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성윤은 오만하지 않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그 고되고 힘든 경험들이 그를 강제로 겸손하게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심하게 결여된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윤은 자신과 동료들이 어느 정도는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자만한 건 아니다. 성윤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남들보다 많은 시련도 넘어 왔다.
하지만 성윤은 지금, 자신의 그 생각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서걱!
러셀의 깨끗한 검격이 공간을 베어 가른다.
그래, 그것은 공간을 베는 것이었다.
베여 두 동강난 몬스터는 어디까지나 공간을 가르는 참격에 휘말렸을 뿐이다.
푸확!
하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몬스터의 머리가 둥실 떴다가 아래로 낙하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넘어갔다.
“아마 자네들을 공격한 건 이 녀석일 걸세.”
금이 잔뜩 간 자신의 방패를 두고 잠시 성윤의 방패를 빌려 들고 있던 팀이 러셀의 발 근처에서 뒹굴고 있는 몬스터를 확인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성윤 씨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덩치가 크진 않다. 오히려 왜소한 편으로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확실히 덩치가 작았다.
“사티로스다.”
흉측한 얼굴과 날카로울 뿔, 어두운 피부를 가진 몬스터였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래도 인간과 엇비슷한 상체와는 다르게 염소의 것처럼 생긴 다리였다.
“우리도 이것과 조우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보고는 했고, 몬스터의 명칭도 붙었는데 도감에는 아직 실리지 않은 모양이야. 윗놈들 하는 게 그렇지, 뭐.”
러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입으로 공기의 포탄을 쏘아내는데, 이게 엄청 아파.”
러셀 옆에 서 있던 브루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맞아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맞아 봤다고?’
팀과 성윤을 동시에 밀어붙이고 단 일격에 팀의 방패를 파괴 직전까지 만든 공격이다.
그런 공격을 맞아 놓고 엄살떨고 끝이라니. 새삼 최상위 연결자와의 수준차를 실감했다.
“다바나룽이네요.”
플루엘이 몬스터를 보며 말했다.
“다바나룽? 이걸 플래노트의 자손들은 다바나룽이라고 부릅니까?”
“네. 우리는 이 몬스터를 그렇게 불러요.”
성윤의 질문에 플루엘이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다른 문화권에서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다른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성윤은 다바나룽이란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아!”
성윤이 손바닥을 쳤다.
“예전에 장모님이 절 욕하실 때 제가 이 녀석같이 생겼다고 했었죠?”
“아, 그런 적이 있었죠.”
성윤에게 잡혀 그녀의 동료들과 파비온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 삼파전을 벌일 때였다.
성윤이 몬스터의 얼굴을 바라봤다. 흉측했다.
“제가 이 녀석과 닮았습니까?”
“그저 분노가 치솟아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불과해요.”
플루엘이 변명했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성윤의 안색은 한동안 좋지 못했다.
***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성윤 일행이 고전할 만한 몬스터가 계속 나왔고 종종 아직 성윤 일행으로서는 공략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러셀, 브루스로 대표되는 초고위 연결자들은 그런 몬스터를 너무도 쉽게 쳐부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그들은 3일 정도를 소모해 4층을 더 내려갔다.
통로는 갈림길 없이 똑바로 이어졌다.
“드디어 뭔가가 나왔어!”
브루스가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외쳤다.
통로가 끝난 곳. 그곳엔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축구장이 적어도 세 개는 들어갈 만한 크기에 높이도 20층 높이의 아파트는 될 것 같다.
놀랍게도 이 공간도 인공적인 것인 듯, 사방이 네모반듯한 돌을 쌓아 만들어져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답답하게 온 것 때문인지 탁 트인 공간이 못내 기분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온 통로 맞은편 벽.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문이 존재했다.
“딱 봐도 저게 목적지 같지?”
브루스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 자식아! 최소한의 주의는 좀 하고 뛰쳐나가!”
러셀이 급히 브루스의 뒤로 붙었다.
“충분히 하고 있어! 내가 이 짓을 몇십 년 해먹었는데 그것도 모를까!”
“누가 봐도 모르는 게 빤히 보이잖아! 몇십 년 동안 헛짓만 한 것 같다고!”
러셀과 브루스는 익숙한 말다툼을 하며 앞장섰다. 조심을 한다고 해도 여유가 있는 두 사람과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몸을 긴장감으로 꽉 묶은 채 조심조심 두 사람을 따랐다.
다행히 문에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어도 되겠지?”
브루스가 문에 손을 댔다. 러셀은 아직까지 못마땅한 표정이다.
하지만 결국 문을 열긴 해야 했기에 브루스를 막지 않았다.
그는 문에서 몇 걸음 떨어져 다른 연결자들을 지휘, 진형을 갖춰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했다.
“좋아!”
브루스는 문에 손을 대고 힘을 줬다.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라? 이거 굉장히 무거운 모양인데?”
브루스는 자세를 고쳤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문에 팔을 댄 뒤 온 몸에 힘을 줬다.
“흐랴아아아압!”
브루스의 기합이 울려 퍼졌다. 제3 자가 봐도 모든 힘을 다 끌어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최상위의 연결자인 브루스의 전력을 다한 힘이라면 엄청난 힘일 터.
하지만 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브루스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아무래도 열리지 않는 문이 브루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오냐! 어디, 부서져 산산조각이 난 후에도 열리는지 안 열리는지 보자!”
“문을 부수면 이미 여는 게 아니잖아, 이 등신아!”
씩씩 대며 주먹을 들어 올리는 브루스를 러셀의 뒤통수를 러셀이 때렸다.
한동안 왁자지껄한 소동이 이어졌다.
“하여간 저 단순무식 단세포는!”
브루스를 겨우 말려 문에서 떨어뜨려 놓은 러셀이 씨근덕댔다.
그의 노고에 성윤 일행은 마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루스 씨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부숴야죠.”
성윤답지 않은 과격한 발언이었다. 에밀리가 우려를 표했다.
“골렘처럼 이상한 게 튀어나오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가씨. 하지만 그걸 각오해서라도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요.”
성윤 대신 러셀이 답변했다.
“그래도 그건 최후의 수단이 될 겁니다. 그 전에 이걸 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야죠.”
러셀이 커다란 문을 올려다봤다.
일행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역시 크군.’
높이만 4m는 될 것 같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문은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윤은 문에 손을 올렸다.
러셀과 브루스조차 열지 못한 문. 자신이 힘을 준다고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손을 대봤을 뿐이다.
끼익!
“응?”
모두의 시선이 문에 집중됐다.
성윤은 당황했다. 2cm 정도의 틈이 보인다.
무척 작은 틈. 하지만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며 생긴 틈이라면, 그 2cm는 절대 작은 게 아니다.
성윤은 손에 힘을 줬다.
끼이이이익!
지금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것이 꿈이라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문은 쉽게 열렸다. 크기답지 않게 무게감도 없었다.
성윤은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이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성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브루스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
“그러니까 이건 네 그, 왕족의 젬이던가?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절대로 내가 진 게 아니야.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것에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음음. 역시 나이트는 말이 통하는군. 하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넌 좀 앞으로 꺼져라!”
러셀이 브루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브루스는 투덜거리면서 무리의 앞으로 나갔다.
러셀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성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가 이해 좀 해주게. 어린애 같은 놈이잖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애초에 브루스의 저것이 장난 이상이 아니라는 건 성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브루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러셀은 성윤에게 감사를 표하고 브루스를 따라 무리 앞으로 나갔다. 곧 익숙한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두 분은 정말로 사이가 좋네요.”
그레이스가 티격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두 분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죠.”
“정말 그래요.”
문 너머로도 통로는 계속 이어졌다.
이 통로 역시 인공적인 구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규모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의 좁은 통로는 사라지고 널찍한 통로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몬스터가 없었다. 일행은 방해 없이 쭉쭉 앞으로 나갔다.
“역시 성윤 씨의 추측이 맞았네요.”
통로가 끝난 지점에서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들의 앞으로 커다란 고대 도시가 나타났다.
***
고대 도시의 건물 양식은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만들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각 도시마다 뚜렷한 특징이 있기도 했다.
수도에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강대한 카리스마를 흘리고 있는 왕궁이 있었고, 신전 도시에는 성스러움을 풍기는 신전이 있었으며, 요새 도시에는 도시를 둘러싼 두터운 성벽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마도 도시라고 짐작되어지는 곳에도 특징이 있었다.
그것도 도시 어디에서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특징이.
“저건 탑인가요?”
에밀리의 눈이 도시 중앙에 고정됐다.
그곳에는 길게 뻗어 있는 원통 모양의 건축물이 있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공간이 작다는 듯 천장까지 뚫고 뻗어 있는 그 건축물은 누가 봐도 탑처럼 보였다.
“정확한 높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40층짜리 빌딩은 가볍게 넘겠군요.”
손가락을 들어 어림짐작으로 탑의 높이를 재던 팀이 탄성을 내뱉었다.
“자, 집중!”
러셀이 손뼉을 쳐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모았다.
“하루 동안 이 도시를 살펴봅시다. 뭔가 특별한 것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기억에 담아뒀다가 보고 바랍니다. 기한은 어디 보자.”
러셀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23시까지. 집합 장소는 저기입니다.”
러셀이 가리킨 곳은 도시 중앙에 위치한 탑이었다.
“탑은 언제 오를 겁니까?”
연결자 한 명이 물었다. 누가 봐도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거점은 탑이었다.
러셀은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내일!”
***
연결자들은 다시 소수의 파티 단위로 흩어졌다.
성윤 일행도 도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를 뚜렷하게 발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들도 도시에는 별 다른 특이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특별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파티가 빈손으로 귀환했다.
“특별한 걸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러셀도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투였다.
“그럼 오늘은 푹 쉬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저 탑에 돌입해야 하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