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1차 극동 전쟁 (4)
쨍그랑
고급스러운 찻잔이 무릎 꿇은 장작림의 귀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 바닥에 부딪힌 뒤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죄송합니다, 대총통 각하.”
“죄송하면 다냐! 내가 네 놈한테 준 병력이 몇인데 아직까지 저 놈들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는거냐!”
“한국군의 무장이 생각보다 튼튼합니다. 그리고 방어선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러시아 군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이 지원을 바로 나와서……”
“닥쳐라! 그게 말이라고 할 소리냐!”
“…….”
“죽어라! 이 무능한 놈아. 그냥 나가서 죽으라고!”
막사 안에서 원세개는 온갖 집기들을 깨며 장작림에게 폭언을 퍼붓고 있었다. 한참 그를 욕하던 원세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작림의 바로 앞으로 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핏발 선 눈으로 장작림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원세개는 으르렁거렸다.
“이번 달 내로 톈진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네 놈은 병사로 강등이다. 알겠나?”
“……예, 각하.”
원세개의 기세에 눌린 장작림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고, 그의 대답을 들은 원세개는 잡았던 멱살을 푼 뒤 장작림을 내팽개쳤다. 장작림을 내팽개친 원세개는 사나운 얼굴로 단기서에게 물었다.
“펑궈장 그 자식은 일본군을 언제까지 몰아내겠다고 하나!”
“일본군의 공세가 강해 일단 방어에 치중한 뒤 그들을 몰아낼 생각이라고 합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단기서는 자신에게 물음이 날아오자 곧바로 펑궈장이 보낸 보고를 읊었다. 그 보고를 들은 원세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앞에 놓여있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쾅
“그 개자식에게 전해라! 다음 달까지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세간의 말대로 개로 만들어주겠다고!”
“예, 옛!”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마음에 드는 놈이 한 놈도 없구나! 북경에 남아있던 왕스전이 청조에 참살되지만 않았어도!”
“…….”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
보고를 끝마치고 나온 둘은 서로 투덜거렸다. 특히 원세개에게 된통 깨진 장작림의 불만이 심했다. 그는 처음부터 북양군에 소속되어 있던 단기서나 펑궈장과는 달리 원세개에게 높은 대우를 약속받고 만주에서 일어선 자신의 세력과 함께 온 터라 지금의 푸대접에 더더욱 마음이 상한 상태였다.
“각하께서 최근 들어 신경이 부쩍 날카로워지신 것 같소.”
“그러실 만도 하지요. 손쉽게 청조를 멸망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발목이 잡혀 질질 끌리고 있고, 전황도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니까요. 그리고 강남지역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어서 더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도 오늘은 너무 하신 것 같소. 나와 내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톈진을 손에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소이다. 한국군의 도착이 조금만 지연됐더라면 나는 분명히 톈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거요. 이정신 그 머저리 같은 놈이 함대를 칭다오 앞바다에 쳐박아 저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톈진에 일찍 상륙한 게 내 탓이오?”
“…….”
“그리고 보급이 자꾸 늦어져서 공격이 지연되는 점도 문제요. 육로로 물자를 운송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중간에 손망실 되는 경우도 많소. 더구나 발해만에 있던 일본 함선들이 톈진 앞바다까지 와서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어 제대로 병력을 전개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대총통 각하께서는 이런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내가 무능하
다고 질타하시니 억울하오.”
“……장군께서 참으시지요. 각하께서도 순간의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말하신 것일 겁니다.”
“……후. 단기서 장군. 그대 휘하에 있는 병력을 조금만 빌려줄 수 있겠소? 공방전을 치르느라 병력의 소모가 생각보다 많았소.”
“제 병력을요?”
단기서는 장작림의 기습적인 요청에 당황했다. 같이 원세개 밑에 있긴 했지만 장작림은 얼마 전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그런 주제에 죽은 왕스전의 자리를 꿰차더니 자신과 펑궈장과 함께 2인자의 자리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성장했기에 조금씩 경계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휘하의 병력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라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부탁하오. 대총통 각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력의 보강이 있어야 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가만있던 내가 유탄을 맞을 줄이야. 여기서 거절하면 대총통 각하가 난리를 칠 테니 어쩔 수 없이 빌려주긴 한다만 요새 장작림 저 녀석의 움직임이 수상치 않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와서 불안하군.’
전방의 보고에 따르면 몇 차례 시도한 공격이 번번이 패퇴당하자 장작림이 최근 들어 전투를 회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반면 보급품은 지속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요청하고 있어 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단기서는 핑계만 대며 전투를 피한 채 병력 보강을 요청하는 장작림이 탐탁치 않았지만, 자신을 제외한 펑궈장과 장작림 둘 모두 직속
부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부대 일부를 장작림에게 내주었고 장작림은 본진에서 온갖 물자를 바리바리 싸든 뒤 병력들과 함께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단기서는 전방에서 전해진 비보에 장작림에게 병력을 내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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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2진 수송선
“항해를 어려워하는 이들은 없는가?”
“예. 뱃멀미가 심한 일부 병사들은 다시 돌려보내긴 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알겠네. 병사들의 선실을 한 번 둘러보고 돌아가겠네.”
“모시겠습니다.”
한국군 2진 사령관 박승환은 자신이 탄 배를 한 바퀴 돌며 병사들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이 탄 선실을 돌아본 뒤 자신의 선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한국인 병사들의 선실을 둘러본 이후 그는 중국인 병사들이 머무는 선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중국인 병사들의 선실입니다.”
“에잉. 저들에게 위생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하도록 하게. 아무리 우리가 며칠 뒤면 이 배를 떠난다지만 3진과 4진도 이 배를 사용할테니 깨끗하게 넘겨줘야 하지 않겠나.”
“예. 내일 사관들에게 전파하도록 명하겠습니다.”
중국인 병사들은 배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었다. 배의 밑바닥은 잘 관리되지 않고 있었기에 더럽고 악취가 났고 중국인 병사들도 잠시만 배를 탄다는 생각에 아무렇게나 쓰레기와 오물을 버려 완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인상을 한 번 찌푸린 박승환은 옆에 있던 부관에게 위생 관념에 대해 다음 날 강조하라고 전한 뒤 자신의 선실로 돌아가
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한 병사가 자신의 자리를 깔끔히 정리한 채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들어왔다.
“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있다니. 저 병사를 한 번 불러주겠나?”
“옛!”
책을 읽던 병사의 모습에 흥미가 생긴 박승환은 병사를 부르도록 시켰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는데 주변을 정리한 채 혼자서 꼿꼿한 자세로 독서를 하고 있던 모습이 그의 시선을 끌었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는 지도 궁금했다.
“충성! 5사단 2연대 일병 장개석!”
“다른 사람들은 다 쉬고 있는데 자네만 혼자 책을 읽고 있어 관심이 생겨 불렀네. 혹시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겠나?”
“옛! 러일 전쟁 관련 사료를 읽고 있었습니다!”
“흠?”
병사는 눈에서 정광이 넘치고 있었고 굉장히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자신이 참전했었던 러일 전쟁 관련 사료를 읽고 있었다는 젊은 병사의 말에 박승환은 호기심이 더더욱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국왕 폐하께서 참전하셨다고 전해지는 금성호 전투에 관한 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
“금성호 전투라…… 치열했던 전투였지……”
장개석의 말에 박승환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마지막에 우회해 온 러시아 제국의 병력들이 아니었다면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던, 러시아 제국과 한국, 일본 3국의 운명을 가른 굉장히 치열한 전투였다.
“그래. 자네는 그 부분을 읽고 무엇을 느꼈나?”
“예! 적들의 허를 찌르고 아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그건 너무 단순한 소리잖나.”
“그 단순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휘관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놈 봐라?’
장개석의 되바라진 말에 박승환은 그를 찬찬히 훑어 봤다. 장개석은 자신의 한 말에 확신을 갖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럼 자네는 본인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관을 능멸하는 건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직접 군 병력을 지휘해본 적이 없는 입장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섣부르게 말씀드릴 수 없었을 뿐입니다.”
“본인이 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남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삼가라. 알겠나?”
“옛!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충성!”
박승환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장개석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온 뒤 부관을 불러 장개석에 대한 인적 사항을 조사하게 시켰다.
“여기 그의 내력입니다. 중국 저장성 출신이라고 하고 2년 전 한국에 건너와 노동자로 일하다가 모병에 응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아직 중국에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성의 사관학교에 중국인이 입학하기 위해서는 추천서와 외국인 신분증이 필요했다. 홀로 한국에 건너왔었던 장개석은 추천서와 외국인 신분증이 없어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그는 추천서와 신분증을 얻기 위해 한국어를 독학하고 노동자로 일하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면 한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사로 지원한 상태였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군. 이 녀석을 참모부로 전속시키도록.”
“참모부로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중국인을 참모부에 배치하기는 조금……”
“전쟁에 참여한 이상 이 자도 곧 한국 신분증을 받게 될 테잖나? 한국인이 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 같은데 조금 일찍 배치한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개석의 당당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진단하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박승환은 그를 가까이서 두고 보며 지켜볼 생각이었다.
‘싹수가 보이는 만큼 키우면 후일 도움이 되겠지. 처음부터 잘 교육을 하며 국왕 폐하의 충실한 군인으로 양성해야겠다.’
박승환은 한국군 내에 중국인 병사들의 수가 상당수 있는 만큼 중국인 장교들도 일부 양성하여 지휘부에 합류시킬 생각이었다. 민족 간의 다툼으로 갈려 제 살을 깎아 먹기 전에 미리 그 간극을 메울 준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