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71화 (71/130)

71화. 국혼

한성

“새해의 보름째 되는 날에 국혼을 진행하도록 하겠소.”

강원도의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민심이 진정되자 이척은 1906년 1월에 국혼을 진행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결혼할 날짜를 1월 15일로 정한 이유는 그 날이 한국의 가장 큰 명절인 설(1906년의 설은 1월 25일)과 러시아 정교의 축일인 크리스마스(러시아 정교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의 중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척의 결혼을 맞아 한국 정부는 경범죄자들을 석방하고 한성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큰 잔치를 열며 흥겹게 경삿날을 준비했다.

혼례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 왕실의 결혼 방식과 러시아의 혼례식이 절반씩 섞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결혼식날 이척은 화려하게 치장된 가마를 타고 올가가 있는 창경궁으로 향했다. 가마가 궁 인근에 이르렀을 때 그의 귀에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Не шей ты мне, матушка, красный сарафан,

(내 붉은 사라판을, 엄마, 꿰매지 마세요.)

Не входи, родимая, попусту в изъян.

(의미도 없는 헛된 일은, 엄마, 하지 마세요.)

То ли житьё девичье, чтоб его менять,

(처녀의 삶이란게 결국 바뀌어서,)

Торопиться замужем охать да вздыхать?

(서둘러 시집가서 ‘오’하며 한숨 쉬는 것인가요?)

‘붉은 사라판인가? 그런데 뭔가 박자가 많이 안 맞는 것 같은데?……’

들려온 노래는 과거 러시아에 갔을 때 한 번 들어본 적 있던 붉은 사라판이라는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의 음색은 듣기 좋았지만 박자가 어색하게 끊어지는 듯했다. 그만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닌지 그를 수행하는 이들 모두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원래 이런 노래인가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가 가마에서 내리자 수행하던 내관들이 안으로 들어가 신랑의 도착을 알렸다.

잠시 뒤 들려오던 노랫가락이 끊겼고 곧이어 얼굴에 새하얀 베일을 덮고 머리를 곱게 땋은 올가가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왕비 마마, 납시오!”

올가는 하얀 한복 위에 붉은 러시아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나온 그녀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이척이 타고 왔던 가마에 조심스레 올랐다.

가마에 그녀가 오른 후 이척은 따로 준비해온 말을 탔고 둘은 다시 수행하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경복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베일을 빨리 내리고 싶네.’

말을 타고 가며 눈을 굴려 올가의 모습을 흘끗흘끗 보던 이척은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내면의 욕망과 싸우는 사이 행렬은 금방 경복궁에 도착하였다.

경복궁 주위에는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있었고 그 대열 너머로 국왕의 결혼을 구경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행렬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국왕 폐하 만세! 중전마마 만세!”

“드디어 이 나라의 국모께서 나타나셨다!”

혼인 행렬이 환호성을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자 경복궁 앞마당에 준비된 식장이 보였다. 식장에는 여러 신료들과 외국 공사들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그 가운데를 지나 중앙으로 간 뒤 서로 마주보고 섰다.

“배례!”

혼인식을 주관하던 궁내부 협판 안중근의 소리에 둘은 서로 마주보고 맞절을 했다.

“합례!”

맞절을 한 뒤 내관들이 술잔에 술을 따라 이척에게 먼저 가져다주고 이어서 올가에게 전해주었다.

술잔에 담긴 술을 둘이 나눠마시는 것을 끝으로 결혼식은 마무리되었고 이척은 결혼식에 온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비어있던 이 나라의 안주인 자리가 채워져서 기쁩니다!”

한국의 신료들은 이척이 즉위한 뒤로 계속 공석이던 왕비 자리가 채워진 것을 크게 반겼다. 다들 말은 안했지만 무려 10년이 넘게 국모의 자리에 비어있던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러시아와 한국 두 나라의 국혼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외국 공사들도 한 명씩 다가와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다만 영국과 일본 공사는 축하를 건네면서도 약간의 뼈가 있는 말을 했다.

“두 분의 결혼을 축하드리며 동양의 평화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면 좋겠습니다.”

“한국 왕실이 앞으로도 번창하길 기원드리고 저희와도 이런 깊은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외국 공사들의 인사가 끝난 후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 와서 인사를 건넸다.

“6년 만에 다시 보는군요, 한국의 국왕. 니키 오라버니는 몸이 좋지 않고 미하일 오라버니도 정무에 바빠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어요.”

이척 역시 매너있는 그녀의 모습에 정중히 답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올가 여대공.”

“우리 귀여운 올가를 누가 데려갈지 궁금했었는데 좋은 사람과 만나게 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호호.”

“하하, 감사합니다.”

이척과 인사를 한 그녀는 올가에게 다가갔다.

“올가, 네가 벌써 이렇게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걸 보니 기쁘구나.”

“올가 고모?”

올가는 베일을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으로 다가온 이가 자신과 매우 친한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나란다. 혹시 부모님 대신 내가 와서 실망이니? 호호.”

“아니에요! 두 분이 여기까지 오시기엔 굉장히 어려우니까요. 고모라도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알렉산드로브나를 만난 올가는 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몸이 안 좋으신가요?……”

“불행히도…… 최근 들어 자리에 눕는 빈도가 더욱 잦아졌단다. 그래서 그런지 알릭스도 늘 우울해있어.”

니콜라이 2세의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다는 말에 올가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졌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듯 알렉산드로브나는 활달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새신부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성모님께서 니키 오라버니를 금세 일으켜주실 거란다.”

“알겠어요, 고모.”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올가와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다시 이척에게 왔다.

“앞으로도 올가를 잘 보살펴줬으면 해요.”

“걱정 안 하시게 잘 하겠습니다.”

“둘 모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면 좋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알렉산드로브나 대공에 이어 청에서 찾아온 축하사절단을 만나는 것을 끝으로 식은 마무리되었고 이척과 올가는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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셴양(선양)

“이 업무는 오늘부터 한국인들이 맡게 될 것이니 자네는 그만 집에 가보도록 하게.”

“제발……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셴양의 관리이던 저우이겅은 그에게 해직을 통보한 요동도 관찰사 김윤식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김윤식이 대답이 없자 저우이겅은 곧바로 가끔 배워둔 한국어로 더듬거리며 다시 자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저…… 저는 …… 한……국어도…… 할 수 있……다니다. 부디…… 기회를……”

저우이겅이 한국어로 말을 하자 김윤식의 눈은 이채를 띄었다.

“흠? 그냥 흔한 중국인 관리인줄 알았더니 한국어도 할 줄 아나?”

“조……조금…… 배웠다니다……”

“으음……”

‘어차피 중국인 관리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고 한성에서 중국인들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쓰라고 했으니 한 번 써볼까?’

새로 한국의 영토로 편입한 요동도의 넓이는 평안도보다 훨씬 컸고 사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관료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생각을 정한 김윤식은 입을 열었다.

“자네 우리 한국과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나?”

“물……물론이다니다.”

“좋네. 그러면 자네를 이 선양에 있는 중국인 관리들의 총책임자로 임명할테니 먼저 관료들의 명단을 전부 가져오게.”

“알겠다니다!”

“……한국어도 조금 더 완벽히 구사할 수 있게 계속 공부하도록.”

“에예!”

저우이겅은 그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고 해직당할 위기에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여기 요녕성에 관한 모든 자료입니다.”

“어허! 요녕성이 아니라 요동도네. 말을 조심하도록.”

“예옛! 죄송합니다!”

저우이겅은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일했고 곧 요동도 관찰사 김윤식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 저 더러운 놈.”

“쯧. 그래도 어쩔 수 없잖나. 빌어먹을 북경의 돼지들이 나라를 유지하는 데 급급해 이 땅을 팔아치워 버렸으니. 이제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한국이네.”

“나도 알고 있네. 그래도 저 간신 같은 저우이겅 놈처럼 되고 싶지는 않네.”

저우이겅은 김윤식의 신임을 얻은 만큼 요동에 있던 한인(漢人)과 만주족들에게 큰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 입장에서 저우이겅은 매국노였다.

하지만 저우이겅은 그들의 비판은 신경쓰지 않았다.

‘멍청한 녀석들. 청은 지는 달이고 한국은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리고 우리를 먼저 배신하고 팔아치운 건 청인데 그들에게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차라리 한국에 충성을 다해 떵떵거리고 사는 게 이득이다.’

그는 중국인들의 따가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의 요동도 통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를 점차 신임하게 된 김윤식은 중요한 임무들도 하나둘 맡기기 시작했다.

“자네 여기 선양에 오래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한성에서 명령이 내려왔네. 그 일을 자네가 좀 수행해줘야겠어.”

“옙! 말씀만 하십시오!”

“요하 지역에 외국 기술자들이 와서 유전을 탐사할 계획인데 사람들을 지도해 그들을 보조했으면 좋겠네. 매우 중요한 일이니 이 일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저우이겅은 직감적으로 이 일이 자신의 출세에 큰 도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저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검거나 기름기를 띈 물을 발견하면 곧바로 알려라!”

“이 한겨울에 요하 유역을 수색한다고요? 그리고 겨울이라 강물이 전부 얼어있는데 검은 물을 어떻게 찾습니까?”

“요하 유역은 너무 광활합니다. 그리고 늪지와 강이 섞여 있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인명피해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한겨울에 자신들을 소집한 뒤 난데없이 듣도 보도 못한 검고 기름 띈 물을 찾으라는 저우이겅의 명에 사람들은 불만을 표했다.

“시끄럽다! 닥치고 명에 따라! 명을 따르지 않는 놈은 곧바로 체포하겠다!”

하지만 출세에 눈이 먼 저우이겅은 병사들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탐색 작업을 강요했다.

“저우이겅 저 망할 놈은 천벌을 받을 걸세.”

“그러게 말이야. 이 겨울에 웬 난리란 말인가.”

모인 이들은 궁시렁거렸지만 위에서 명이 내려온 이상 따르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곡괭이를 짊어지고 탐사대를 따라 요하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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