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차 극동 전쟁 (2)
칭다오 항
“군항에 배치된 야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방어 준비를 해라. 절대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안 된다.”
“사령관! 저들이 저기서 항구를 포위한 채 어뢰를 쏴대면 함선들은 전부 하나 하나 침몰해버리고 말 것이오!”
“어차피 나가서 싸워도 지는 건 마찬가지잖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중에 인양하기 쉽게 군항에서 침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오.”
“……인양 비용은 나중에 청구할 것이오.”
‘멍청한 작자 같으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항구로 도망가던가. 이 작자 때문에 우리 독일 함대까지 같이 죽게 생겼군.’
청국 함대 사령관 이정신은 항구를 나가 일전을 벌이는 대신 출항을 불허한 채 군항 내부에서 말라 죽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 청군은 1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일본에 허무하게 칭다오 항을 내줬으며 원세개에게 가담한 청의 해군과 독일 아시아 함대에 속해있던 함선들은 전부 무력화되었다. 칭다오 항을 손에 넣고 제해권을 잡은 일본은 해안을 봉쇄
한 후 병력들을 차례로 상륙시키며 원세개의 후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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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외곽
“한국으로부터 최후 통첩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산둥 반도에서 전황에 관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차피 의미없는 통첩이다. 무시해라. 산둥 반도에서는 무슨 보고가 올라온건가.”
“……해군 사령관 이정신이 칭다오 항을 잃고 살아남은 해병들과 함께 육지로 퇴각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이정신, 그 병신 같은 놈은 고작 1달을 못 버틴단 말이냐! 아무리 우리 함대가 약화되었다 해도 그동안 해군이 쳐먹은 돈이 얼만데!”
해군이 무력하게 몰살되고 일본군이 산둥 반도에 상륙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들은 원세개는 곧바로 무기력했던 해군에 분노를 토했다. 그런 그를 부관인 단기서가 진정시켰다.
“진정하십시오, 각하. 청군과의 일전이 코앞입니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당장 후방이 위협받게 생겼는데!”
“산둥 반도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이 1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고 안휘에 남아있던 펑궈장이 병력을 모아 빠르게 산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하니 일본군이 쉽게 저희 뒤를 치진 못할겁니다. 그보다는 청군의 방어선을 뚫는 것이 급합니다. 한국군이 톈진에 곧 상륙할 예정이라 합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부관인 단기서의 말대로 이미 톈진까지 진군한 상황이라 여기서 병력을 뒤로 돌릴 수도 없었다. 일본군에 대한 방어는 소수의 독일군과 펑궈장에게 맡기고 빠르게 톈진과 북경을 점령하는 것이 원세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진 청조가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구축한 방어선을 뚫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
다.
“대장님, 원세개의 병력들이 톈진 외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각자 자리를 지켜라.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한가?”
“황실 친위대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팔기군들도 이번 전쟁에 자신들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전과 다르게 군기가 잘 지켜지고 있는 편입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곧, 한국군이 톈진에 상륙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수석 영시위내대신으로 임명되어 청의 전군을 통솔하게 된 장훈은 황실 친위대를 주축으로 남아있던 팔기군들을 소환해 방어선을 구축한 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청조의 주력 병력들이 전부 원세개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었기에 전력이 매우 부족했지만, 그는 한국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북양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톈진에 있던 영국군이 그들이 사용
하던 무기를 몰래 넘겨주었던 것도 장훈에게 큰 힘이 되었다.
“전군! 돌격!”
“와아아!”
한 북양군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천 명의 병사들이 총을 전방으로 겨누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팔기군의 한 수장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며 응전을 명했다.
“녀석들이 온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조금만 버티면 응원군이 도착한다! 여기서 밀려나면 우리는 다시 만주와 몽골을 유랑하며 살아야 한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서 싸워라!”
“황제 폐하 만세!”
“만주족이여 영원하라!”
군기가 엉망인 것으로 유명했던 팔기군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들 이를 악물고 북양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팔기군들은 전멸하기 전까지 전선을 끝까지 지켰다. 그들로서도 민족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었기에 모든 것을 걸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딴 방어선 하나 못 뚫는 거냐! 엉망진창인 팔기군이랑 의전만 챙기던 황실 수비대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전방에서 북양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작림은 부관들을 불러모아 호통을 쳤다. 원세개가 계속해서 빠르게 방어선을 돌파하라고 재촉하였기에 그는 몸이 달아 있었다. 수일 뒤 톈진에 상륙한다고 전해진 한국군도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죄송합니다, 장군. 하지만 적들도 악에 받쳐 저희를 막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합지졸이라 생각했던 팔기군들도 후퇴를 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를 지켜 돌파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듣기 싫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각자 맡은 구역을 돌파해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놈은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옛!”
장작림의 독촉을 받은 장교들은 큰 희생을 각오하고 병사들을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빠르게 톈진을 손에 넣어 한국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톈진이 완전히 손에 넘어가기 전에 한국군 1진이 톈진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사령관님, 청군 선박이 마중 나오고 있습니다. 걸린 기를 보니 청군 총사령관의 배 같습니다.”
“청군 총사령관이 선착장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마중 나오고 있다고?”
톈진 앞바다에 한국군 1진을 이끌고 도착한 양성환은 청군 총사령관 장훈이 자신들을 마중나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갑판으로 달려갔다. 견시수의 보고대로 대장기와 흰 기를 단 조그만 연안선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왜 여기까지 마중을 왔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어쨌건 간에 양성환은 해당 배가 자신이 탄 수
송선에 다가오도록 명을 내렸다.
“제가 파병된 한국군의 총사령관인 양성환입니다. 정말로 청군 총사령관인 장훈 대장이 맞습니까?”
“그렇소. 내가 청의 수석 영시위내대신이자 총사령관인 장훈이오. 이렇게 우리를 돕기 위해 와줘서 고맙소. 그런데 정말 미안한 말인데 혹시 상륙한 뒤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겠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륙을 마치고 병사들을 준비시킨 뒤 전선에 투입하려면 최소 수 일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좋지가 않소. 적들이 희생을 감수하고 연이어 돌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톈진이 넘어가기 직전이오. 한국군이 이번 달 내로 도착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톈진을 포기하고 북경으로 물러날 생각이었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은 주어야지요. 그리고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해야 어디에 병력을 투입해야 할지 결정할 것 아닙니까.”
“전황에 대해 이 자리에서 알려드리기 위해 참모진들을 다 데려왔소. 그리고 한국군이 상륙하는 대로 안내할 병사들도 선착장에 전부 준비시켜놓고 왔소.”
“…….”
“제발, 제발 부탁드리오.”
상륙하자마자 전투에 나서줄 것을 요청하는 장훈의 말에 양성환은 벙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군 역시 급한대로 상인들에게 배를 징발하면서까지 병사들을 데려왔기에 상륙한 뒤 다시 대열을 편성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양성환이 침묵하자 장훈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매달렸다.
‘같이 온 참모진들도 얼굴이 완전 꺼멓게 죽어있는 걸 보니 상황이 안 좋긴 안 좋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밀리고 있길래……’
“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한국군이 나서주지 않으면 저희는 후퇴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제발 저희를 구원해주십시오!”
장훈을 따라온 다른 참모진들도 무릎을 꿇고 양성환에게 애걸하기 시작하자 양성환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홍범도 참장, 내가 장훈 대장에게 설명을 듣는 동안 상륙 작전은 자네가 지휘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장군.”
홍범도에게 상륙 작전의 지휘를 맡긴 뒤 선실 안으로 들어가 브리핑을 받던 양성환의 얼굴은 바로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청군의 보고를 받던 다른 장성들의 얼굴도 벌레 씹은 것처럼 변했다.
“아니 지금 그쪽의 이야기대로라면 청군은 괴멸되기 직전인 상황이잖소!”
“그래도 적들도 그 이상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후방에서 진격하고 있다 하니 2번 정도만 적들의 돌격을 막아내면 저들도 물러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요? 지금 우리 선발진 병력의 수가 2만이 되지를 않는데 어떻게 10만에 달하는 적을 격퇴해내란 소리요!”
“……부탁드립니다.”
장훈의 말에 의하면 방어군의 주축을 이루던 황실 친위대는 전력이 절반 밑으로 떨어져 부대를 재조직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웠고 팔기군들도 벌써 3개의 깃발이 꺾인 상태였다. 끊임없는 적들의 파상공세로 방어선은 와해되기 직전이었지만 병사들은 한국군이 온다는 희망 하나만 가지고 악으로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명을 들은
양성환은 처참한 아군의 상황에 갑갑했지만 이미 전쟁에 참여한 이상 어떻게든 극복해내야 했다.
“젠장할. 칼레딘 장군,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 북양군을 톈진 외곽으로 몰아내는 것이 우선인 것 같소. 아무래도 정예 병력을 투입해야할 것 같은데 러시아 의용군이 먼저 나서줄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전황이 좋지 않은 만큼 저희가 나서는 수 밖에 없겠군요. 대신 기병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 말들을 우선적으로 내려주시지요.”
“알겠소.”
러시아 의용군 대장 알렉세이 칼레딘은 톈진에 상륙한 뒤 곧바로 코자크 기병들만 먼저 추려서 정렬시켰다.
“제군들, 우리 코자크 기병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됐다! 그동안 한국에서 잘 먹고 노느라 피둥피둥 살이 찐 허벅지 살 좀 빼야 되지 않겠나?”
“맞습니다, 하하.”
“흐흐, 명령만 내려주시지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코자크 기병들은 그동안 브루실로프의 혹독한 훈련에 굴려지며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다고 한국 정부에서 급료도 두 배씩 올려줬기에 사기도 충천해 있었다.
“가자! 저 허수아비들에게 우리가 세계 최고의 기병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도록 하자!”
“끼-하!”
“우라! 우라!”
“이히하!”
칼레딘의 신호에 따라 코자크 기병들은 괴성을 지르며 소총을 겨누고 무질서하게 톈진으로 진입하고 있던 북양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