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덥석!
성윤은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는 걸 느꼈다. 감촉은 두 개. 양쪽 팔 모두에서 느껴졌다.
그레이스와 에밀리였다.
심약한 에밀리는 종종 이렇게 성윤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그레이스는 웬만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레이스마저 무의식적으로 성윤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 정도로 저 불빛의 반복은 무거운 신호였다.
“흡!”
콰아앙!
손을 뻗어 마법을 일으킨다. 달의 지면이 융기하며 뾰족한 석순이 연달아 솟아올랐다.
일단의 몬스터들이 온몸이 꼬치가 되어 죽었다.
드드드드드!
성윤이 끼고 있던 통신기가 울렸다. 시청을 떠날 때 시장에게 받은 것으로, 공기가 없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골전도 통신기다.
성윤은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 성윤 씨, 들리십니까?
상대는 시장이었다.
성윤은 통신기를 조금 강하게 두드렸다. 그걸로 시장도 지금 성윤이 무슨 상황에 있는지 짐작했다.
-우주라서 말을 못 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래도 불빛은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 신호대로 우리는… 암스트롱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들린 시장의 목소리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죽기 직전의 노인이 내뱉는 단말마처럼 들렸다.
- 지금부터는 암스트롱의 보호보다는 시민들의 피난을 우선합니다. 이미 대피소에도 연락이 갔습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15분 뒤에 대피소를 개방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 안에 최대한 암스트롱 내부의 적을 격멸해주세요. 그리고 사람들의 대피를 도와주세요. 사람들은 올드린 우주 공항으로 대피할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지구로 귀환시킬 겁니다.
묻고 싶은 건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우주선에 수용할 것인지, 그 와중에 죽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지.
하지만 지금은 시장의 말에 일일이 질문을 던질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자신의 탈출경로에조차 관심 없이 성윤은 묵묵히 시장의 말을 들었다.
***
성윤은 공항을 벗어나 다시 암스트롱으로 들어갔다.
팀과 그레이스, 에밀리는 공항에 남겨뒀다.
암스트롱을 포기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으로 작전이 바뀌었다고 해도 올드린 우주 공항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중요도가 더욱 올랐다.
그리고 우주 공항에 대기하며 강력한 화력 지원으로 활약하는 게 마법 위주의 전투를 하는 그레이스와 에밀리에게는 나았다.
그리고 팀은 그 두 사람의 보호 및 공항을 지키는 튼튼한 벽 역할을 위해 남았다.
우워어어어어!
암스트롱에 들어가자마자 몬스터의 괴성이 들린다.
‘아직 소리가 들려?’
드글대는 몬스터들보다는 그게 더 놀라웠다.
해진 거적데기처럼 이곳저곳에 구멍이 난 암스트롱에 아직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공기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얼마 전에 설치한 안전장치를 작동시켰나?’
슈퍼 골렘에 의해 암스트롱이 습격당했던 걸 교훈 삼아, 시장이 암스트롱 곳곳에 거대한 공기 공급 장치를 설치했던 걸 기억했다.
아무래도 그 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격벽폐쇄가 제대로 작동할 때나 의미 있는 것이다. 지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슬아슬 버티고 있는 공기도 얼마 안 있어 사라질 것이다.
“흡!”
성윤은 다짜고짜 할버드를 휘둘러 눈앞에 있던 몬스터를 베어 넘겼다.
‘그래도 다행히 예상보다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적어.’
그건 분명 희망적인 일이었다.
‘두 미궁에 파견된 연결자들이 잘 버텨주고 있는 모양이야.’
많은 병력을 상대로 소수의 병력이 싸울 수 있는 전법 중 하나는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 병목 지형을 소수의 정예병으로 지키는 방법은 무척이나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암스트롱 내부의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장이 생각해낸 방법도 그것이었다.
지금 올드린 우주 공항을 지키는 연결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결자들이 두 미궁의 입구를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을 것이다.
단 한 마리의 몬스터라도 더 바깥으로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
‘한 마리라도 더 죽여야 해!’
그래야 대피소에서 나올 시민들이 더 안전할 수 있다.
성윤은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몬스터 한 마리가 도끼에 스쳤다. 성윤은 녀석을 힐끔 바라보고 다른 몬스터에게 향했다.
끄, 끄그그그그!
몬스터가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상처를 입은 곳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끓어오르며 부패가 시작됐다.
다음으로 마주친 몬스터는 단단한 외피가 인상적인 몬스터였다. 마치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윤은 망치를 들었다.
콰아앙!
폭발이 일었다. 단 일격에 바위 같은 외피가 날아갔다.
망치의 단단하고 묵직한 일격과 부딪친 자리에서 일어난 폭발이 대미지를 더욱 증폭시켰다.
성윤은 쉬지 않고 이번엔 할버드를 소환시켰다.
그대로 멀리 있던 몬스터에게 집어 던졌다. 비명을 지르는 몬스터를 무시하고 이번엔 검을 소환시켰다.
콰르르릉!
검이 훑고 지나간 몬스터의 상처로 막대한 전격이 흐른다. 상처 부위가 새까맣게 탄 몬스터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시간이 되기까지 한 마리라도 더.
성윤의 무기 휘두르는 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콰직!
성윤의 앞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거의 무아지경으로 무기를 휘두르던 성윤이 우뚝 멈췄다.
성윤의 앞에 떨어진 것은 시체였다. 두 동강이 나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완전히 분리된 그 시체에는 다른 부분도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다.
쿠웅!
연결자를 시체로 만들어 내동댕이친 게 분명한 몬스터의 발이 성윤의 앞에 드리워졌다.
‘베히모스.’
성윤과는 인연이 깊은 몬스터.
녀석이 다시 한번 성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우우우우!
베히모스가 울부짖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베히모스도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몸 곳곳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리고 있고, 다리 중 하나는 깊이 베여 걸음을 걸을 때마다 크게 절뚝거렸다.
무엇보다 베히모스의 왼쪽 눈은 피가 줄줄 흘리는 채 감겨 있었다.
‘이 정도라면…!’
런던의 베히모스보다는 강하겠지만, 성윤도 런던에서의 성윤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베히모스는 부상을 입은 상태.
‘최대한 빨리 끝낸다!’
성윤은 크게 도약했다. 눈을 다쳐 사각지대가 된 베히모스의 왼쪽을 적극 활용했다.
우워어어어어!
녀석이 성윤을 찾아 울부짖었다.
하지만 성윤은 녀석의 부상당한 왼쪽 눈과 건물들을 이용해서 용케 시선을 피했다.
성윤이 베히모스의 머리 위로 높이 떠오를 때까지 베히모스는 성윤을 찾지 못했다.
성윤은 날개를 폈다. 그리고 베히모스의 머리를 향해 가속했다.
“흡!”
콰직!
검이 베히모스의 머리에 꽂혔다. 검은 단단한 머리뼈에 막혀 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윤은 당황하지 않고 망치를 들었다.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콰아앙!
크아아아아아악!
성윤이 거대 몬스터를 사냥할 때 즐겨 쓰는 수법.
검이 베히모스의 머리 깊이 꽂혔다.
뇌수를 검날이 헤집고 전격이 끓어오르게 한다.
베히모스의 비참한 울음과 난동도 잠시.
쿵!
베히모스의 거체가 쓰러졌다.
강력한 몬스터인 베히모스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쓰러뜨렸다. 하지만 성윤의 이마에는 땀 한 줄기가 흘러 내렸다.
‘운이 좋았어.’
시간상 여유가 없는 지금, 성윤은 조금 도박성이 짙은 수를 썼다.
아무리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운이 없었다면 단번에 베히모스의 머리 위로 올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공중에서 베히모스의 공격을 받아 지면에 처박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도박수를 써야할 정도로 성윤은 시간이 급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통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연결자를 잠시 애도한 다음 성윤은 다시 몬스터 퇴치에 들어갔다.
번쩍! 번쩍!
한창 몬스터들을 성윤이 도륙하고 있을 때, 암스트롱의 포기를 알리는 불빛이 갑자기 변했다.
푸른색의 빛만 오롯이 깜박거렸다.
‘피난 신호다! 벌써 15분이 지났나!’
긴장감이 더욱 올라갔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다행히 암스트롱의 거리는 성윤과 다른 연결자들의 활약에 대부분이 정리되어 있었다.
격렬한 전투음이 발생하는 곳은 두 미궁이 있는 지역 정도였다.
- 대피소 문을 열겠습니다!
시장의 통신이 들려왔다. 얼마 안 있어 건물 또는 지하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씩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부 피난소에 적재되어 있던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암스트롱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더라도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대략적인 상황이 대피소 안으로 알려진 듯 사람들의 움직임은 다급했다.
‘내가 맡을 곳은 이쪽인가.’
성윤은 몸을 돌렸다.
시장은 모든 대피소를 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사람들끼리 밀려 상당한 수의 시민이 압사당할 게 뻔했다. 때문에 피난소의 문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순차적으로 열렸다.
하지만 그 말은 시장이 살릴 사람을 선별하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주선은 충분하지 않았다.
‘모두 살릴 수는 없어.’
성윤은 냉정하게 끊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구역에 도착했다.
“우와아아악!”
“꺄아아아악!”
마침 비명이 들린다. 몬스터 한 마리가 피난민들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성윤은 바로 할버드를 던졌다.
콰직!
피난민들을 향해 손을 뻗던 몬스터의 목에 정확히 할버드가 꽂혔다. 목구멍에서 피 섞인 울음소리를 내며 몬스터가 쓰러졌다.
“빨리 이동해요!”
성윤이 외쳤다. 사람들은 허둥지둥 우주 공항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윤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배정된 구역을 철통처럼 지키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끊임없이 대피소에서 나왔다.
아무리 지구 바깥에 있다고 하더라도 암스트롱은 도시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상주 인원 자체의 규모가 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몬스터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 이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주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성윤이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눈에 띄는 몬스터는 없었다.
성윤은 옥상에서 내려와 달리기 시작했다. 시장에게서 새로운 임무가 내려온 것이다.
도시 안의 몬스터들이 대부분 퇴치되어 어찌 보면 암스트롱은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시장은 시민들을 지키는 연결자들의 수를 대폭 줄였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는 아주 잠시 되찾은, 금이 간 기둥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에 불과했다.
시장은 그 평화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여유가 생긴 연결자들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턱!
성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잠시 안정을 되찾은 다른 암스트롱의 구역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막아아아!”
꾸에에에엑!
커다란 대미궁의 입구에 많은 연결자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대미궁 안으로 그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렸다.
많은 경험을 가진 성윤조차 잠시 멈칫할 정도의 몬스터의 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윤은 마음을 다 잡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시작의 미궁이든 대미궁이든 암스트롱 외부든. 어디든 뚫린다면 그 때야말로 암스트롱은 끝이다!’
미친 듯 날리는 죽음의 향기를 애써 외면하면 성윤은 무기를 휘둘렀다.
그렇게 다른 연결자들과 함께 성윤이 얼마나 날뛰었을까.
- 성윤 씨.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평소와 같은 침착한 목소리를 되찾은 시장이 성윤에게 무전을 했다.
- 지금 당장 시청으로 귀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