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295화 (295/354)

제295화

성윤은 말없이 우상을 내려다봤다.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허리를 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지가 느껴졌다.

“우상이 말이 맞아요.”

상황을 지켜보던 아인이 말했다.

“성윤 씨는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일을 해결해줬어요.”

“사위. 사위라고 해야지.”

“아, 맞아. 사위.”

희영의 핀잔에 아인이 정정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우리도 감사 인사를 안 했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윤은 희영에게 손사래를 쳤다.

겸양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으면 좋았다. 도대체 장모님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사위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행히 둘은 우상처럼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대신 성윤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무리 지민이 정범의 흔적을 찾는 걸 반대했었다고 해도, 정범은 그들의 남편이다.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그저 연결자의 아내로서 남편의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 왔고 자식들이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해 반대했을 뿐이다.

남편의 죽음은 항상 그녀들의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성윤이 정범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자 그 응어리는 상당 부분 씻겨 내려갔다.

물론 그 빈 부분을 분노가 상당히 채우긴 했다. 하지만 그게 성윤에게 감사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희영, 아인, 우상에 뒤이어 우성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지민의 결혼에 대해 끝까지 탐탁지 않아 했고 성윤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생각한 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 그런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감사드립니다! 매형!”

그의 평소 성격대로 그가 크게 소리치며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

성윤은 잠들지 못했다.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을 조금 젖히고 바깥을 바라봤다.

어두운 거리 사이로 하얀 가로등 불빛이 아무것도 없는 거리를 비췄다.

손에 든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고소하고 씁쓸한 맛이 탄산의 톡 쏘는 맛과 함께 입 안에 휘몰아쳤다.

“잠이 안 오나요?”

그의 곁에 지민이 다가왔다. 얇은 파자마로 그녀의 굴곡이 그대로 내비쳤다.

“조금 그렇습니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런 건가요?”

정범의 일에 대한 감사를 이름이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과의 계약 때문에 장인어른에 대한 행방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도 받았죠. 이렇게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아니에요.”

그녀가 성윤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막무가내인 부탁이었어요. 저 스스로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한 일이에요. 성윤 씨에게 부탁을 했지만, 정작 부탁을 한 저조차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망이 되어 그녀를 옭아매던 시절이다. 몇 년 안 됐지만 지금은 마치 먼 과거에나 있었던 일 같았다.

“당신에게 부탁은 해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저 그 무의미한 일을 끝내기 위해 만든 핑계일 뿐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절 도왔습니다.”

“말했잖아요. 핑계였다고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핑계를 댈 수 없죠.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면 저는 스스로 무너졌을 거예요.”

그렇기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 성윤을 서포트했다.

마지막이라는 이유도 그녀가 최후의 힘을 낼 수 있게 만든 이유였다.

“하지만 당신은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어요. 1세대라는 한계조차 가볍게 뛰어넘어버리고, 다른 연결자들에 비하더라도 훨씬 위험한 일들을 겪었으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죠.”

“계약 때문이었습니다.”

“계약을 맺고도 헌신짝처럼 패대기치는 인간들은 많아요. 특히,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연결자처럼 계약을 파기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요. 목숨이 걸린 일이니 비난할 수만은 없죠. 성윤 씨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회사의 연결자들이 어떤 작자들이었는지는 성윤 씨도 아시잖아요?”

헛소리를 찍찍 해대며 자신을 공격했던 최초의 정범 소속 연결자 김수빈이 떠올랐다.

“성윤 씨는 전혀 달랐어요. 지금도 생각해요. 전 운이 아주 좋았다고요.”

모든 희망을 잃어 가고 있을 때, 거침없이 전진하며 희망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게 해준 성윤은 그녀에게 있어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나 다름없었다.

“결국 당신은 모든 진실을 밝혀 주셨죠. 계약을 지킨 거예요.”

지민이 성윤의 손을 잡았다.

크고 두툼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미궁으로 향하는 연결자의 손. 어렸을 때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이와 꼭 같았다.

“어머니들이나 우상이, 우성이보다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네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맑은 눈이 성윤의 눈과 마주쳤다.

“감사해요.”

영롱한 목소리가 성윤의 고막을 울렸다.

“당신 덕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졌어요. 정말로, 정말로 감사해요.”

그녀가 성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성윤은 피하지 않았다. 지민의 어깨가 들썩이며 성윤의 앞섶이 축축해졌다.

그건 어떤 눈물일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진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일까.

아니면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가 불쌍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일까.

그것은 오직 지민만이 알 것이다.

지민이 우는 동안 성윤은 조용히 맥주만 홀짝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지민의 흐느낌이 사그라들었다.

“하나만 더 약속해주세요.”

지민이 성윤의 옷을 꽉 쥐었다.

“그것도 계약입니까?”

“아니요. 약속이에요.”

계약이든 약속이든 상관없다. 성윤에게는 어느 것이나 필히 지켜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서로 간의 감정 없이 맺어지는 계약보다 그녀가 입에 올린 약속이란 것이 더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뭡니까?”

“앞으로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겠죠?”

“그럴 겁니다.”

그것도 인류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전투가 틀림없었다.

달에 똬리를 튼 정체모를 괴수와 그 괴수가 이끄는 괴물들, 배신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살아주세요.”

지민이 말했다.

“살아서 돌아와주세요.”

그건 미궁에서 가족을 잃은 자의 작은 외침이었다.

그녀의 눈이 성윤을 바라봤다.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끝내 그녀의 마음을 외면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속해주시진 않는군요.”

지민은 별로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걸로 만족할 게요. 성윤 씨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주셨으니까요.”

지금은 그걸로 참는다. 지민은 성윤의 품에서 얼굴을 뗐다.

“대신 지금 저를 안정시켜주세요.”

이번엔 몸 전체를 성윤에게 밀어붙였다.

아찔한 여자의 향기가 그녀에게서 풍겼다.

그녀의 행동의 의미를 성윤이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겁니다.”

현우의 습격 아닌 습격 이후로 성윤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잠시 미뤘다.

아무래도 호위 대상이 한 곳에 모여 있어야 효율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여전히 희영과 아인의 집이었다. 거기에 오늘은 우상과 우성이 돌아와 자신들의 방에서 자고 있었다.

지민이 장난스레 웃었다.

“괜찮아요. 이 집은 방음이 엄청나게 잘돼 있어요. 여러 여자와 사는 연결자들의 집은 대개 이래요. 아무리 납득하고 연결자와 결혼을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 건 별개의 얘기니까요.”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성윤의 목을 옭아맸다.

“신혜도 동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성윤이 지민을 안아 올렸다.

***

쾅!

녹이 잔뜩 슨 철문을 걷어찬다. 젬으로 증폭된 연결자의 근력에 안 그래도 삐걱이던 철문이 힘없이 나뒹굴었다.

타타타탓!

일단의 무리들이 마당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척 봐도 무척이나 허름한 집이었다.

유리창은 곳곳이 깨져 있었고 옛날에는 햇빛을 받아 새빨간 색으로 빛났을 지붕도 색이 잔뜩 바랜 채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어지럽게 엉클어진 잔디는 관리가 되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성윤은 긴장한 눈초리로 집 안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늦었어!

통신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렸다.

성윤은 숨어 있던 풀숲에서 걸어 나왔다. 성윤과 같이 바깥에서 대기조로 있던 사람들도 어슬렁 걸어 나왔다.

성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썩어버린 나무 바닥이 곳곳에 함정을 만들고 있었다.

성윤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큭!”

코를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린다. 성윤의 눈동자가 참혹한 사건 현장을 담았다.

온 벽에는 피 칠이 되어 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말라비틀어진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비린내가 빠지지 않았다. 엄청난 피가 여기에 흘렀다는 증거였다.

방바닥에는 피로 그려진 이상한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도형과 문자가 이리저리 그려져 사람의 근본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건 방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시체들이었다.

시체의 산.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수백 구의 시체, 그것도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가 도살장에 방치된 돼지들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그 시체들의 모습은 잔인한 장면에 내성이 있는 연결자들조차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성윤은 다른 연결자들을 지휘해 시체들을 걷어 내고 있는 브루스에게 물었다.

“똑같아. 1세대 연결자 한 명에 수백의 일반인 시체. 분명해. 여기에 케이빌이랑 다른 개 같은 것들이 있었다.”

브루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얼마 전 케이빌이 목격됐었다. 당연히 빠듯한 사정 속에서도 최고의 연결자들로 팀이 만들어져 케이빌이 목격된 곳을 급습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건 케이빌이 아닌,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대량 학살 장소였다.

그 이후로 종종 이런 곳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매번 이런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연결자들은 이만 부득부득 갈았다.

“그 개자식들은 대체 이걸로 뭘 하려는 거야!”

브루스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저 빌어먹을 마법진 비스무리를 당장 발로 짓이겨버리고 싶었지만, 저런 것들도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될 수 있는 터라 그러진 못 했다.

“달의 마력과 어떤 공명을 일으키려는 진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하셨습니다만.”

정보 출처는 플루엘이었다.

“빌어먹을! 그 새끼 멱은 꼭 따버리고 말겠어.”

브루스는 가래침을 뱉고는 씩씩거리며 현장 정리에 집중했다.

현장을 마무리하고 연결자들은 다시 이번 작전을 위해 만들어진 임시 본부로 귀환했다.

그딴 역겨운 걸 봤으니 연결자들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 집단의 리더인 브루스부터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담배만 뻑뻑 피고 있었다.

그때 시장이 본부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당황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의 뒤로 플루엘이 따라 들어 왔다.

“이번에도 늦었습니다.”

브루스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자책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시장이 그를 위로했을 것이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장은 그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그 마법진의 용도가 밝혀졌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시장에게 옮겨졌다. 성윤은 몸을 바로 했고 브루스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뭡니까? 그 빌어먹을 마법진의 용도가.”

성윤도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자연히 말이 거칠어졌다.

시장이 플루엘을 쳐다봤다.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저희 플래노트의 자손들이 조금 남아 있는 정보들을 총동원해 밝혀낸 거예요. 그 진은 마력 분포도가 높은 곳에 만들어 지구에 있는 마력과 달의 마력과 공명시키는 역할을 해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느냐입니다.”

브루스가 말했다.

“그레노이드가 지금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에요. 지구로의 귀환이죠. 그 목적을 상기하며 조사를 했더니 결과가 나왔어요.”

플루엘은 눈을 감고 말했다.

“그 진은 지구의 마력과 달의 마력과 공명시켜, 달 자체를 지구로 끌어들이는 진이에요.”

툭!

누군가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실제로….”

시장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달이 궤도롤 바꿔 지구로 접근하기 시작했답니다.”

거센 충격이 사람들의 머리를 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