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
장쑤
“저 망할 왜구 놈들은 이 땅을 지배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파괴하겠다는 건가?”
일본 내각은 본토의 식량난이 급하니 홍수의 상황은 신경 쓰지 말고 모아둔 식량을 전부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게 말이야. 망할 자식들, 최소한의 생존은 할 수 있게 해줘야 지배자로 인정을 해주든 말든 하지!”
“놈들이 식량을 보관한 곳이 저 산 너머에 있다던데…… 사람들을 모아서 그 곳을 습격하는 것은 어떤가?”
“좋네!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인데 죽기 전에 발악은 해보세!”
장쑤의 중국인들은 기아와 아사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거리에 널려있는데 총독부에서 구휼미를 전혀 베풀지 않고 모아둔 식량을 일본으로 보내는 데에만 신경을 쓰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들고 일어난 이들은 각 지방의 식량 저장고나 운송하는 행렬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래 죽자 저래 죽나 마찬가지였다.
난퉁
쾅!
“각지에 도적들이 들끓고 있는데 경찰들과 주둔군은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식량 행렬이 공격당하는 일이 잦아지고 일본군에 대한 습격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총독 가쓰라 타로는 주둔군 사령관 다나카 기이치와 치안국장 아다치 겐조를 불러 야단쳤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히라타 도스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본국의 명이라지만 대홍수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잠겨버렸는데…… 먹고 살 길은 남겨줘야지. 당장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있겠나, 쯧.’
장쑤 부총독 히라타는 자신이 염려하던 사태가 발생한 것에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그는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경찰들을 총 동원해 폭도들을 잡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국경에 배치된 주둔군을 불러들여 경찰들을 지원하게 시키겠습니다.”
가쓰라의 타박에 다나카 기이치와 아다치 겐조는 고개를 숙이며 치안을 엄격히 관리하겠다고 한 뒤 집무실을 나왔다.
“치안국장, 지금 도적들이 가장 들끓는 곳이 어디요?”
“쉬저우(서주) 일대입니다. 총독부가 위치한 난퉁과 멀고 독일의 지배 하에 있는 산둥성, 중국 공화국의 영토인 하남성 지역과 가깝다보니 습격한 놈들을 제대로 추격하기 어렵습니다. 저희가 국경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안 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어 해당 지역의 치안은 포기한 상태입니다.”
“쉬저우 일대라. 인근의 쑤첸에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니 그들을 출동시켜야겠군. 그리고 병사들의 이동에 관해 미리 독일 측과 중국 공화국에 연락을 넣을테니 국경을 넘어서라도 도적 놈들을 반드시 섬멸하시오.”
“알겠습니다. 이 참에 놈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습니다.”
다나카 기이치의 연락을 받은 독일과 중국 공화국은 별다른 반발 없이 그들의 군사 작전을 허락했다. 도적들이 난리를 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들로 인해 일본과 충돌을 빚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놈들은 전부 도적들을 숨겨준 이들과 한 패다! 봐줄 것 없다!”
다나카의 명을 받아 출동한 일본군 19사단은 쉬저우 일대를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은 정말로 아무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닥쳐라! 이 곳에서 반군이 출몰했었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몽땅 불태우고 쓸어버려라!”
일본은 반란이 일어난 마을은 물론이고 반란군이 지나가는데 맞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까지 참혹하게 쓸어버렸다.
“죽일 놈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네. 우리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세나.”
“나는 더이상 잃을 것도 없네. 이 땅에서 저 빌어먹을 왜구 놈들을 몰아낼 때까지 싸울 생각이네.”
안 그래도 수해로 극심한 타격을 받은 장쑤 지역이었는데 일본이 그들을 챙기기는커녕 폭압적으로 대하자 사람들은 각 지의 반군에 가담해 저항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이동한 곳은 바로 인근에 있던 중국 공화국이었다.
문제는 중국 공화국 역시 수해 피해를 심하게 입었고 정부 내의 알력 다툼과 파벌 간의 군비 경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대로는 공멸 뿐이오.”
“당분간 대립을 멈추고 방법을 찾아봅시다.”
중국 공화국을 지배하고 있던 펑궈장과 단기서는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 문제가 심각해지자 일시적으로 휴전을 한 채 그들이 처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섬서 지역과 산서 지역은 수해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하던데.”
“열강들도 장작림은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들을 쳐서 식량을 확보하는 것은 어떻겠소?”
“좋소이다. 그리고 국경에 위치한 청나라의 마을들도 일부 약탈합시다. 장작림 놈의 소행으로 위장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오.”
“좋소. 각자 병력을 내기로 합시다.”
고민하던 그들은 가장 만만한 상대이던 장작림을 쳐서 식량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원세개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도 있었기에 핑계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저 놈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장작림과 싸우는 틈을 타 엉뚱한 짓을 하지 않을까?’
‘병력을 많이 내서 손실이 생기면 세력이 밀려버린다.’
서로를 견제하던 둘은 각자의 주력부대는 본거지에 남긴 채 일부만 국경지대로 파견했고 파견된 부대들도 당연히 각자 움직였기에 중국 공화국의 공격은 장작림에게 큰 위협심을 심어주지 못했다.
장작림에 대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펑궈장과 단기서는 다시금 서로를 비난하며 견제하기 시작했고 두 세력의 골은 다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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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다들 이번 전보에 대한 의견을 기탄없이 내주시오.”
착 가라앉은 표정을 지은 이척은 코코프체프를 제외한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한국 국왕은 새로 파견될 한국 총독과 협의하여 한국을 통치하도록 할 것이며 러시아 제국 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고 있던 공사 김만수에게 새로 온 전보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동맹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다니. 우리가 이런 모욕적인 지침을 그대로 따를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주러 공사 김만수는 정부에 불려가서 전보의 내용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고 했다. 새로 구성된 정부와 그 어떤 의견도 나누지 못했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통보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황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지금까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러시아 정부의 방침에 충실히 따랐는데 왜 총독을 파견하려 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이런 답변을 줬다고 했다.
“한국이 지금까지 제국의 충실한 동맹으로 극동에서 역할을 다한 것은 인정하오. 하지만 지금까지 너무 많은 자율권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중앙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주어야 할 것 같소.”
김만수는 몇 차례 러시아와 한국 사이 관계의 특수성을 설명했다고 했지만, 러시아 측에서 앞으로 모든 국가에 총독을 파견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만큼 한국만 예외로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잘랐다고 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분명 저희는 내정에서 자율권을 보장받았고 조약의 내용을 어긴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보조금 요구는 또 무엇입니까.”
대신들은 러시아에서 온 고압적인 요구에 분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자주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 뿐만 아니라 온건파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며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요구 거부를 주장하였다.
“좋소. 그러면 러시아 제국에 이번 요구에 대해 단호히 거절하겠다는 뜻을 전하겠소.”
“영명하신 결단입니다.”
“그런데 한국 내에 있는 러시아 병사들과 태평양 함대, 그리고 코코프체프 대신을 비롯한 관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소?”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러시아의 요구 거절을 천명한 이척은 바로 다음 문제를 꺼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할 경우 제일 문제가 될 사항이었다.
‘한국에 있는 러시아 군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텐데…… 문제는 그 다음이지.’
몇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훈련도와 무장이 상당히 갖추어진 한국군은 국내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넘어 극동 사령부와도 일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전력에 비하면 크게 모자랐기에 그들이 작정을 하고 전력을 투입하면 버티기 어려웠다.
“…….”
이척의 물음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들 아직은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부담을 갖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폐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게 좋은 방책이 있습니다. 잘만 된다면 굳이 코코프체프 대신을 비롯한 러시아 대신들과 러시아 병사들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부의 정리국장 김가진이었다.
“흐음? 말해보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독대해서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독대 신청에 이척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녀석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잖아. 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려고. ’
김가진은 능력은 있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집안인 안동 김씨 쪽에서도 그를 별종 취급할 정도였다.
“알겠소. 그러면 정리국장만 남고 오늘 회의는 일단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내각 회의를 마무리 짓고 집무실에 이척과 김가진 단 둘만 남게 되자 이척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 좋은 방책이 무엇이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작게 낮춘 채 말을 꺼냈다.
“폐하, 이번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고사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과거 태조 대왕께서 함흥에 계셨을 때…… 함흥 차사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
‘이 인간 진짜 미친 인간이네. 오는 길에 암살을 해버리자고?’
한국으로 파견될 총독을 암살해버리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이척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부터 여기 한성까지는 멀고도 먼 길입니다. 오는 길에 사고로 위장해 처리해버리면 저 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사연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니 …… 러시아에서 총독 한 명만 보낼 리가 없지 않소. 그리고 들키기라도 하면 두 나라의 관계는 끝장이고 국제 사회의 비난만 받게 될 것이오.”
“솔직히 러시아에서 이 먼 땅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국내 문제 해결도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는 이들인데. 한 두세 번 일이 일어나면 총독 파견 건은 흐지부지 넘어갈 것으로 사료됩니다.”
“…….”
‘솔직히 러시아 상태 봐서는 2-3년 내로 뭔 일 터질 것 같은데…… 이 인간 말대로 그냥 쓱싹 해버려?’
암살이라는 과격한 방안을 제시하는 그의 말에 이척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의외로 괜찮은 방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키면 그대로 끝장이지만 들키지만 않은 채로 시간을 2년 정도만 벌면 내부가 엉망이 되어가는 러시아 제국은 총독을 파견하겠다는 소리를 다시 입에 내지도 못할 정도로 약화될 게 분명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이척은 결단을 내렸다.
“좋소. 정리국장이 성공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그 공을 내가 분명 치하하리다. 하지만 이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것이고 걸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대와 그대의 가문을 역적으로 몰 수 밖에 없소. 그래도 할 자신이 있소?”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