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303화 (303/354)

제303화

“지하라니.”

성윤의 연락을 듣고 온 러셀이 이마를 짚었다.

“높이 탑을 세워놓고 중요한 건 지하에 갖다놓았을 줄이야. 그것도 지하 입구는 꽁꽁 숨겨 놓고서는. 이 탑을 만든 작자는 얼마나 생각이 비뚤어진 거야.”

“아직 이 아래에 중요한 게 있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 않냐?”

“넌 좀 닥쳐라! 부정 타게!”

러셀은 브루스를 타박했다.

“여기에 뭔가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

“일단 마도 도시는 발견했잖아.”

“마도장의 젬이 있으면 이 도시는 언젠가 발견할 곳이야. 이 도시를 발견한 건 아무 의미도 없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러셀도 상당히 초조했던 모양이다. 그의 언사가 평소답지 않게 조금 거칠었다.

“어쨌든 자네한테는 끝까지 도움을 받는군그래.”

러셀이 성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옆에서 플루엘이 자랑스레 말했다.

“왕족의 젬의 주인인 사람이에요. 이 정도의 활약은 당연하죠.”

“음. 왕족의 젬의 주인은 그런 법이지.”

플루엘이야 자기 사위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루원마저 성윤의 편을 드는 게 상당히 놀라웠다.

물론 성윤을 편든다기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대단한 왕족의 젬의 사용자’를 편드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왕족의 젬을 사용하는 건 완전히 포기했지만, 원래 갖고 있던 자부심이 이상한 쪽으로 뻗어간 모양이었다.

성윤은 겸연쩍어했고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직 이 아래 뭐가 있는지 모른다니까.”

브루스가 합리적인 지적을 했지만 세 쌍의 눈길이 맹렬하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러셀이 먼저 조금은 급한 발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길 만들 때 굉장히 서둘렀던 걸까요?”

그레이스가 발걸음을 조심히 내딛었다. 그렇지 않으면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읏차! 그런 것 같은데요.”

팀이 낙차가 굉장히 큰 계단을 뛰어내렸다.

가지런한 높이와 넓이로 반듯하게 만들어져 있던,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는 다르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반듯하게 깎이기는커녕 울퉁불퉁한데다가 계단의 높이나 폭도 제각각이었다.

“이걸 계단이라고 불러야 될지조차 의문이군.”

족히 1m는 될 법한 계단이 한 칸 나타났다. 브루스가 뛰어내리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1m 낙차 다음엔 발의 반밖에 안 되는 폭의 계단이야!”

마치 절벽에 간신히 난 샛길을 지나가듯 브루스는 이번엔 계단 안쪽에 바싹 붙었다.

계단이 이 모양인데 주변 벽과 천장이 제대로 돼 있을 리도 없다.

“머리 조심하세요!”

성윤이 일행에게 주의를 줬다.

안 그래도 낮은 천장 일부가 튀어나와 있었다. 키가 낮은 사람도 자칫하다가는 머리가 부딪칠 것 같았다.

캉!

쇳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불룩 튀어나온 벽이 한 연결자의 갑옷과 부딪친 것이다.

그 연결자는 불쾌한 듯 부딪친 벽을 한 번 쳤다.

계단은 탑처럼 나선형으로 돌며 아래로 향했다. 다만, 탑처럼 중앙부가 뚫려 있지는 않았다.

“다 왔다!”

앞에서 브루스가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건 뭐야.”

사방으로 뚫려 있는 통로들을 보고 브루스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다른 사람들도 내려와 앞에 펼쳐진 여러 통로들을 보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미궁인가.”

러셀도 한숨 쉬었다. 그때 성윤이 앞서 있던 브루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응? 뭐야? 혹시 또 뭐 느끼는 거라도 있나?

브루스가 기대감에 눈을 반짝인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쪽에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저쪽이란 말이지?”

브루스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성윤이 가리킨 통로로 돌아갔다.

“망설일 것 뭐 있어? 당장 가 보자고.”

쓸데없는 일을 할 필요가 줄었다. 그에 대한 기쁨을 느끼며 브루스는 성윤이 가리킨 통로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어느 정도 걷자 몇 개의 갈림길이 또 나왔다. 하지만 성윤은 그때마다 한 통로를 가리켰다.

그의 왕족의 젬과 심장이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똑바로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 앞쪽인 것 같습니다.”

성윤이 또 다시 갈림길에서 한 통로를 가리켰다.

“그런데 어떤 느낌인가? 뭔가 중요한 게 있을 것 같거나 아니면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거나 뭐, 그런 느낌인가?”

가장 앞쪽에서 경계를 하면서도 브루스가 물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궁금한 얘기였기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글쎄요. 말로 표현하기는 좀 힘든 느낌입니다. 다만, 받은 느낌을 최대한 가깝게 설명을 하자면… 부르는 느낌이랄까요?”

“부른다?”

“네.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는 느낌입니다.”

“가야지, 그럼. 갈 테니까 좋은 것 좀 있으라고.”

연결자들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품은 채 통로를 걸었다.

하지만 이 통로의 끝이 이 대미궁 공략의 끝이 되기를 바라는 건 모든 연결자가 같았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좁았던 통로가 확 넓어졌다.

“…나왔군. 특별한 곳.”

브루스가 통로의 끝에서 말했다.

그들의 앞에 있는 건 구 형태의 공동이었다. 아래도 위도 둥근 형태로 깎여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성의 없는 계단, 통로와는 달리 이곳은 매끈매끈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질 것 같았다.

“계단이 있군.”

다행히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곡선을 그리는 벽 사이로 계단이 존재했다.

일행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전체적으로 구 형태의 공동이었지만 지면까지 둥글지는 않았다.

구의 바닥에 조그만 원형을 그리며 평평한 바닥이 존재했다.

지면에 내려선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성현우의 말이 맞다면, 이게 그거겠지?”

브루스가 눈앞의 물건을 툭툭 두드렸다.

그건 커다란 기둥이었다. 사람 네 명이 손을 맞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을 만큼 두꺼운 기둥. 하염없이 솟아오른 그 기둥은 천장까지 쭉 뻗어 있었다.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기둥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커다란 수정이었다. 기둥은 마치 그 수정을 감싸듯 존재했다.

“저 문자 읽을 수 있겠습니까?”

성윤이 플루엘에게 물었다. 플래노트의 자손들은 아까부터 기둥에 새겨진 문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네, 읽을 수 있어요. 우리가 쓰는 문자인걸요.”

“뭐가 쓰여 있습니까?”

“그레노이드를 달로 쫓아낸 후의 이곳의 역사와 이 장치를 만든 이유 그리고 작동방법이요.”

“그, 그게 그레노이드를 퇴치할 방법이 맞습니까?”

러셀이 희망과 불안을 한가득 담아 물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연결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것이 드디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걱정이 눈 녹듯 사그라졌다.

팀이 두 손을 들고 환호하고 그레이스와 에밀리가 서로를 껴안고 기뻐한다.

성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부 깊은 곳의 모든 걱정을 밀어내는 것 같은 그런 한숨이었다.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러셀이 플루엘을 채근했다.

“잠시만요. 이야기와 설명이 뒤죽박죽이라서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그것보다, 설마…!”

플루엘이 기둥에 달라붙듯 접근했다. 문자들을 눈에 박아 넣으려는 듯 관찰했다.

“아루원, 이거!”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거야.”

아루원은 플루엘과 다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문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말 굉장하군.”

아루원도 짙은 감탄을 흘렸다. 둘만이 아니었다.

플래노트의 자손들 모두가 하염없이 기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네, 저들이 왜 저러는 줄 아나?”

브루스가 성윤을 콕콕 찔렀다.

지금 지구인으로서 플래노트의 자손과 가장 친분이 있는 자는 성윤이기에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성윤이라고 플래노트의 자손들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집중하는 것 같으니까 일단 두고 보자고.”

러셀이 브루스가 괜한 짓을 하지 않도록 선수를 쳤다.

플래노트의 자손들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기둥을 바라봤다.

무슨 순례라도 하는 양 기둥 주위를 돌며 글자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그 동안 지구의 연결자들은 방해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네요.”

플루엘이 겸연쩍게 사과했다. 하지만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볼이 빨갰다.

“뭐가 그리 놀랄 일이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러셀이 묻자 플루엘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우리 플래노트의 자손은 예전 문명 시절의 기술을 대부분 잃어버렸어요. 디바이스, 젬의 제작이나 주변 마력을 유용할 수 있는 마법진 등등을요. 하지만 만들진 못해도 적어도 알아볼 수는 있어요.”

플루엘이 다시 시선을 기둥에 던졌다.

“말씀드렸다시피 저 문자는 우리의 문자예요. 이곳이 만들어진 계기나 기둥의 설명들이 쓰여있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에요. 저 문자 자체가 마법진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기둥의 문자로 옮겨갔다.

“마법진은 보통 주변 마력을 움직여 원하는 현상을 일으켜야 하기에 그 형태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 문자는 그 자체로 마법진을 형성하고 있어요. 복잡하고 기하학적일 수밖에 없는 마법진을 문자로 표현한 거죠. 그것도 그냥 아무 문자나 갖다 쓴 게 아닌,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장문을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무척 안정되어 있어요! 저걸 만든 사람들은 천재가 분명합니다!”

그 아루원이 무척 흥분할 정도로 기둥에 새겨진 문자 마법진은 대단한 것이었다.

플루엘이 설명을 계속했다.

“저 기둥에 쓰여있는 글에 따르면, 그레노이드를 봉인했을 때 이곳 마도 도시도 지구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해요. 하지만 당시 그레노이드의 발악 때문에 봉인은 쉽사리 되지 못했죠. 때문에 이 마도 도시는 달에 합류하지 못하고 다른 파편들에 묻힌 채 달 근처에서 맴돌았어요.”

“실제로 우리 민족에게 구전되어 오는 말 중에는 오랜 옛날, 달에 오지 못한 채 달 주변에 방치된 커다란 땅 덩어리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루원이 보충 설명을 했다.

“그러고 보니 지구의 연구 결과에도 원래 달은 두 개였는데 작은 달이 커다란 달에 충돌하며 합쳐졌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레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원래부터 달에 있던 곳이 아니라는 얘기군요.”

“그래요.”

러셀의 말을 플루엘이 긍정했다.

“우리 플래노트의 자손처럼 이 마도 도시에도 생존자가 있었다고 해요. 게다가 그들은 당시 지구의 마력을 모두 사용해 그레노이드를 봉인시킬 계획을 짜고 직접적으로 행한 자들이었어요. 마도사들 말이죠.”

그들은 고대 문명에서도 최고의 천재들이자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선조들께서 그레노이드의 완전한 봉인을 위해 싸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했어요.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우리를 돕는 대신 그레노이드의 침입을 막고 완전히 끝장낼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죠. 그 결과가 저 기둥이에요.”

플루엘이 아득한 눈빛으로 기둥을 쳐다봤다.

그리고 커다란 수정 바로 위에 새겨진, 다른 글자보다 더욱 커다란 글자를 읽어 내렸다.

“플루크나 오웬 하임델루이트.”

“그게 뭐죠?”

질문한 성윤에게 플루엘은 웃어보였다.

“지구의 언어로 ‘희망을 바라는 쐐기’라는 뜻이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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