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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순종하지 않는다-4화 (4/130)

4화. 분란 조장 (3)

“러시아가 그만한 돈을 대한제국에 빌려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영국 공사 존 조던은 펄쩍 뛰었다. 재정궁핍으로 시베리아 철도도 프랑스에게 겨우 원조받아 지은 놈들이 극동의 소국에 100만 파운드나 그것도 무상으로 투자한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저 황태자가 러시아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를 팔아넘기지 않는 이상 나오기 어려운 액수였다.

‘아니 잠깐, 군대 진주까지 요청했다면 진정으로 이 인간은 한국을 러시아에 팔아버린 것인가?’

조던은 황태자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척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고 자신이 요청한 내용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듯 했다.

‘차라리 일본 놈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자. 한국의 황태자가 돈에 나라를 팔아버릴 수 있는 이라면 일본에게 못 팔 이유는 어디있단 말인가?’

“제가 주선을 할테니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리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동일한 조건이라면 일본은 기꺼이 차관을 공여할 것입니다.”

“일본은 안되오. 황제 폐하 뿐만 아니라 조정의 모든 신료들이 일본에 대해 거부감이 매우 크오. 일본군이 한성에 진주한다면 나는 황태자 자리를 잃고 황위를 차지하기도 어려워질 것이오.”

“그래도 한번 이야기는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본이 러시아에 비해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입니다. 어쩌면 군대의 진주 없이도 돈을 빌려줄 것입니다.”

“흐음…… 공사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내 한 번 만나볼 의향이 있긴 있소만. 러시아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할 것이오. 대한제국 뿐만 아니라 내게도.”

확실했다. 눈 앞의 조선 황태자는 돈과 권력 앞에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 작자였다. 존 조던은 곧바로 일본 공사에게 가서 황태자의 뜻을 전하겠다고 한 뒤 궁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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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찬정, 요새 잘 지내고 계시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불경한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선조들께서 도우신 덕분에 무사하오.”

이척은 외척인 민씨 가문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민영익을 만나고 있었다.

“찬정, 내가 이번에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려 하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외국 공사들을 만나고 다니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지요. 허나 지금 협상이 쉽지가 않소. 아무래도 군대 진주 없이는 차관을 받기 어려울 것 같소이다.”

“……군대 진주는 황제 폐하와 내각의 대신들이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경께서 나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민영익은 이척에게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외국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로 삼가야 할 일이었다. 자신의 고모가 비명에 간 것도 결국 일본군이 한성에 들어와서이지 않았는가.

“내게도 생각이 있소. 지금 내가 만나는 외국은 러시아와 일본인데 양 측의 군대 모두를 끌어들일까 하오.”

“둘을 같이 끌어들이면 분명히 충돌이 일어날 것이고, 충돌이 일어난다면 이 나라의 백성들만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재고해주시지요 황태자 전하. 이 나라를 전장으로 만드시는 일이십니다.”

이척은 이 때가 승부수를 던질 때라고 느꼈다. 민영익이 썩 믿음직스러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최후까지 일본에 빌붙어 살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짐작한다면 줏대없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경을 믿고 내 생각을 말해도 되겠소?”

“……말씀하시지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경은 이 방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소.”

그 말과 함께 이척은 방에 걸려있던 칼을 향해 걸어갔다. 내관은 미리 내보낸 상태였기에 방 안에는 둘만 있었다. 이척이 칼을 빼어들자 민영익은 황당한 기색이었다.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민영익의 물음을 뒤로 하고 이척은 칼을 겨누었다.

“경이 내게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경을 벨 수 밖에 없소. 그 정도로 중한 이야기요.”

“진정하시고 말씀을 먼저 하시지요 황태자 전하. 어떤 이야기를 하시건 간에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좋소. 나는 일본과 러시아를 충돌시킬 생각이오. 그것도 이 한국 땅에서!”

민영익의 표정은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당연했다. 황위를 이을 황태자가 자신이 다스릴 나라에서 두 열강을 충돌시키겠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전하,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하셨다간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고난을 겪겠습니까. 방금 들은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방법 밖에 없소. 일본이 더 이상 이 강토를 잠식하기 전에 꺾어야 하오. 독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독을 들이켜야 하오.”

이척은 민영익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한국에 야욕을 갖고 있는 이상 둘은 한 번 싸울 수 밖에 없다. 상황에 끌려가느니 우리가 먼저 나서 충돌을 유도하고 러시아의 승리를 비밀리에 돕는다면 결국 국력이 부족한 일본은 패배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는 영국이 나설 것이다 라는 논리를 펼치자 민영익은 점차 설득되었다.

“허나 전하, 승리한 러시아가 한국을 무력으로 병합하려 하면 어찌합니까.”

“그렇게 되지 못하게 다른 열강들을 끌어들일 생각이오. 그리고 내년에 청에 난리가 나서 다른 나라들이 병력을 파견할테니 러시아도 그 압박을 쉽게 이겨내지 못할 것이오.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 했소. 나를 도와주실 수 있겠소?”

“……사실 지금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이야기를 못들은 것으로 하고 묻어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말대로 일본과 러시아가 이 땅에 야욕을 갖고 있는 이상 결국에는 한 판 붙겠지요. 그럴 바에는 전하의 뜻대로 저희가 먼저 둘의 충돌을 유도하여 열강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나라가 전쟁터가 된다면 굉장히 혼란스럽고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것인데 그것이 우려스럽습니다.”

“어쩔 수 없소. 그리고 그 혼란상을 틈타 나는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 유림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이오. 환상 속에 사는 이들이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다면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겠지. 한국에는 강한 충격이 필요하오. 이 시대가 철과 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충격이!”

“…….”

민영익 역시 보수 유림에 밀려 개혁에 두 번이나 실패했던 만큼 이척의 말에 공감했다. 이척의 방안이 과격하긴 하지만 작금의 한국은 과감한 방법이 아니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웠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도 전하의 생각에 동의하셨습니까?”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소. 아바마마의 성정 상 채택하기 어려운 의견이오. 허나 아까 말했듯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고 나는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진 않소.”

민영익은 이척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전의 유약하던 황태자가 아니었다. 대관절 독살 시도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 모르겠지만 황태자의 눈에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과거 자신이 김옥균을 비롯한 이들에게 봤었던 그런 눈빛이었다.

‘저런 눈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든 일을 일으키지. 반대하다 괜히 저번처럼 칼맞느니 한 번 황태자의 의견을 따라가보자.’

“……소신 황태자 전하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허나 너무 위험하게 일을 진행하시면 안될 것입니다.”

“고맙소. 우선 나는 차관을 미끼로 일본과 러시아 양국의 병사들을 끌어들일 생각인데 조정을 설득해주시오. 아버님은 내가 설득하겠소.”

“알겠습니다 전하.”

민영익은 이척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약하시던 분이 저렇게 급변하시다니.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이 나라가 크게 변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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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영국 공사 조던이 저희에게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라고 가토 공사를 통해 전했습니다.”

“필요한 액수가 대관절 얼마라 하오?”

“엔화로 300만 엔이랍니다. 그와 함께 고문들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끄응. 300만 엔이면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적은 액수도 아니군.”

가토의 전보를 받은 일본 내각은 고심에 빠졌다. 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려 하는 대한제국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본인들의 생각에는 한창 만주 개척에 바쁜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300만 엔이나 빌려줄 가능성은 낮아보였지만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가 적은 액수나마 차관을 공여한 일이 있기에 가능성이 아예 없으리라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 군의 진주는 막아야 하오.”

육군상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 군의 진주만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추후 러시아와 충돌이 일어날 경우 한반도에 러시아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면 전략적으로 굉장히 불리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오. 영국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러시아의 야욕을 막아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우리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해준 지가 고작 몇 달 전인데 합의를 파기하려 하다니.”

이토 히로부미도 야마가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한국이 필요한 자본과 고문들을 우리가 보내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러시아군이 진주할 명분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병력을 보낼 생각도 충분히 있소. 어차피 1개 사단 정도면 황실 일가는 충분히 호위하고도 남을 것이오.”

일본 내각은 어떻게든 러시아 군의 한반도 진주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척과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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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대신 이홍장은 부관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러시아가 한국에 군대를 진주시키려 한다고?”

“한국의 황태자가 러시아 공사에게 요청을 했고 러시아는 얼씨구나 하며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일본도 지금 황태자와 꾸준히 접촉 중인 모양입니다.”

“한국의 황태자는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인 것인가?”

이홍장은 어이가 없었다. 한 나라의 황태자라면 자국에 외국의 군대를 진주시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터였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직 상황 파악이 어렵습니다. 다만 황태자 개인의 생각일 뿐이고 내각과 한국의 황제는 반대한다고 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자국에 외국 군대의 진주를 자발적으로 요청하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나.”

“그래도 저희도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러시아 군의 파견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냅두게. 우리가 나서기 전에 일본과 영국이 나서겠지. 우리는 저 의화단이라 자칭하는 반도들을 토벌하는 데 집중하세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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