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그럼 저 피의 그물은 의식의 결과물이겠군.”
성윤의 걱정 속에서도 러셀의 정보 끌어내기 용 도발은 계속됐다.
“그렇다.”
“쓰레기들의 힘을 제물로 받쳐봤자 별로 대단한 의식은 치르지 못할 것 같은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지.”
“클클클클!”
우두고스는 웃었다.
조롱과 경멸이 가득 배어 있는 웃음.
연결자들에겐 무척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분명했다. 불길한 기분은 덤이었다.
“어떻게든 내게서 정보를 캐려 하는 모습이 가상하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군. 하긴, 미천한 것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떤 방법이든 총동원해야겠지. 걱정 마라. 케이빌이라면 비웃었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그 발버둥을 높이 평가한다.”
‘역시 알고 있었나.’
성윤의 등허리가 섬뜩해진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응? 과대망상도 그 정도면 수준급인데? 정신 병원에 잘 아는 의사가 있는데 소개라도 시켜주랴? 아, 실력은 의심하지 마. 아무리 돌팔이라도 미궁 속에 처박혀서 빈둥대던 너희들보다는 훨씬 더 유능한 자일 테니까.”
러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도발을 이어갔다. 역시 노련했다.
하지만 상대도 음습하기로 따진다면 최고 수준에 있는 우두고스였다.
“노력하는구나. 그래그래. 뭐 하나 나을 것 없는 저능한 존재라면 그렇게 발버둥이라도 열심히 쳐야하는 법이지. 네 눈물겨운 노력을 생각해 내 친히 몇 마디 해주지.”
그리고 우두고스는 느릿하게 말했다. 마치 연결자들의 반응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즐겨주겠다는 듯이.
“노력은 가상했다만, 너무 늦었다. 이미 의식은 완성됐어. 지금 나를 죽여도 변하는 건 없다. 뭐, 죽어줄 생각도 없다만. 그러고 보니 결과도 슬슬 나타날 때가 됐지.”
우두고스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뚝!
계속해서 발밑을 흔들던 지진이 멈췄다. 연결자들이 두리번거렸다. 기분 나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우두고스의 기꺼운 목소리가 비집어 깨뜨렸다.
“시작됐군.”
연결자들이 일제히 경계레벨을 최고로 올렸다. 매와 같은 눈을 이용해 몇몇은 우두고스와 그 주변 몬스터들을 감시했고 다른 이들은 주변 상황을 훑었다. 아무런 훈련도 작전도 없이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그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노련한 연결자들인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아무 일도 없는데?”
땅이 꺼지지도 않았고 우주가 내려앉지도 않았다. 몬스터도 그들의 눈앞에 있는 소수의 무리가 전부였다.
속인 건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무언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이트. 변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저 저 녀석의 허세일 뿐인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이름 모를 연결자가 말했다. 하지만 성윤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뭔가 변했어요.”
그것도 무척 기분 나쁜 쪽으로 변한 것 같았다.
성윤의 말을 들은 연결자들이 다시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황폐한 달의 모습뿐이었다.
“뭔가 착각한 거 아….”
“아니. 나이트의 말이 맞아. 뭔가 변했어.”
브루스가 땅을 몇 번 밟으며 말했다. 그 외의 몇몇도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천한 놈들 중에서도 그나마 눈치 있는 놈들이 있군. 아니. 다른 놈들이 너무 무능한 것뿐인가? 이건 순전히 호의로서 건네는 충고다만, 무능한 것들은 지금 당장 자살하는 것이 좋을 게다. 그런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건 고통밖에 없을 터. 지금이라면 내 자비를 베풀어 도와줄 수도 있다.”
우두고스의 몸에 옅은 어둠의 기류가 살짝 흘렀다.
“헛소리하지 말고 뭔 짓을 했는지 빨리 불기나 해.”
러셀이 다시 말을 걸었다. 여전히 우두고스의 성질을 긁어대는 말투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어조에 자그마한 초조감이 엿보였다.
그에 비해 우두고스는 느긋하기만 했다.
“연기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그게 설령 헛고생이라도 말이야. 노려보진 말거라. 내가 언제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고 했더냐. 내 저능한 너희들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던 성윤도 성질을 긁던 러셀도 당장 우두고스를 후려팰 것만 같은 브루스도 다른 연결자들도 모두 지금만큼은 우두고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플래노트 놈들의 계획은 괜찮았다. 달에서 마력을 전부 빼내 주인님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다니. 거기에 주인님의 봉인은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말이야.”
적이지만 존경한다는 것일까. 우두고스의 말투에는 분명 짙은 경탄이 어려 있었다.
성윤 일행을 보고 이죽이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지만 그래 봐야 미천한 것들의 머리굴림이지.”
역시나 우두고스는 우두고스였다.
“탑에 약간의 세공을 가했다. 탑은 여전히 마력을 지구로 보낼 게야. 내가 직접 탑에 들어가 오랜 시간 조정을 하지 않는 이상 그걸 막을 순 없지. 하지만 달에 있는 마력은 달라. 앞으로 달 내부에 있는 마력은 탑이 지구로 보내는 마력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미궁 밖으로 새어나올 거다. 뭐, 그와 함께 미궁의 공기가 달 바깥으로 새기 시작한 것 같다만, 그거야 알 바 아니지. 네 놈들에게는 좋지 않나? 마력의 영향 덕분에 공기가 우주로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까.”
‘그 때문에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거군.’
성윤은 힐끔 자신의 팔을 내려다 봤다. 짙은 마력이 그의 피부를 계속해서 스치고 지나갔다.
“대미궁을 제외한 다른 미궁들은 각자 마력을 흘려보내며 주인님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흐르는 마력 자체가 바깥으로 새어나간다면 그 효력도 떨어지는 법. 플래노트의 자손들이 만들어낸 증오스러운 미궁의 봉인 효력은 새어나오는 마력에 비례해 약해지겠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연결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레노이드의 봉인이 풀리는 시기가 빨라지겠군.”
“정확하다!”
성윤의 중얼거림에 우두고스는 기꺼운 목소리로 외쳤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최대한 많은 마력을 지구로 보내려 했겠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다! 주인님께서 깨어나실 때, 달에는 주인님께서 만족스럽게 힘을 휘두르실 수 있는 충분한 마력이 존재할 터! 그럼 네 녀석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
“그게 의식의 결과라는 거냐.”
“클클! 그렇다! 이래도 별것 아니라고 주장을 할 셈이냐?”
우두고스는 러셀을 비웃었다.
“하지만 너희는 잘 싸웠다. 그 덕에 오래 전, 플래노트와 싸울 때조차 잃지 않았던 간부를 둘이나 잃어야 했지. 주인님께서 봉인되어 계신 이유 때문이다만, 너희들의 노고가 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자들에게 고작 선물 하나만 주면 쓰나.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한 가지 선물을 더 준비했다.”
“또 뭔가 있나?”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놓지. 걱정은 하지 마라. 곧 알게 될 테니.”
“그 선물 두 개가 의식의 결과의 전부인가?”
“그렇다.”
러셀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성윤이 바로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호쾌한 소리가 울렸다. 우두고스와 몬스터들 아래에서 솟아난 돌기둥이 우주까지 쏘아질 듯 튀어 나왔다.
다른 연결자들도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더 이상 정보를 끌어낼 이유가 없으니, 바로 우두고스를 퇴치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반기는 건 허물어진 돌기둥과 그 위로 나타난 푸른 포털이었다.
“너희들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너희들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이만 물러가지.”
“도망가는 거냐!”
브루스가 소리쳤다.
“크흐흐! 글라이아나 다른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잔뜩 소모한 네놈들을 상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개인적인 생각까지 막을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네놈들이 또 다른 선물을 깨달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보지 못한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울 뿐이다.”
우두고스는 포털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절망해라, 인간들이여.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네놈들의 무력감을 처절히 느껴라.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죽음 대신 내리는 벌이다.”
“개소리!”
우두고스에게 접근한 브루스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우두고스는 포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훅!
포털이 사라졌다. 브루스의 건틀릿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남은 건 사방을 에워싼 돌기둥과 돌기둥이 박살나 나뒹구는 커다란 돌덩이들뿐이었다.
“빌어먹을!”
쾅!
브루스가 서 있는 돌기둥을 후려쳤다. 돌기둥이 부서지며 쓰러졌다.
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일 뿐. 이미 우두고스는 사라져 있었다.
“우두고스를 놓쳤습니다, 시장님.”
보고를 하는 러셀의 허탈한 목소리가 울렸다.
***
일행은 다시 암스트롱으로 돌아 왔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연결자들은 아직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모를 2차 공세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연결자들은 힐끔힐끔 쐐기, 아니 쐐기를 감싸고 있는 피의 그물을 쳐다봤다.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가 않네.”
브루스가 한숨을 쉬었다.
대규모 몬스터 습격을 막아내고 승리의 감정을 만끽하던 조금 전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같았다.
“이긴 게 아니니까. 그놈들은 이길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어. 몬스터들을 죽여서 의식을 치르는 게 목적이었을 뿐이지. 겸사겸사 우리 전력도 깎아내고 말이야. 그놈들의 목적은 성공했고, 그레노이드의 봉인이 풀리는 시기는 빨라졌다. 우리가 완전히 당한 거야.”
설명을 하면서도 러셀은 입이 무척 썼다.
“그놈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였다.
“우두고스가 말한 두 번째 선물이란 게 대체 뭘까요?”
아까부터 쭉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성윤이 입을 열었다.
러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놈들이 하는 일인 만큼 돼먹지 않은 일이란 건 분명할 테지만, 자세한 건 닥쳐봐야 알겠지.”
“두 번째 선물 운운부터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이야.”
그들은 시장의 명령에 따라 잠시 전장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기본적인 경계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암스트롱 안으로 철수시켰다.
‘일단은 끝났군.’
찝찝한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의 전투는 끝이 났다.
강력한 전력을 빨리 보충하고 싶은지 시장은 성윤을 포함한 고위연결자 대부분에게 먼저 휴식을 명령했다.
육체적인 피로는 적더라도 정신적인 피로는 상당히 쌓여 있는 터라 이기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성윤은 그 명령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할까.’
성윤은 일단 머리를 비우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그는 빠르게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 성윤은 잠시 동안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시장이 알려온 사실은 성윤의 잠시간의 평온을 삽시간에 박살냈다.
“…뭐라고 하셨죠?”
못 들은 게 아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을 뿐.
하지만 시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자신의 의무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성윤이 듣기 싫은 말이 다시 한 번 흘러 나왔다.
“달의 궤도가 바뀌어 지구로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두 달 안에, 달이 지구에 추락할 거랍니다.”
그건 지구 멸망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