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 패스 하셔도 됩니다.
“이번 협상은 그럼 이렇게 종결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본과 협상을 하고 나오던 대한민국 외교부 과장 이일척은 피로한 기색으로 협상장을 나왔다. 식민지 시절 있었던 강제 징용에 관한 협의는 지루한 협상 끝에 정부에서 자신에게 양보를 지시하며 일본 측의 승리로 끝났다.
“망할 자식들, 조금 더 버티면 되는 것을…….”
일척은 협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공무원인 이상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협상 결과가 공표되면 분명 여론이 안 좋아질 게 뻔하다고 상부에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위에서는 미국이 빠른 합의를 원하니 일본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협상 결과가 발표되자 국내에서 반발여론이 들고 일어났다.
“이 과장, 미안하네. 자네가 책임을 져야겠어.”
“…….”
“잠시만 기다리면 곧 다른 보직으로 발령 내주겠네.”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대통령은 외교부를 질책했고 외교부 장관은 그 책임을 휘하 관료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관료들은 다시 밑의 사람들을 타박하며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엔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온 것이었다.
“개자식들, 지들이 뒤로 받아 쳐먹어놓고 나한테 책임을 덮어 씌우다니.”
“어쩌겠냐. 빽없는 우리들의 설움이지.”
친구랑 같이 술마시는 자리에서 일척은 분노를 토했다. 분명 자신이 명문 대학 출신이 아닌 한미한 학교 출신이고 든든한 배경이 없어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일 터였다. 어쩌면 정치외교학과가 아닌 사학과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먼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듣긴 했지만 사실상 쓸모없는 배경이었다.
“이제 그만 가자. 더 이야기해봐야 뭘하겠냐. 막차 끊기기 전에는 타러가야지.”
“그래. 어어, 일척아 조심해! 저 미친 새끼!”
“응? 뭐가?”
빠아앙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귓가로 울리는 경적소리를 뒤로하고 일척은 의식을 잃었다.
“황태자 전하, 의식이 드시옵니까?”
“으음……”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뒤로하고 일척은 서서히 눈을 떴다. 눈에 빛이 들어오자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긴 병원인가요?”
“황태자 전하, 천만 다행입니다.”
‘황태자? 요새 시대가 어느 땐데? 그리고 왜 나한테 황태자라 부르지?’
의사처럼 보이는 사람과 노란 머리를 한 서양인이 자신의 옆에 서 있었는데 흔히 보던 흰색 가운이 아닌 굉장히 구시대적인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의문을 갖고 물어보려는 찰나 머리가 아팠다.
“크으으, 머리가 너무 아파요.”
“전하,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일척은 몰려오는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전하,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