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저녁을 지나 슬슬 밤이라고 칭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온 집안을 휘감았다.
고슬고슬 지어진 흰 밥과 식탁 가운데서 부글부글 끓는 동태찌개. 그리고 정갈한 밑반찬들.
보기만 해도 배가 고파지는 상차림이었다.
그림 같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오랜만에 성윤 가족이 둘러앉았다.
성윤과 지민 그리고 신혜. 따뜻하고 온화한, 그런 분위기가 식탁 주위에 메아리쳤다.
“장모님들과 처남들은 안 드십니까?”
아직 습격 위협이 없어지지 않아 그들은 희영, 아인의 집에 진세를 지고 있었다. 식사 자리에 그들이 없자 성윤이 그들을 찾았다.
살 좋은 생선 토막 하나를 건져 내 신혜의 앞접시에 담아 살을 발라주던 지민이 대답했다.
“동생들은 임무예요.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잖아요, 어머니들께서는 벌써 드셔서 배가 부르시데요.”
“신경 써 주시는군요.”
“역시 그러시는 거겠죠.”
바쁘기 이를 데 없는 성윤이라 요 근래 가족들과 함께 있던 시간이 무척 적었다. 그리고 그건 당분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때문에 희영과 아인이 성윤의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오랜만에 성윤은 무척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둡고 살기 어린 미궁에서 식사를 하는 건, 보관의 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후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내키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둘러앉아 먹는 음식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아빠, 앞으로 얼마나 집에 있어?”
오랜만에 만난 아빠에게 신혜가 물었다.
‘매일 있을 수 있어!’.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성윤이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얼마 못 있어. 조금 있다가 또 나가야 할 수도 있어.”
“히잉! 아빠랑 놀고 싶은데!”
성윤도 그런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레노이드, 그 개자식 때문에!’
인류의 적이라 평소에도 싫어하는 놈이지만, 더더욱 살의가 치솟아 올랐다.
그놈 때문에 신혜와 어울릴 시간이 팍 줄어버린 것이다. 아니, 줄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희귀해졌다.
“그럼 아빠, 바쁜 일 언제 끝나?”
“글쎄. 그것도 모르겠어.”
신혜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성윤의 그레노이드에 대한 살의가 더욱 증폭했다.
“자, 자. 아빠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는 훌륭한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으신 거야. 신혜는 착한 아이니까 참을 수 있지?”
결혼을 한 지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제 엄마의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마치 엄마가 된 지 십 년은 된 것 같았다.
“대신, 나중에 시간 나면 재미있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하자. 신혜는 어디 가고 싶어?”
슬쩍 이야기를 돌린다. 신혜가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까지의 우울한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지민이 성윤을 쳐다봤다. 한쪽 눈을 찡긋했다.
능숙하게 신혜의 사고방식을 유도하는 모습에 성윤은 헛웃음을 나왔다.
지민은 고민 때문에 멈춰버린 신혜의 숟가락을 조심스레 빼앗았다.
그리고 밥 한 숟가락을 퍼 그 위에 생선살을 올렸다. 그대로 신혜의 입에 가져다 댔다.
“냠!”
신혜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냉큼 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몇 번 더 밥을 떠 준 지민이 숟가락을 신혜에게 넘겨줬다. 다시 신혜가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지민이 발라준 생선살을 먹는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아!”
입가에 밥풀을 묻힌 신혜가 소리를 냈다. 뭔가 말을 하려 하자 입에 있는 음식이 걸렸다.
입에 음식물을 넣은 채 말을 하자 말라는 가르침을 상기한 신혜는 열심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빨리 음식을 목을 넘기기 위하고 말을 하고 싶었다.
신혜의 행동은 무척이나 알기 쉬운 행동이었다.
성윤과 지민 모두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신혜는 눈치 채지 못했다.
신혜는 지금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빨리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엄마와 아빠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꿀꺽!
드디어 음식물을 삼켰다. 아직 입술 아래에 붙어 있는 밥풀이 신혜의 귀염성을 더했다.
“나, 가고 싶은 데 있어!”
“어디?”
“유럽!”
신혜가 식탁을 땅땅 쳤다. 하지만 지민의 잔소리에 황급히 손을 내렸다.
“내 친구가! 하나가! 저번에 갔다 왔다고 했어! 엄마랑 아빠랑 같이!”
“그래? 유럽은 한 곳이 아닌데. 어느 곳에 갔다 왔다고 했니?”
흥분하며 팔 다리를 막론하고 사지를 흔들던 신혜의 행동이 딱 굳었다. 그리고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이번엔 아예 머리를 부여잡았다.
“음, 그, 그러니까! 무슨 벌레 이름이었는데...!”
“파리?”
“응! 파리! 그거 맞아! 짜증나는 벌레 이름이었어!”
‘나도 그 생각은 했지.’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아내와 딸을 보며 성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패션과 우아함의 도시라는 파리지만, 한국어를 적용하면 여름에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더러운 곤충과 똑같은 이름이다.
신혜가 저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고! 라, 란, 란...!”
신혜가 다시 무언가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란?’
신혜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번엔 성윤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신혜는 계속해서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란…더? 아니, 란? 런?”
“런던?”
“응! 그거!”
신혜가 기뻐했다.
성윤은 충격을 받았다. 멍청하게 지민을 쳐다봤다.
흥분한 신혜의 얘기를 웃으며 듣던 그녀가 성윤을 봤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딸 때문에 아내한테 질투하지 마요,”
자신은 알아듣지 못한 신혜의 말을 단번에 캐치한 지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민의 말처럼 뒤이어 물 밀 듯 밀려오는 질투심. 딸을 빼앗긴 것 같았다.
“역시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끝내야겠습니다.”
그리고 신혜와 지내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그 의견엔 찬성이지만, 그 이유가 아내에 대한 질투 때문이란 게 복잡하네요.”
그녀가 어이없어했다. 딸에 대한 것도 중요하지만 아내도 당연히 중요하다.
다행히 지민은 그렇게까지 마음 상해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건 빨리 풀어줘야 한다.
성윤은 오늘 밤, 오랜만에 아내와 같이 지내며 달래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몬스터들은 그가 가족과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마저 끝끝내 방해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윤은 인상을 썼고 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신혜만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여보세요?”
성윤은 벌레 씹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별일 아닐 연락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기에 미약한 희망을 안았다. 물론 확률은 아주 낮았다.
그리고 당연히 미약한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네. 알겠습니다. 당장 가죠.”
성윤은 전화를 끊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지민은 가타부타 말없이 일어섰다.
“아빠, 어디 가?”
숟가락을 든 채 신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성윤은 신혜 곁으로 다가가 아이를 꽉 안았다.
“갑자기 아빠 일이 들어왔어. 그래서 지금 가 봐야 돼.”
“또?”
또 라니. 울상을 짓는 아이를 보면 마치 자신이 가정에 소홀한, 일에 미친 인간성 없는 놈이 된 것 같았다.
“아빠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러게. 아빠도 신혜랑 더 있고 싶어.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서 아빠가 도와주러 가야 해.”
“자, 신혜야. 아빠는 착한 일 하러 가는 거야. 착한 사람 도와주고 나쁜 사람 혼내주러 가는 거니까 보내드리자.”
풀이 죽은 채 신혜는 아빠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그리고 손을 놨다.
“응. 아빠 갔다 와. 대신 다음에 꼭 나랑 놀아줘야 해?”
“그럼! 신혜 말처럼 유럽 가자! 파리든 런던이든 로마든 베를린이든 다 가자!”
신혜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성윤은 지민과 눈을 맞췄다.
“그럼 신혜를 잘 부탁합니다. 지민.”
“걱정 마세요. 제 딸인 걸요.”
지민이 신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윤은 급히 현관으로 나갔다.
“응? 우 서방. 어디 가나?”
마침 방 밖으로 나오던 아인과 마주쳤다. 그녀의 뒤에는 희영이 있었다.
“네. 긴급 호출을 받았습니다. 몬스터가 나온 모양입니다.”
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희영은 신혜와 똑같은 소리를 하며 인상을 썼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아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성윤을 위로했다.
부엌에서 신혜와 지민이 나왔다. 둘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희영과 아인은 더 안타까워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장모님 두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성윤이 신혜와 지민을 봤다.
“최대한 빨리 올게.”
배웅하는 네 사람의 시선 속에서 성윤은 현관문을 열었다.
***
콰직!
몬스터 한 마리의 머리가 통째로 짓이겨진다.
쾅!
뒤를 이은 폭발.
살점과 핏덩이가 휘날리며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을 적셨다. 머리를 잃은 몬스터가 쓰러졌다.
주변에 마력이 잔뜩 있는 달의 미궁과는 다르게 주변에 마력이 없는 지구에서 몬스터는 소모한 마력을 보충하지 못한다.
때문에 월석으로 변하지 못하고 시체를 남겼다.
하지만 성윤은 그런 이유 따위는 상관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몬스터의 시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가족과의 시간을 방해한 몬스터들에게 격렬한 분노를 불태울 뿐이었다.
‘다음!’
저 멀리 포효하는 몬스터에게 할버드를 날렸다.
할버드가 몬스터의 입에 처박혀 머리를 관통했다.
물리적으로 몬스터를 ‘닥치게’ 만든 후, 성윤은 다시 사냥감을 찾았다.
‘다음!’
콰직!
그가 밟고 있던 지면 아래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흡사 거머리 같은 외형을 한 몬스터는 날카로운 이빨로 성윤을 물어뜯으려 했다.
퍼억!
녀석의 옆얼굴에 도끼가 꽂혔다. 성윤을 물어뜯으려 한 녀석이 깜짝 놀라 다시 땅 속으로 돌아갔다.
성윤은 쫓지 않고 녀석이 도망간 구멍을 바라봤다.
키이이이이이!
구멍 안에서 녀석의 비명이 들렸다. 몸부림을 치는지 지면이 들썩였다.
퍼엉!
녀석의 꼬리인 듯한 부분이 땅 속에서 튀어나왔다. 부패가 진행되며 고약한 냄새가 났다.
쿵!
녀석의 꼬리가 지면에 떨어졌다. 부들부들 떨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은 없나.’
분노에 차 날뛰는 사이 모든 몬스터가 전멸한 모양이었다.
뒤처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 움직였다. 몬스터의 시체를 수습하고 핏자국을 닦아냈다.
성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혹시 남아 있는 몬스터가 없는지 경계했다.
전화가 왔다. 번호는 시장의 번호였다.
또 임무일까.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성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전화를 무시할 순 없었다.
성윤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장님?”
- 암스트롱 탈환 작전의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드디어 암스트롱을 탈환할 수 있게 됐다는 기쁨 때문인지 시장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성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중단하고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생각났다.
까득!
핸드폰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시장님.”
- 왜 그러십니까?
성윤의 기분이 안 좋은 걸 알아차린 듯, 시장의 기세가 죽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성윤의 목소리에는 기세가 실렸다.
진득진득한 살기가.
“달에 있는 개자식들, 확실히 쓸어버리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