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327화 (327/354)

제327화

암스트롱 위에 떠 있던 피의 그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파리의 촉수처럼 느릿하게 흐느적거리는 모습과는 다르게 그 이동 속도는 무척 빨랐다.

‘어디로 이동하는 거지?’

성윤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피의 그물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갔다.

암스트롱을 벗어난 피의 그물은 무언가를 향해 똑바로 움직였다. 그것은 쐐기였다.

‘목적은 쐐기인가!’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쐐기로 간신히 지구로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고 있는 상황이다.

쐐기에 이상이 생긴다는 건, 다시 지구가 몬스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막아야 해!’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우두고스를 죽여요!

시장도 피의 그물의 움직임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가 발작하듯 외치는 음성이 통신기를 타고 날아왔다.

성윤과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두고스라고 추측되는 존재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거리가 얼마나 되는 거지?’

직선거리로 대략 30km는 되는 거리다. 중간중간 고저차가 있는 지형도 있어서 거리는 더욱 멀 것이다.

도보로 30km 이상. 물론 연결자들이 고생할 만한 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도달 시간.

‘우리가 우두고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저게 쐐기에 도착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이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포털도 열지 못해!’

포털은 어디까지나 성윤이 가보았던 곳밖에 열 수 없다.

지금 태블릿에 찍힌 지점은 성윤이 가본 적이 없는 곳. 그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발을 재촉하는 게 전부였다.

***

성윤과 그 일행이 우두고스가 있은 곳으로 열심히 뛰어갈 무렵. 이미 피의 그물은 쐐기에 근접해 있었다.

연결자들의 무기와 마법도, 암스트롱에서 쏘아대는 마나나이트 탄환도 통하지 않았다.

피의 그물이 쐐기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쐐기를 낚으려는 것처럼 쐐기 주변을 빙 둘러쌌다.

땅을 긁으며 움직이던 그물의 아랫부분은 땅을 파고들었다. 깊이. 더 깊이.

그물을 이루고 있던 핏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비례해 그물의 면적은 점점 넓어졌다.

최종적으로 그물을 이루는 핏줄기는 아주 가늘어졌지만 그물은 쐐기의 높이에 근접할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핏속에 머물던 마력이 활동을 개시했다.

쐐기가 워낙에 거대하고 피의 그물도 면적이 상당히 넓어진 터라 성윤 일행도 그걸 모두 볼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누군가 외쳤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욕할 만하지.’

성윤도 지금 온갖 쌍욕을 내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들리지도 않을 달에서 욕을 하는 건 헛고생…!’

성윤은 급히 욕을 내뱉은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욕을 내뱉은 당사자도 크게 놀랐는지 달리는 폼이 흐트러져 있었다.

“잠깐 멈춰!”

앞에서 달리던 러셀이 크게 소리쳤다. 일행은 자리에 멈춰 섰다.

“…확실히 명령이 들린 모양이군.”

“평소 같았으면 벌써 망령이 들었냐면서 한마디 해줬겠지만.”

브루스가 러셀의 옆에 다가오면서 팔을 붕붕 흔들어댔다.

“확실해. 공기가 있어.”

성윤도 러셀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의 팔에 분명한 기류가 느껴졌다. 마력의 흐름이 아니다. 피부 감촉을 스치는 그것은 확실히 공기의 흐름이었다.

“아직 지구처럼 풍부하진 않군.”

그 때문에 눈치 채는 게 늦었다. 공기의 농도가 낮기 때문인지 솔직히 사람들의 말도 무척이나 작고 어눌하게 들렸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건 전적으로 연결자의 좋은 귀 덕이었다.

성윤이 주변을 둘러 봤다. 근처에 미궁 입구 하나가 보였다.

“달에 공기가 있는 곳은 미궁뿐입니다. 미궁에서 새어나오는 걸까요?”

“당장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러셀도 성윤과 같이 미궁의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시선을 쐐기 쪽으로 돌렸다.

“저 쐐기를 감싼 피의 그물 때문인가.”

“그것밖에 후보가 없잖아.”

브루스가 거칠게 침을 뱉으며 동의했다.

“러셀 씨, 일단 움직이죠. 이상 현상을 일으킨 게 저 피의 그물 때문이라면 인간한테 유리한 현상이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일단 움직이자고!”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래도 녀석들의 음모건 뭐건 간에 편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편한데 그래! 지금까지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어!”

성격이 활달하다 못해 괄괄하기까지 한 브루스에게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달의 환경은 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 그의 안색은 상황에 걸맞지 않게 무척 편안해 보였다.

“이봐. 네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이건 절대 우리한테 유리한 현상이 아냐. 녀석들이 인간이 달에서 살기 좋도록 공기를 만들어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

브루스에게 말하던 러셀이 성윤에게 말을 돌렸다.

“거기다가. 나이트, 혹시 느껴지나? 미궁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건 공기만이 아냐.”

성윤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마력의 농도도 올랐군요.”

“맞아.”

“아마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이 농후해지는 마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기는 어디까지나 그 부가 효과 정도에 지나지 않고요.”

“역시 그렇게 생각되지?”

주변 사람들도 성윤처럼 손을 휘젓거나 아니면 달리는 중에도 눈을 감고 몸 전체로 느끼거나 하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마력의 농도를 확인했다.

“빌어먹을 놈들. 또 뭔 놈의 꿍꿍이가 있는 건지.”

브루스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일단 어서 가서 그 우두고스인지 뭔지를 퇴치하고 보죠.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좋아. 내가 또 그런 건 잘하지.”

성윤의 말이 퍽 마음에 든 듯 브루스가 건틀릿을 서로 마주쳤다.

공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달 표면에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착까지 대략 15분.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몬스터의 무리에 한시라도 빨리 향하려 연결자들은 발에 힘을 더욱 넣었다.

***

턱!

목적지에 도착한 연결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늦었군.”

연결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들려온 목소리가 너무 걸걸하고 기괴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몬스터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듯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존재였다.

“몬스터가 맞군.”

“동감이야. 인간이 저렇게 괴상하고 끔찍한 목소리를 갖고 있진 않겠지.”

“지금껏 싸웠던 간부들보다도 더 끔찍하군요. 적어도 케이빌의 목소리가 저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러셀, 브루스, 성윤이 번갈아 말했다. 뚜렷이 느껴지는 조롱에 우두고스의 안광이 한층 더 붉어졌다.

“좋아, 몬스터 씨. 네가 몬스터 간부 중 하나인 우두고스인가?”

러셀이 물었다.

“잘 알고 있군. 그래. 내가 위대한 우리의 주인, 그레노이드께서 창조한 세 간부 중 하나인 우두고스다.”

얼핏 들어도 무척이나 자부심 넘치는 어조다.

하지만 그 자부심을 존중해 줄 자는, 적어도 이곳에 있는 연결자 중에는 없었다.

“그리고 셋 중 둘은 이미 뒈져버렸고 너만 남았지. 그 위대한 주인이란 분도 피조물을 만드는 재주는 그다지 없는 모양이야.”

“…주제도 모르는 놈이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구나!”

우두고스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하지만 우두고스의 속을 박박 긁어댄 러셀은 콧방귀만 끼었다.

“됐고. 저거 네가 한 짓이냐?”

러셀이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쐐기를 감싸고 있는 피의 그물이었다.

“그렇다.”

“저거 뭐냐?”

우두고스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비웃고 조롱하고 얕잡아보는, 듣는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는 웃음 소리였다. 당연히 연결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싶나?”

“그다지. 어차피 널 때려잡으면 없어질 것 같으니까.”

러셀이 검을 들었다. 그의 옆으로 성윤과 브루스가 나란히 섰다.

성윤의 심장에서는 아까부터 마력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힘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두고스가 세 명을, 정확히는 세 명의 무구를 쳐다 봤다.

“글라이아와 싸울 때 상당히 고생한 모양이군. 그런 무구로 나와 싸워 이길 것 같나?”

“무지 쉬울 것 같은데?”

브루스가 주먹을 잡으며 이죽였다.

“클클클! 자신감은 대단하군. 새삼 확인하건데, 글라이아를 죽인 건 네놈들이지?”

“그래. 간부 중 한 명이라고 잔뜩 기대했는데 실력은 기대 이하였지. 네놈도 별 것 아닐 것 같지만.”

“케이빌을 쓰러뜨린 놈도 네놈들이냐?”

러셀과 브루스의 시선이 성윤에게 쏠렸다.

“그렇군. 케이빌을 쓰러뜨린 건 네놈인가.”

우두고스가 성윤을 스산하게 노려봤다.

“글라이아를 쓰러뜨렸고 지구에서는 케이빌을 쓰러뜨렸다. 인정하지. 네놈들은 분명 대단한 놈들이다. 하지만 그 녀석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그 녀석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것 참 기대되는걸? 그 녀석들의 개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사용됐다니. 그중 하나를 죽이는데 협조한 사람으로서 보람이 넘쳐흘러. 그리고 그 개죽음을 바탕으로 한 일이라. 그놈들처럼 그 일이란 것도 어이없이 박살나진 않겠지?”

“이봐. 기사 작위씩이나 받은 사람이 왜 그렇게 상대를 괴롭히는 거야? 난 궁금하니까 물어나 보자고. 쓰레기들이 죽어서 남긴 거잖아. 쓰레기에 어떤 꽃이 필지는 좀 궁금해.”

러셀과 브루스가 번갈아 이야기하며 우두고스의 속을 긁어댄다. 언제나 티격태격하는 둘이지만 이럴 때는 참 죽이 잘 맞았다.

하지만 성윤은 둘의 말보다는 슬쩍 움직인 러셀의 손 모양에 주목했다.

‘아직은 대기…라는 거군. 정보를 끌어낼 셈인가.’

피의 그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저것의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면 잠시 공격을 미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그리고 우두고스는 미끼를 물었다.

“케이빌과 글라이아는 너희 같은 저급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고귀한 존재다. 우리 주인께서 만드신 창조물이니 당연하지. 그런 존재의 죽음이 너희 같은 미천한 존재들의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아. 우리 인간들의 죽음보다도 한층 더 밑바닥이라고 생각하지. 그놈들이 죽는다고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울리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주변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슬퍼해주지. 네놈들에겐 그런 것도 없지 않나?”

“죽음에 대한 눈물과 동정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나 어울리는 모습이다. 게다가 우리의 죽음으로 하늘과 땅을 갈라지게 할 순 없지만, 우리 간부들의 피와 육체 그리고 영혼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제물이 될 수 있다. 그들이 죽음으로써 거대한 의식을 손쉽게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으면 고작해야 썩어서 다른 생물의 양분밖에 될 수 없는 네놈들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무안한, 죽은 후까지도 고결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위대한 피조물이라는 증거다!”

‘저 피의 그물은 의식의 결과물이로군.’

조금씩 정보가 흘러 들어온다. 러셀과 브루스의 계획이 성과를 얻고 있다.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불안한걸.’

성윤이 정보를 주절주절 나불대는 우두고스를 쳐다봤다.

‘자존감이 극도로 높은 놈이야. 자신의 계획을 미천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겠지. 그 때문에 정보를 말하는 거라면 걱정은 없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말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 정보를 바로 믿을 정도로 우리도 바보는 아니고.’

그러나 우두고스가 조심성 없이 정보를 나불댈 또 하나의 이유가 성윤의 머릿속에서 헤엄쳐 다녔다.

‘하지만 만약 저놈이 정보를 내뱉는 이유가, 우리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녀석의 의식이란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인류는 꽤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지도 모른다고, 성윤은 불안 속에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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