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330화 (330/354)

제330화

그건 커다란 탑이었다.

언뜻 보면 쐐기와 비슷해보였지만 달랐다. 쐐기처럼 위에 얹고 있는 암반도 없었고 거꾸로 박혀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규모가 큰 탑에 불과했다.

달에 있지만 않았다면 그저 예쁜 관광지 정도로 인식 가능한 정도의 건축물.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뿐인, 그저 그런 탑 같았다.

하지만 달이라는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그 탑을 받치고 있는 지반이 그 탑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개미굴 표본 같군요.”

성윤은 예전 어떤 TV프로에서 봤던, 개미굴에 밀랍을 부어넣어 만든 표본을 떠올렸다.

“대미궁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장의 말에 사람들이 조금 더 신중하게 사진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보니 암스트롱과는 다른 대미궁이 있던 자리로군요. 대미궁 자체가 지면을 뚫고 나온 겁니까?”

사진 옆에 떠 있는, 사진을 찍은 위치를 표시해놓은 지도를 본 러셀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쐐기를 둘러싸고 있는 피의 그물 또한 암스트롱 아래 이 있는 대미궁까지 파고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놈들, 대미궁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시장은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스크린에 떠 있던 사진이 사라지고 다른 사진이 나타났다.

“피의 그물은 이 녀석과 반응해 달의 궤도를 뒤틀었다고 여겨집니다.”

“저건 뭐야?”

“지구 같은데? 지구에 저런 게 있었나?”

연결자들이 사진을 보고 웅성거렸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성윤은 사진에 찍힌 장소를 알고 있었다. 잊을 수 없었다.

“제가 케이빌과 싸운 장소로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성윤에게 쏠렸다.

“맞습니다. 성윤 씨가 케이빌과 마지막으로 싸웠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또한 케이빌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케이빌과 싸울 때는 저런 건 없었습니다만….”

성윤과 케이빌의 전투 장소는 전투의 여파 때문에 무척이나 황폐해져 있었다. 특히 불꽃을 다루는 케이빌의 특성상 장소 자체가 새까맣게 타 있었다.

하지만 온통 검은 재로 뒤덮인 지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치 불꽃을 감아 올린 회오리 같았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에너지가 회전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피의 그물이 쐐기에 감싸인 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것 또한 달의 궤도를 틀어버린 의식의 일부겠죠.”

“끌려들어가는 건 마력입니까?”

성윤이 사진 한 곳을 가리켰다. 붉은 회오리 안으로 허공에서부터 천천히 흘러드는 빛이 있었다.

토네이도에 끌려 들어가는 물건들처럼 그 빛은 천천히 붉은 회오리에 먹히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쐐기에서 보내는 마력 일부가 허공에서 분산되지 않고 저 회오리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달에서 지구로 보내지는 마력을 통해 지구와 달의 의식이 연결된 것 같군요.”

“저희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게 지구와 달을 끌어당겨 달의 공전 궤도를 비튼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우두고스는 케이빌과 글라이아의 죽음은 유용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저런 뜻이었군요.”

성윤은 입맛이 썼다. 모든 게 녀석의 뜻대로 된 것 같았다.

“제거는 못 합니까?”

“나라에서 저걸 없애려고 여러 시도를 해봤습니다만, 피의 그물과 똑같았습니다. 일절 통하지 않더군요.”

과연 케이빌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할까. 그렇게 쉽게 없어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탑에 가 볼 수밖에 없겠군.”

러셀이 중얼거리자 시장이 다시 탑의 사진을 띄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루엘 씨의 말처럼 지구와 달을 충돌시키지 않을 만한 방법을 녀석들이 갖고 있다면 여기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아니, 솔직히 여기밖에 짐작 가는 곳이 없기도 하고요. 그래도 확실히 이곳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시장이 사진을 확대했다. 탑을 받치고 있는 대미궁 주위로 상당한 수의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렇게 죽여댔는데도 벌써 저 만큼이나 회복한 거야?”

정말로 몬스터의 그 물량 공세엔 질려버릴 수밖에 없는지 브루스가 진저리를 쳤다.

산 넘어 산이라는 걸까. 결코 적지 않은 몬스터들의 숫자에 사람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몇몇은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그래, 그렇겠지.’

시장은 이해했다. 그 자신도 미칠 지경이 아니던가.

힘든 암스트롱 방어전을 다 이겨놨더니 그건 적들의 함정이었고 그 때문에 인류의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거기에 유일한 희망, 아니 희망이 아닐까 생각되는 불확실한 것을 쟁취하려면 또 지긋지긋한 몬스터들과 싸워야 하다니.

절망과 한탄에 몸서리칠 만했다.

하지만 오히려 성윤은 그 광경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 뭔가 중요한 게 있으니 거기를 방어하고 있겠지.’

그게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희망만 있다면 성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전진할 생각이었다.

그의 가족을 위해서.

“언제 돌입할 겁니까?”

시장이 잠시 성윤을 바라봤다. 성윤의 표정은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처럼 절망과 한탄에 찌들지는 않았다.

“성윤 씨는 의욕이 가득하시군요.”

“길이 있을 수 있다면, 일단은 들이대 봐야죠.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말이죠.”

절망이라면 이미 질릴 만큼 경험해 봤다.

아니, 절망의 강도로 따지면 오히려 미연과 재호에게 배신당했을 때가 더 컸다.

그때는 정말 희망의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과연 나이트. 그런 의욕은 무척 좋습니다.”

이 암담한 상황에서 희망이라고는 무척 옅은 가능성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성윤이 의욕을 내기 시작하자 분위기도 조금씩 살아났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야. 이 와중에도 투지를 잃지 않다니.’

여기 모인 한 명 한 명은 전부 역전의 용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궁을 쏘다니며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연결자, 그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패배와 죽음 정도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가 위험한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짙은 절망의 향기가 주변에 아른거렸다.

전장에서 분위기는 중요하다. 사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기가 떨어져 패배하는 일이 역사에서는 비일비재했다.

‘어떻게 분위기를 뒤집을지 고민했었는데.’

지구의 미래를 지킬 사람들의 사기가 저해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시장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 본인부터가 사기가 저해된 상태라 도무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윤은 말 몇 마디로 인해 분위기를 바꿨다.

‘실적과 신뢰의 결과겠지.’

다른 노련한 연결자들과 비교해 성윤이 연결자가 된 시간은 짧다. 하지만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들은 그의 행동에 믿음을 심어줬다.

‘물론 칭호의 덕도 있겠지만.’

나이트. 시장을 포함한, 이른바 높으신 분들이 일반인들에게 연결자들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선전용으로서 널리 퍼뜨린 칭호다.

하지만 지금 그 이미지는 일반인들을 넘어 연결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시장은 어느 정도 열기가 올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연결자들을 바라봤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슬슬 얘기를 해야 했다.

“흠! 흠!”

시장은 헛기침을 해 시선을 모았다.

“일단 우리도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연결자분들이나 군인들도 조금 더 휴식을 취해야 하고, 소모한 탄환 같은 것들도 보충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끄는 것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러셀 경. 달이 지구에 떨어지기 전이라도 달이 지구에 가까워지는 것만으로 지구에는 대재앙이 몰아닥치기 시작할 거니까요.”

“혹시 그레노이드의 부활은 정확히 언제쯤일지 추측 가능합니까?”

브루스가 물었다.

하지만 시장은 안색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봉인의 메커니즘도 모르는 인류가 봉인이 깨지는 시간을 알 턱이 만무했다.

“일단 달이 지구에 충돌할 시기가 두 달쯤 후니 그 안에는 깨어나지 않겠나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죠.”

“웬만하면 그레노이드가 깨어나기 전에 일을 끝마치는 게 좋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탑의 진입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진행할 예정입니다.”

“준비는 얼마나 걸립니까?”

“일주일. 일주일 뒤에 탑에 돌입하겠습니다.”

시장이 선언했다.

***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흩어졌다.

성윤은 자신의 파티와 러셀, 브루스, 플루엘, 아루원 그리고 시장과 함께 움직였다.

자의는 아니었다. 시장이 그들을 부른 것이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시장실에 들어온 후 브루스가 물었다.

“일단 앉으세요.”

시장이 시장실 안에 있는 소파에 사람들을 권했다.

사람들은 소파에 앉았다. 좋은 소파는 아니었다.

암스트롱을 되찾고 암스트롱의 방위력을 끌어올리는 것에만 총력을 다한 터라 지구에서 좋은 가구 따위를 가지고 올 여유는 없었다.

암스트롱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소파 몇 개를 주워와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암스트롱의 시장실에 있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시장에 대한 신뢰감을 올렸다.

“이번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죽은 건 알고 계실 겁니다.”

“당연하죠. 우리가 처리한 몬스터들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에 팀이 의아하게 물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처리한 몬스터죠. 그 몬스터들에게서 월석과 디바이스, 젬들을 확보했습니다.”

“아!”

에밀리가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도 에밀리의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것 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군.”

“그러게 말이야. 애초에 우리가 연결자 짓을 하던 이유도 그것들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러셀, 브루스가 말한 것처럼 연결자들은 전쟁에 정신이 팔려 그들이 원래 연결자가 된 목적인 그것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거라도 나왔습니까? 나온 월석은 비상용으로 지구에 쌓아 두고, 디바이스나 젬들은 일단 암스트롱에서 회수해서 다른 연결자들의 전력 강화를 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미 암스트롱 탈환전 때 얻은 것들도 그렇게 처분했다.

인류의 승리를 위해 고위 연결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물론 이미 그들이 갖고 있는 디바이스와 젬들이 최상급이란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 많은 몬스터들이 죽은 와중에도 최상위 연결자들이 쓸 만한 디바이스나 젬들은 얼마 없었던 것이다.

“이번엔 상당히 좋은 것들이 나온 건가요?”

“맞습니다, 플루엘 씨.”

시장은 탁자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건…!”

그레이스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온갖 젬들을 보고 가져왔을 러셀, 브루스도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이 전부 놀란 가운데 시장이 말했다.

“이번에 나온 다이아 랭크의 젬입니다.”

쥬얼 1등급. 최고 랭크를 자랑하는 젬.

그것이 하나도 아니고 총 세 개가 시장의 책상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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