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78화 (78/130)

78화. 유탄

안휘성 합비

쨍그랑

“뭐라고?”

중국 공화국 총통 단기서는 대홍수로 인해 안휘가 물난리가 났다는 보고를 듣고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파사삭 깨지며 파편이 흩날렸지만 단기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 보좌관의 앞에 다가가 다그쳤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뭐가 어쩌고 어째?”

“대홍수가 닥쳤습니다! 안휘 전역이 물난리가 났고 무수히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재산 피해는…… 추산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보좌관 쉬수정은 단기서의 다그침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그가 가져온 보고를 꿋꿋하게 끝까지 읽었다.

“아……!”

단기서는 모든 감정이 섞여 있는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무너졌다. 다행히 바로 앞에 있던 쉬수정이 그를 부축하여 바닥에 볼썽사납게 쓰러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가…… 각하!”

자신의 총통이 다리에 힘이 풀려 갑자기 쓰러지려는 것을 겨우 막은 쉬수정은 단기서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를 불렀다. 쉬수정의 외침에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은 단기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란 말인가…… 펑궈장 그 망할 놈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물 난리라니……”

비대한 군사력으로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중국 공화국에게 이번 홍수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단기서와 펑궈장은 서로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내정보다는 각자의 직속 부대 규모를 키워가는데 주력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수해에 더욱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쉬수정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단기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구나.’

대홍수에 좌절한 것은 단기서뿐만이 아니었다.

북경

“개혁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식량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한다니.”

“우선 개혁 작업을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당분간 수출 금지령을 내려야 될 것 같소. 쌀이 우리의 주요 수출 품목이라 쌀값이 상승한 것은 반길 일이지만 홍수로 작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먼저 백성들을 먹여살리는 것에 집중해야 될 것 같소.”

직례와 산서, 그리고 만주지역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청은 홍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황에 악영향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소의 청조였다면 작황이 좋건 나쁘건 가격이 오른 것을 반기며 쌀을 내다 팔았겠지만 개혁 작업으로 인해 민심이 뒤숭숭하고 내부 관료들의 동요도 많은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쌀에 대한 수출 금지령을 내리며 식량난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섭정 각하의 명이다! 쌀의 매점매석을 금지하고 국경 밖으로 반출하는 이는 엄벌에 처한다!”

청조는 상인들의 국경 통행을 제한하고 내년에 기근이 닥칠 것을 대비해 쌀을 모으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점에서 새옹지마가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었다.

“영토가 줄어든 것을 반길 때도 다 생기는구먼.”

“누가 아니래나. 이전보다 경계해야 할 지역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중국 전역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을 때는 국경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영역이 대폭 축소된 지금은 청조의 역량으로도 어렵지 않게 물자의 반출을 감시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식량의 반출이 금지된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 했지만 정부의 명에 따르지 않거나 밀수하는 것이 발견될 경우 엄벌에 처해졌기에 청의 식량 수출량은 급감하게 되었다.

빠르게 식량 반출을 금지한 정부의 조치로 청조는 내년까지 이어지는 기근에서 인명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식량 문제에 정부의 역량을 쏟는 만큼 개혁 작업이 더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이 있다면 반대로 환호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강남(江南) 지방의 지주들과 영국 상인들은 이번 홍수에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이게 꿈이냐 생시냐! 쌀값이 일전의 3배가 되었다니!”

특히 영국 상인들은 미국 대지진 소식을 듣고 쌀을 잔뜩 매집한 상태였기에 그 이익이 어마어마했다.

“흐흐흐. 대지진에 이어 대홍수라니. 신께서 우리에게 재복을 베풀어주시는군. 하하.”

“올해 농사를 완전히 망쳤으니 내년까지 쌀값은 계속 오를 것이오. 끊임없이 쌀을 사들이고 공급량을 통제합시다.”

“좋소. 강남의 지주들과도 손을 잡읍시다. 그들도 이번 사태를 속으로 반기고 있을테니 우리의 계획에 협조해 줄 것이오.”

영국은 이번 기회에 동양을 완전히 경제적으로 벗겨 먹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먼저 그들은 자금을 모아 쌀을 끊임없이 사들임과 동시에 지주들에게 내년도의 수확분까지 높은 가격에 선매수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이번 해에 농사를 완전히 망쳤으니 내년도의 쌀값도 분명 오를 것이오. 높은 가격에 팔아 줄테니 우리에게 쌀을 넘겨 주시오.”

“충분한 값을 치르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하하. 고맙소. 우리가 총독부에 말을 해서 내년도 세금에 문제가 없도록 하겠소이다.”

“허허.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지주들은 좋은 가격에 쌀을 매수하겠다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 상인들에 협조하면 세금 측면에서도 이득을 볼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영국의 극동 총독부 역시 영국 상인들이 올리는 수익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총독 각하, 올해 수익은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미곡을 사들여 얻은 수익에 더해 보관료와 운임료까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 다시 보기 어려울 이익을 기록할 것 같습니다.”

비서에게 극동 총독부의 현황과 수입을 보고받던 오스틴 체임벌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흰 이를 드러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하. 신께서 나를 도우시는군. 내가 총독으로 부임한 첫 해에 이런 경사가 발생하다니. 이번 실적을 본국에 보고한다면 나의 기반은 탄탄해지겠지. 우리가 식민지를 개척한 이래로 부임 첫 해부터 이런 수익을 낸 총독이 나 말고 누가 있었는가. 하하”

오스틴 체임벌린의 말대로 무수히 많은 식민지를 점령한 영국이었지만 군사비와 기반 시설 건설을 위한 지출 때문에 부임 첫 해부터 이익을 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만큼 이번에 그가 달성해낸 성과는 영국 정계에 굉장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일이었고 그의 정치 경력도 앞으로 탄탄대로를 밟아나가게 될 터였다.

“상인들의 편의를 봐주도록 하게. 그들이 올리는 수익이 곧 이 극동 총독부의 수익이 될 것 아닌가. 하하.”

“알겠습니다, 총독 각하.”

극동 총독부라는 뒷배를 업은 영국 상인들은 쌀의 유통을 통제하며 끊임없이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식량 파동의 유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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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우리는 배가 고프다!”

“무능한 국왕은 물러가라!”

동양에서 쌀값이 끊임없이 오르자 자연스레 밀값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 가격의 상승은 1904년부터 3년째 가뭄을 겪고 있던 스페인에 치명타를 안겼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어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던 스페인 국민들은 식량 부족까지 이어지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무능한 국왕의 퇴진과 공화정의 성립을 요구했다.

“폐하, 국민들의 불만이 높습니다. 왕실에 보관하고 있던 곡물을 풀어 국민들을 진정시키시지요.”

스페인의 총리 에우제니오는 국왕인 알폰스 13세에게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던 식량을 낮은 가격으로 국민들에게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들이 왕실에 복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내가 저들에게 숙여야 하는 것이지?”

문제는 당시 스페인의 국왕인 알폰스 13세에게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 왕가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갖춘 후계자였기에 태어나자마자 바로 왕위에 올랐고 대체할 인물이 왕가의 가계에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떠받들어졌다.

권위를 마음껏 누리던 환경에서 자란 알폰스 13세는 친정을 시작한 뒤에도 의회의 뜻을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

의회는 국왕의 독재적인 국정 운영에 불만이 많았지만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에 그에게 복종해야만 했고 자연스레 국민들은 그러한 의회를 불신하게 되었다. 물론 그와 함께 알폰스 13세의 인기도 바닥을 기었다.

“……폐하, 그래도 국민들의 민심이 좋지 않습니다. 최소한 왕실에서도 국민들의 고통을 알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저런 인간이 이 나라의 왕이라니…… 어쩌다 우리 스페인 제국이 이렇게까지……’

알폰스의 말을 들은 에우제니오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속에 떠오르는 화를 꾹 눌러참고 그에게 다시 말했다. 하지만 에우제니오에게 조언을 반복해서 들은 알폰스 13세는 짜증을 벌컥 냈다.

“시끄럽네! 저런 것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문제가 없도록 하는게 자네들의 역할 아닌가!”

“……알겠습니다.”

알폰스 13세의 짜증에 에우제니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1900년대 초의 스페인은 1905년에만 총리가 4번이나 바뀔 정도로 정치가 불안정했고 국왕의 변덕스러움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런만큼 총리의 권위와 정치적 기반은 튼튼하지 않았고 그들은 국왕의 거수기 역할에 머무르는 수 밖에 없었다.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정시키고 치안을 확보하도록 해라.”

국왕의 집무실을 나온 에우제니오는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에게 명했다.

“저들은 시위대가 아니라 폭도에 불과하다! 저 놈들을 모조리 토벌해라!”

정부의 명을 받은 리베라는 경찰 뿐만 아니라 군 병력을 동원해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진압은 피를 동반했고 이는 사람들의 민심에 불을 질렀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스페인은 내전의 불길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분리 독립 운동이 활발하던 카탈루냐 지방이었다.

“모로코 전쟁에 끌려간 것도 모자라 이런 탄압이라니!”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정부가 총칼로 답했다!”

“거리로 나가자! 언제까지 우리 노동자들이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카탈루냐의 노동자들은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정부에서 총칼로 시위를 진압하자 일제히 파업을 선언하며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이 일손을 놓자 지역의 모든 공장이 멈추고 교통이 정지되며 정부 기능은 마비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의 정부는 이를 반란 사태로 규정하고 곧바로 모로코에 있는 군대를 불러들여 카탈루냐에 대한 진압작전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던 유럽의 말썽꾼 빌헬름 2세가 개입하며 국면은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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