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그곳은 성윤이 연 포털 너머에 있는 도시와 비슷한 양식의 도시였다.
건물들의 모습도 비슷했고 세월이 잔뜩 내려앉은 씁쓸함도 그랬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도 있었다.
“…요새?”
포털을 넘어 이 도시에 발을 디딘 한 연결자가 주변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도시는 산 위에 만들어진 달동네같이 커다란 경사를 이루며 위로 높이 솟아 있었고,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얼핏 봐도 단단해 보이는 둥그런 성벽이 네 겹이나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규모는 성윤의 포털로 드나들 수 있는 도시보다 명백히 작았다.
“요새 도시.”
플루엘이 중얼거렸다.
“티오투도가 살아 있었어?”
그녀의 말에 희망이 실렸다.
죽은 줄 알았던 친우의 생존은 무척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녀를 안내한 월인은 그녀의 희망을 부정했다.
“아니, 티오투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죽었다고 봐야지.”
“뭐? 그럼 누가 이 요새도시로 연결되는 포털을 열었다는 거야? 요새 도시와 연결된 포털은 전사장의 젬과 왕족의 젬으로밖에 열지 못 할 텐데?”
“나다.”
플루엘이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아루원.”
“무사해서 다행이야. 플루엘.”
그가 미소를 지으며 플루엘을 반겼다. 하지만 플루엘은 아루원의 미소가 달갑지 않았다.
‘이 녀석이 요새도시로의 포털을 열었다고?’
그 말은 곧, 아루원이 전사장의 젬을 각성시켰다는 말이 된다.
‘분명 내가 주긴 했지만.’
티오투도에게 전해 받은 전사장의 젬을 그녀는 아루원을 도망치게 하기 전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가 전사장의 젬을 각성시키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특수 젬이 각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는 티오투도의 가설을 믿더라도 너무 빨랐다.
무엇보다 전사장의 젬을 각성한 게 아루원이란 사실이 불안했다.
전사장의 젬의 각성이 길이 될지 흉이 될지 플루엘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아루원의 본래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흉 쪽이 가까울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뒤이은 아루원의 행동은 그런 플루엘의 걱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들이야?”
‘어라?’
플루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는 아루원은 이런 반응을 내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몬스터처럼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내며 어째서 외부인을 이곳으로 데려왔냐며 길길이 날뛰어야 했다.
‘뭐, 됐어. 어차피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아루원을 포함한 보수적인 인물들을 설득해야 한다.
“할 말이 있는데 회의를 열 수 있을까?”
“지금?”
“그래.”
“알았어.”
플루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루원의 반대에 대비해 민족을 위해 희생한 자신의 행위를 언급하며 강하게 밀어붙이려 했던 그녀의 의도가 다시 한 번 어이없게 무산됐다.
“다른 동료들을 모으면 되는 거지?”
“어… 어어.”
휘적휘적 다른 동료들을 모으러 가는 아루원의 등을 플루엘은 귀신에 홀린 눈으로 바라봤다.
옆의 동료에게 눈빛으로 사정을 물었다.
“음, 우리도 솔직히 당황하고 있는데 말이야. 아루원이 많이 바뀌었어. 뭐랄까. 뭐에 씌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오히려 모든 걸 털어내고 홀가분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티오투도의 죽음과 네 희생이 녀석의 뭔가를 바꾼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녀석에게 미소를 지을 때, 아루원의 표정이 굉장했던 걸 생각해냈다.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었지.’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말이지? 아루원의 변화 말이야?”
“응.”
동료는 머리를 조금 기울였다.
“나쁘진 않아.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분명 좋은 쪽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니까. 적어도 예전의 그 오만하고 경우 없던 모습을 찾긴 힘들어. 네가 무슨 목적으로 저들을 데려왔는지는 모르지만.”
동료가 주변을 신기하게 둘러보는 암스트롱 연결자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어쩌면 네 의견에 가장 찬동하는 게 아루원일지도 몰라.”
“설마.”
그 말만은 믿을 수 없는지 플루엘은 동료의 말을 웃으며 가볍게 흘려 넘겼다.
***
“좋아.”
플루엘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음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좋다고 했어.”
다행히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걱정이 들었다.
“내 말 잘 이해한 거 맞지?”
“우리와 지구인 사이에 오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지구인과 동맹을 맺는 게 좋겠다. 그 신뢰 표현으로 이번에 암스트롱의 피난민을 지구로 탈출시키는 작전에 우리가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아니야?”
아루원이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이해했으면서도 동의했다는 거지?”
“그래.”
슬슬 아루원도 짜증이 났는지 눈꼬리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예전,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던 아루원의 모습과는 백만 보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루엘은 한 마디 더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너 어디 아프니?”
“…이건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이지?”
아루원이 주변에 의견을 물었다.
누가 봐도 플루엘이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심정적으로는 플루엘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옅은 쓴웃음으로 아루원의 질문을 흘려 넘겼다.
아루원은 작게 한숨을 쉬고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플루엘에게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아무리 내가 멍청하다고 해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으니까.”
친구마저 죽음에 이른 상황. 플루엘마저 희생을 각오하고 뒤에 남았을 때,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완전히 박살났다.
플루엘은 그제야 아루원이 변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너무 늦었어.”
플루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적어도, 적어도 티오투도가 죽기 전에 정신을 차리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아루원의 변화는 너무 늦었다. 티오투도의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아루원도 아는 사실이었다.
“알아. 변명할 생각은 없어. 비판이든 비난이든 뭐든 달게 받고 그 책임도 질 생각이야. 하지만 적어도 우리 민족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될 때까지는 봐줬으면 해. 객관적으로 봐도 난 우리 민족의 주요 전력 중 하나니까.”
그건 사실이다. 아루원은 분명 그들 민족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플루엘이 주목한 건 전혀 다른 쪽이었다.
‘자신을 민족의 전력 안에 포함시켰어.’
언제나 자신만은 특별하다며 생각하던 아루원이 자연스럽게 자신도 민족의 평범한 전력으로 셌던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의 아루원이라면 있을 수 없는 얘기. 아직 미심쩍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루원이 변한 건 사실이라면 그만큼 마음 든든한 일도 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서로 목숨을 노리며 싸운 상대도 믿기로 했어. 동료 한 명 정도 더 믿지 않을 이유도 없지.’
플루엘은 아루원에게 깨끗한 미소를 보였다.
“그걸 안다면 더 이상 아무 말 않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루원.”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그럼 우선.”
아루원이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플루엘이 모아달라고 했던 동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설득부터 힘을 내자고.”
“좋아.”
가장 걸림돌이 될 것 같았던 아루원이 자신의 편이 됐다.
그것만으로도 플루엘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동료들의 설득이 무척 쉬울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지금껏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두 세력이 마주 보고 섰다.
아무리 협력을 위해 모였다지만 긴장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들은 말이 있어 대놓고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직까지 눈에 살기를 띤 사람은 몇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듯, 조용히 상대를 탐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월인들의 앞에 서 있는 플루엘을 시장은 밝은 얼굴로 쳐다봤다.
“약속을 지키셨군요.”
“어머, 믿지 못하셨나요?”
“설마요. 다만 나이 먹어서 느는 건 늙은이의 한탄과 걱정뿐이니, 아무쪼록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농담을 할 정도로 시장도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일단 서로의 조건을 먼저 확인해 봐도 괜찮을까요?”
플루엘의 옆으로 한 사내가 나오며 말했다.
플루엘이 눈을 찌푸리며 그, 아루원을 쳐다봤다.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아니. 난 전적으로 널 믿는다. 하지만 이번 건 별개야. 너에 대한 나의 믿음과 우리 민족의 미래. 같은 저울에 놓을 순 없잖아.”
‘이게 정말 그 아루원?’
일순 불쾌하게 생각됐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루원의 말이 옳다.
하지만 역시 아루원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게 플루엘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플루엘이 조용해지자 아루원이 시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탈출을 돕는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이 탈출을 할 때 같이 지구로 향한다. 그 후, 당신들은 우리가 지구에 정착하도록 돕는다. 다른 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시장이 답했다. 아루원은 시장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그 진의를 확인하듯이.
“알겠습니다.”
아루원이 말했다.
“확증도 무엇도 없는 도박 같은 이야기지만, 서로의 수단이 한정된 이상 그저 상대가 그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겠죠. 당신들을 믿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성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루원이 성윤을 쳐다봤다.
“당신은….”
그의 왕족의 젬을 빼앗아가고 그가 폭주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대.
여기서는 플루엘도 긴장했다.
하지만 아루원은 별 다른 발작 없이 성윤을 대했다.
“나이트, 우성윤 씨.”
“네. 일단 지구에서는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과분한 별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분명 유용한 별명이죠.”
성윤의 시선이 잠시 아루원이 들고 있는 활로 돌아갔다.
틀림없다. 예전 자신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궁수는 그가 분명했다.
아루원도 성윤의 눈동자가 자신의 활을 비췄다는 것도, 내심 약간의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도 역정도 없이 담담한 눈길로 성윤을 쳐다봤다.
플루엘의 눈에 어린 걱정이 더 진해지고 주변에 긴장감이 달렸다.
성윤이 다시 아루원을 바라봤다.
“제 모든 명성과 부를 모두 쏟아부어서라도 당신들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건 여기 있는 다른 연결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지구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갈등의 해소일까. 아니면 잠시 봉합된 것뿐일까.
하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당분간 갈등이 폭발할 가능성이 한없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성윤씨.”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렇게 두 세력은 화합의 첫 번째 발을 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