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대미궁이 그레노이드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판명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미궁이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아예 세계 자체가 다른 곳으로 보이는 곳이 대미궁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 그들이 알던 대미궁의 형태와는 달랐다.
“이건 분명 사람이 만든 거겠죠?”
팀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면을 만졌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미궁의 일반적인 바닥 대신 네모반듯한 모양의 돌들이 빈틈없이 깔린 매끈한 바닥이 거기 있었다.
바닥만이 아니었다. 천장도 벽도 네모 모양의 돌을 쌓아 만들어져 있었다.
높이는 대략 3m. 폭은 2.5m정도의 직사각형 통로.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며, 심하면 아예 천장이나 벽조차 없는 일반 미궁이나 대미궁과 비교하면 분명 이질적인 곳이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레노이드나 그것의 부하들이 돌아다니는 이상, 인간 외의 생명체가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어. 아니, 여기가 달이고 플래노트의 자손들이 이곳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 높지. 마력에 의한, 우리가 모르는 현상 때문일 수도 있고.”
에밀리가 돌과 돌의 틈새를 살피며 말했다.
성윤과 그레이스도 바닥과 벽을 만져보며 새로운 지형을 파악했다.
그레이스가 성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떤가요, 성윤 씨? 여기서 뭔가 느껴지시나요?”
“네. 아주 격렬하게 느껴집니다.”
성윤은 통로 저편을 노려봤다.
마력이 시각정보를 가져다줬지만, 너무 멀어서 그런지 통로 저편은 안개에 낀 듯 흐릿했다.
그레이스가 손을 들었다. 마치 바람을 느끼려는 듯 손가락 하나를 펴 이리저리 흔들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아요.”
성윤도 그레이스와 똑같이 손가락을 펴봤다.
“그렇군요. 마나 스트림이야 대미궁 어디서나 불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더 거세네요.”
일반적인 미궁의 마력이 산들바람이고 마나 스트림이 몰아치는 폭풍이라면, 지금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은 태풍이었다.
그것도 초대형의 태풍.
‘최소 플래티넘 랭크의 젬을 사용할 수 있는 연결자가 아니라면 몸이 찢겨나가겠군.’
“그럼 이 곳이 특별한 곳이란 건 확실히 알았으니 천천히 움직여보죠.”
성윤이 말하자 동료들이 모였다.
그들은 다시 진형을 갖추고 전진했다.
“그래도 사방이 뚫린 곳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기습을 당할 걱정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적으니 마음이 편하군요.”
“미궁에서 방심하지 마, 멍청아. 몬스터들이 벽이나 바닥을 뚫고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는 거야. 안 그래도 정체모를 곳인데.”
에밀리가 팀을 타박했다.
정체 모를 곳에서 다투는 것은 몬스터를 부를 수도 있는 행위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성윤과 팀의 부츠 때문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때문에 성윤도 둘의 작은 말다툼을 개의치 않았다.
“손님입니다.”
에밀리의 화려한 언변에 쩔쩔매던 팀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방패를 들었다.
철컹! 철컹!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당당한 발소리를 내며 상대가 다가왔다.
검은 투구와 검은 갑옷. 그리고 검은 검.
완전히 흑색으로 통일한 상대는 불길한 기운을 한껏 뿌리고 있었다.
“동료 연결자… 인가?”
“멍청이. 저 녀석의 눈을 봐.”
에밀리가 메이스로 검은 갑옷의 투구 부분을 가리켰다.
팀이 검은 갑옷의 눈 부위를 쳐다봤다.
“빨갛네. 몬스터로군.”
“리빙 아머야.”
“또 수준 높은 놈인가.”
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도 타이탄과 비슷한 놈이니. 어떻게든 처리가 가능하겠지.”
“아뇨. 생각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성윤이 팀의 뒤에 바짝 붙었다.
“통로가 좁습니다. 공격의 수가 한정될 수밖에 없어요. 팀 씨가 주의를 끌고 제가 후방에서 공격을 하는 기본적인 전략이 먹히지 않습니다. 옆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방해받을 확률이 커요.”
“으음!”
팀이 신음했다.
“제 공격도 제한받을 거예요. 이런 좁은 장소에서는 폭발도 벼락도 폭풍도 위험하니까요. 자칫하다가는 팀 씨가 휩쓸릴 거예요.”
“으으으음!”
그레이스의 추가 발언에 팀의 신음성이 더더욱 커졌다.
“일단은 부딪쳐보죠!”
단순한 팀다운 말이었다. 기세를 올리려는 듯 팀이 자신의 도끼와 방패를 서로 부딪쳤다.
“뭐, 바로 물러설 수는 없겠죠.”
성윤은 도끼를 꺼냈다.
폭발을 일으키는 망치는 파티원이 폭발에 휘말릴 수 있었고 검과 할버드는 통로에서 휘두르기 너무 길었다.
‘팀 씨의 뒤에서 찌르기만 한다면 검이나 할버드가 좋을 테지만.’
역시 웬만하면 몬스터의 뒤를 잡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짧은 무기가 좋았다.
“옵니다!”
팀이 외쳤다. 리빙 아머가 검을 부여잡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빨라!’
녀석은 누가 봐도 육중한 것처럼 보이는 갑옷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았다.
녀석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검과 방패가 맞부딪치며 폭음이 울렸다.
사방이 막혀 있었기에 소리가 더 시끄러웠다.
본능적으로 손을 귀로 가져갈 뻔했다. 보통 사람보다 청각이 더 예민한 연결자이기에 더욱 거슬렸다.
탓!
성윤이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의 팀 옆을 몸을 숙이고 지나갔다.
리빙 아머의 옆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쿠웅!
‘쳇!’
성윤은 혀를 찼다.
리빙 아머가 검을 들고 있는 손은 오른손.
녀석이 팀의 방패와 힘겨루기를 하는 터라 오른쪽 옆구리가 비었다.
그 빈틈을 노리고 녀석의 오른편으로 접근했는데, 리빙 아머는 검을 교묘하게 틀어 성윤의 도끼를 막았다.
성윤은 도끼에 힘을 줘 밀어내며 바닥을 강하게 찼다.
공격은 막혔지만 당초의 계획대로 리빙 아머의 옆을 빠져 나가 배후를 점할 생각이었다.
후웅!
리빙 아머의 발이 움직였다.
“큭!”
성윤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시 팀의 뒤로 구르듯 물러섰다.
쿠우웅!
리빙 아머의 발이 성윤이 지나가려 하던 곳을 짓밟았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미궁을 울렸다.
“역시나 힘들군.”
“이런 좁은 지형에서는 숫자의 우위가 힘을 잃으니까요.”
에밀리가 성윤의 한탄에 대꾸했다.
성윤은 몇 번 더 리빙 아머의 뒤로 돌아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이 막혔다.
“역시 이 방법밖에 없나.”
결국 성윤은 무기를 기다란 할버드로 바꿨다.
그 이후로 전투는 장기전으로 변했다. 리빙 아머는 방어력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런 몬스터가 좁은 골목을 틀어막아 버리니 마치 커다랗고 단단한 벽을 앞에 둔 것 같았다.
그렇게 전투 시간은 길게 흘러갔다.
성윤 일행은 겨우겨우 리빙 아머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일행은 진이 빠질 대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요.”
그 터프한 팀도 방패를 바닥에 기대어 세우고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무기를 들어야 했다.
몬스터 한 마리가 다시 저 너머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뭐죠?”
팀의 등 뒤에서 빼꼼히 얼굴만 내민 에밀리가 물었다.
하지만 속 시원히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군요.”
확인된 몬스터를 기록해둔 몬스터 도감을 달달 외운 성윤조차도 그 몬스터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미지의 적이란 언제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팀이 방패를 들었다.
“일단 힘을 한번 확인해볼까요?”
“잠깐만요. 미지의 몬스터, 그것도 대미궁의 몬스터에게 함부로 덤비는 건….”
성윤이 팀을 말리려던 때였다.
무언가가 날아왔다.
몬스터의 공격. 그렇게 판단한 팀이 공격을 방어했다. 아니, 방어하려 했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팀의 몸이 통째로 떴다. 강렬한 충격이 팀을 방패째 날려버렸다.
깜짝 놀란 성윤이 팀을 받아냈다.
“크으으윽!”
그럼에도 몬스터의 정체 모를 공격은 기세가 죽지 않았다. 그에 따라 팀과 성윤도 계속 뒤로 밀려났다.
성윤은 간신히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은 채 공격의 기세를 죽이려 발버둥 쳤다.
“으아악!”
팀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방패를 들어 올렸다.
몬스터의 공격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방패를 타고 미궁의 천장을 때렸다.
콰아아앙!
거센 폭음과 충격파. 팀과 성윤은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뒤로 나가 자빠졌다.
“성윤 씨! 팀!”
“성윤 씨! 팀 씨!”
에밀리와 그레이스가 황급히 둘에게 달려 왔다.
성윤과 팀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팀의 방패에 쏠렸다.
무척이나 단단한 팀의 방패에 가는 금이 무수히 나 있었다.
“고작 일격에?”
팀이 기함을 질렀다.
경악한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윤은 생각할 것도 없이 왕족의 젬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들의 뒤에 포털이 생겼다.
“도망칩니다!”
대답도 뭣도 없이 일행은 허겁지겁 포털로 뛰어들었다. 성윤도 포털에 뛰어든 후 바로 포털을 닫았다.
후웅!
간발의 차이로 몬스터의 공격이 또 지나갔다. 미궁 통로에 다시 한 번 커다란 폭음이 진동했다.
***
“헉! 헉! 헉!”
포털을 빠져나온 성윤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 산소가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지금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일단 폐에 공기를 가득 주입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성윤의 시선이 올라갔다.
다행히 다른 파티원들 모두 있었다. 성윤처럼 극히 놀랐을 뿐,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누군가 성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러셀이었다.
그가 크게 놀란 눈으로 성윤 일행을 번갈아 봤다. 그의 뒤로 먼저 돌아와 있던 사람들이 점점이 모여들었다.
“우 서방!”
플루엘이 황급히 성윤을 부축했다. 러셀이 그레이스를 부축했고 다른 연결자들이 팀과 에밀리를 부축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일단….”
약간 쉰 목소리로 성윤이 플루엘에게 말했다.
“물부터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모님.”
***
일행은 작전 거점으로 삼고 있는 신전 도시로 귀환했다. 그곳에는 연결자들이 가져올 정보를 시장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찾은 성윤이 천천히 자신의 경험을 풀어 놨다.
“30층까지 내려갔다고?”
브루스가 상당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히 많이 내려갔군. 우리 파티는 고작해야 27층이 한계였는데 말이야.”
성윤은 어이가 없었다.
포털이란 믿는 구석이 있어 귀환 시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내려가야 하는 성윤 일행과는 다르게 브루스 일행은 귀환 시일을 계산하고 내려가야 한다.
모두 30일이 지나기 전에는 일단 귀환을 한다는 계획으로 내려간 터라 시간제한마저 있다.
그 때문에 브루스 일행은 성윤 일행보다 내려가는 시간이 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모든 제한 조건 속에서도 성윤 일행보다 고작해야 3층 덜 내려갔다니.
새삼 브루스의 강함이 느껴졌다.
“거기서 뭔가를 찾았나?”
러셀이 물었다. 성윤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상한 곳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