 마차에서 알렉세이가 내린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신호를 내렸고 광장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결사대는 손에 폭탄을 쥐고 마차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압제자!”

퍼펑

“꺄아악!”

“허억!”

“폐하!”

몇 명 안 되는 호위병들로는 여러 방향에서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막을 수 없었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동지들! 다들 살아서 만나세!”

“모두 행운을!”

테러를 저지른 자들은 폭탄이 터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연기가 그친 뒤 사람들은 광장에 흩날린 핏물과 육편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던 마차는 온데간데 없었고 새로운 차르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탕! 탕탕!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어딘가에서 총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고함을 쳤다.

“차르 폐하를 시해한 놈들을 잡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황가 일족들이 대기하고 있던 곳에서 완전무장한 기마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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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뭐라고?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피의 즉위식이 펼쳐졌다고?”

이척은 즉위식에서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새로 차르로 즉위할 예정이던 알렉세이와 황후 알릭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여러 사람이 크게 다쳤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왕비, 왕비는 무사하다고 하던가?”

“예, 그렇습니다. 다행히 황실 인사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대에 자리하셨었기에 무탈하시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올가가 무사하다는 말에 이척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정을 찾은 그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그것도 즉위식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고 하던가?”

“주재하고 있던 공사의 말로는 사회주의자들의 만행이라고 합니다. 즉위식으로 모스크바에 인파가 몰린 틈을 타 일을 벌였다고……”

“정말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는군.”

이척은 혀를 찼다. 쿠데타로 집권한 러시아의 보수파들이 권력욕과 특권의식만 있는 무능한 이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로 즉위한 차르가 즉위식에서 목숨을 잃게 할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이번에 즉위식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블라디미르 대공과 니콜라이 대공이 아닌 미하일 대공이 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내가 잘은 모르지만 미하일 대공은 계속 해외에 있다가 얼마 전에야 러시아로 돌아온 인물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모스크바와 즉위식의 경비를 맡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번 피의 즉위식 사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이거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이척은 본능적으로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즉위식의 주관을 맡은 블라디미르 대공과 니콜라이 대공이 져야 했다.

그런데 엄한 미하일 대공이 그 책임을 지게 생겼다니?

“러시아 공사에게 비밀스레 내막을 캐보도록 시키게.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군.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위험성이 드러났으니 이에 대한 대비를 조금씩 해야겠군.”

“알겠습니다. 헌데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비라 하신다면……?”

“우리 한국에도 노동자들이 많지 않나. 그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미리부터 계도를 해야겠지. 총리 대신과 학부 대신을 들라 이르게.”

‘자본주의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의 실패는 예정된 일이니. 그리고 민족 간 대립을 해소하기도 벅찬 데 이념 대립까지 생기게 할 수는 없지.’

“예, 폐하.”

이척은 사회주의의 물결이 한국에도 몰려오기 전에 한국만의 이념을 새로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경쟁과 승자독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없었다. 아직은 국가 전체가 부를 축적해가고 있는 단계여서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빈부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 분명했고 이는 사회의 통합을 저해할 터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내가 명할 것이 조금 있어 그대들을 불렀소.”

총리 이상재와 학부대신 민종식이 들어오자 이척은 자리에 앉아 둘에게 러시아에서 들어온 소식을 이야기하며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말을 꺼냈다.

“세상에 그런 흉악한 놈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지. 그자들이 우리 한국에 뿌리를 뻗지 못하도록 미리미리 삭초제근해야 하네.”

이척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사회 기본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신분 상승의 길을 넓혀줄 것을 명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국민 전체에 대한 보험을 도입하려면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예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당장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고 먼저 논의를 하라는 것 뿐이네. 그리고 그 돈을 나라가 전부 부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가들도 한 손 거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해도 재정 부담이……”

“사람이 최소한 사람답게는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가장이 일하다 다치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남은 가족들을 굶어죽게 할 수는 없잖나.”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성균관 대학교에서 이 주제에 대해 연구를 하도록 명하겠습니다.”

“이 제도는 국가와 국민들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니 오랜 조사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일세.”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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