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성윤은 앞서나가는 러셀과 브루스의 뒤를 따랐다.
꾸득!
반쯤 탄 무언가가 발에 밟혔다. 둥근 모양의 잿더미가 바스러졌다.
‘나무인가?’
바로 옆에 검게 타 허물어진 목재가 보이는 게, 집의 파편인 것 같았다.
발끝을 지면에 두드려 재를 털어냈다.
하지만 곧 다른 잿더미를 짓밟고는 더 이상 부츠에 붙은 재를 털어내는 걸 관뒀다.
“끔찍하네요.”
에밀리가 슬쩍 성윤의 옆에 붙어 소매를 잡았다.
성윤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매캐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마을의 불탄 잔해뿐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잔해 사이사이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전투를 하다 죽은 사람들인 터라 멀쩡한 시체는 없었다. 하나하나가 끔찍한 상처를 입고 죽어 있었다.
전투에 많이 익숙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여린 성격의 에밀리가 충분히 싫어할 만한 광경이었다.
성윤과 팀, 그레이스조차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전부 테러리스트입니까?”
“그렇다네. 생각보다 많지?”
현우가 앞에 있는 시체를 발로 툭 차 옆으로 치웠다.
그 행위에 러셀과 브루스조차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증거는?”
러셀이 물었다. 대답을 한 건 현우가 아니었다.
“그야 저희는 모르죠. 저희는 상층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니까요. 뭔가 의문사항이나 따질 게 있다면 저희 사장님께 따지시는 게 빠르실 걸요?”
어느새 진수가 현우의 곁에 서 있었다.
그 능글능글한 어투에 브루스의 눈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러셀이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과연. 그렇다면 이 자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증거는 자네들의 증언뿐이라는 건가?”
“그렇지. 자네들이라면 이 자들의 증언도 얻고 싶겠지만 우리 증언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걸세.”
현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있는 테러리스트들은 전부 죽였으니까.”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더 물어볼 게 있나? 없다면 우리는 슬슬 철수하고 싶은데 말이야. 볼일도 끝났고.”
“사장님의 ‘자원봉사’ 때문에 괜히 우리 시간만 날려버렸다니까요. 우리도 우리 생활이 있으니 계속 월석을 채취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 꼴을 만들어 놓고 그냥 가겠다고?”
브루스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태연했다.
“자네들은 우리를 아무런 죄도 없는 마을을 학살한 인간들로 몰고 싶은 건가? 여긴 테러리스트들의 마을이었어. 전멸시키는 게 당연한 마을이야. 게다가.”
현우의 눈썹이 처음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휘었다.
“자네들에게 우리 행동을 방해할 권한이 있나?”
“우리는 암스트롱의 의뢰를 받고 왔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봐, 브루스. 자네 친구를 보고 좀 배우게. 러셀이 괜히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줄 아는 건가? 만약 그런 권한이 있었으면 가장 먼저 휘둘렀을 친구야. 러셀이 그러지 않는다는 건, 우리를 체포하거나 하는 권한은 받지 않았다는 얘기지.”
브루스가 러셀을 쳐다봤다.
러셀은 입을 꾹 다물고 현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봤다.
불타고 망가진 집의 잔해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파비온의 연결자들이 멀뚱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정면으로 붙는다면 이쪽도 피해를 좀 입겠지.’
자신과 브루스가 있긴 하지만 저쪽에도 만만찮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현장은 보존해야겠어. 그리고 이 건은 암스트롱 상층부에 보고하겠네.”
“얼마든지. 우리는 찔리는 게 없어. 자네들의 현장 보존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빠르게 철수하는 게 좋겠지?”
“그럼 가.”
러셀이 뒤쪽, 대미궁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를 가리켰다.
“고맙네. 그리고 너무 험악한 얼굴 하지 말고. 솔직히 외진 곳에 있는 이 대미궁 깊은 곳에 아지트를 만들어 활동할 놈들이 테러리스트 말고 또 있나? 암스트롱의 지휘 아래서 허가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런 수상쩍은 곳을 만들 리 없잖아. 그러니 너무 그렇게 살인자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보지 말게.”
“그래도 스스로 무척 수상한 일을 했다는 자각은 있지?”
러셀은 일단 얼굴을 풀었다. 아직 무척 수상쩍기는 하지만 현우의 말은 일단 아귀가 맞긴 한 것이다.
“그건 우리 사장님한테 따지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따진다고 해도 우리가 아니라 암스트롱에서 직접 나설 테니, 자네들 회사도 골치 좀 썩을 걸세.”
“그거야 말로 회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
현우는 파비온의 동료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은 바로 대미궁의 출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우도 진수를 데리고 출구 쪽 통로를 향해 걸었다.
그가 성윤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였다.
“이제 한시름 놔도 돼.”
현우가 성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은 전부 전멸했으니까.”
한 번 웃어준 후 현우는 성윤에게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잠시 후, 불에 탄 잔해와 시체가 뒤섞인 대미궁의 공동에는 성윤 일행만이 남게 됐다.
***
“뭔가 눈치 채는 게 있을까요?”
대미궁을 올라가던 진수가 힐끗힐끗 뒤를 돌아봤다.
현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뭔가 눈치는 채겠지. 그게 어디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태평하시네요.”
“애초에 무리하게 밀어붙인 계획이야. 일이 터지면 사장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현우는 러셀과 브루스를 떠올렸다.
현존 최강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연결자.
저 둘과 싸우는 건 현우라도 나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현재 암스트롱 시장의 조바심이 크다는 거다. 워낙에 보수적인데다가 의심 많은 작자니 저 둘을 한꺼번에 투입한다는 초강수를 둘 수 있었던 거겠지.”
그 어떤 조사단이 온다고 해도 습격을 해 입을 막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저 둘을 본 순간 현우는 그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붙어도 지진 않겠지만 둘 중 하나는 놓칠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니 우성윤도 있던데요. 그 작자도 시장 마음에 쏙 들었나 봐요.”
현우의 말처럼 보수적인 시장은 몇몇 신뢰하는 협력자들만 중요한 임무에 투입하는 걸 선호했다.
따라서 성윤이 이번 일에 끼었다는 것 자체가 성윤에 대한 암스트롱 시장의 신뢰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작자를 죽이려면 꽤나 머리 아프겠어요.”
“이젠 상관없지. 우리 일도 아니잖아? 이제는 저 녀석이 우성윤을 어떻게 처리할지 구경이나 하자고.”
현우의 시선이 앞서 가던 거대한 덩치에 꽂혔다.
이번에 사장에게서 성윤의 척살 명령을 받은 기수가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무리 앞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종종 자신의 눈에 들지 않는 연결자들에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고함을 쳐댔다.
“기수 씨는 아직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요.”
진수의 말에 현우는 웃었다.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나를 욕하며 자기는 다를 것처럼 나대더니, 이번에 거하게 말아 먹었잖나.”
“얼마나 놓쳤죠?”
“많이.”
애초에 그들은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도 계획도 없이 오로지 마음만 급해 행한 습격.
물론 압도적이긴 했다.
마음만 급했던 게 오히려 이점이 되어 기습의 장점을 완벽하게 살린 것이다.
하지만 파비온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적의 몰살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비추어보면, 이번 습격은 철저하게 실패였다.
“상대한테 포털이 있는데 완벽한 몰살이 가능할리가요. 자기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어깨에 힘을 딱 넣고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웃기다니까요.”
‘뇌에 근육만 가득 들어 찬 멍청이 같으니.’
진수는 기수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제 파비온도 포털의 존재를 알게 됐네요. 어떻게 나올까요?”
“당연히 포털을 확보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겠지.”
자신들이 예전에 했던 짓을 숨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포털이란 존재의 가치가 얼마만한지는 동인도 잘 알 것이다.
그 욕심 많은 인간이 포털에 욕심을 안 낼 리가 없다.
“지구로 통하는 포털만 있다면 암스트롱의 영향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국가들은 연결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암스트롱에 머무는 동안 엄청난 돈을 쓰게 만들었다.
연결자나 기업들이 그것에 불만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긴?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자신이 소속한 회사에 대해 말하면서도 현우의 말에는 일체의 정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하겠지.”
***
“자, 그럼 이걸 어쩐다.”
러셀은 허리에 팔을 짚고 주변을 둘러 봤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훌륭한 폐허 더미다. 간간이 널려 있는 시체들은 덤이다.
“일단 시체들이 썩진 않을 테고.”
적어도 부패로 인해 증거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함부로 건드리는 것보다는 전문적인 사람들을 부르는 게 낫겠지?”
“그게 낫죠.”
그들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다.
당연히 부서진 마을에서 뭔가의 흔적을 찾아낸다거나 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현장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낫겠습니다. 뭔가 우리가 건드렸다가 흔적 같은 게 훼손되면 안 되니까요.”
“그건 그렇지.”
성윤의 말에 러셀은 동의했다. 러셀의 파티원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그럼 일단 이 일을 암스트롱에 알려야겠네.”
그러기 위해서는 대미궁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지키겠어. 혹시라도 파비온 놈들이 이곳을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
브루스가 근처에 있는 돌덩이에 앉았다.
“그러면 우리도 남지. 아무래도 네 파티만으로는 파비온이 딴 마음을 먹었을 때 완벽하게 막기 힘들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러셀이 성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고는 자네에게 부탁하겠네만. 괜찮은가?”
“그 정도야 괜찮습니다.”
“연락만 하지 말고 아예 암스트롱에 돌아가서 시장의 지시를 받게나. 무전으로만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알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으니까.”
“괜찮겠어? 저 친구는 지금 습격자 놈들한테 찍혔다며? 가는 중에 습격을 당하면 어떡하려고? 여기 있는 놈들이 정말로 습격자 놈들인지는 모르잖아?”
브루스가 자신이 앉아 있는 돌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때렸다.
하지만 성윤은 브루스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상관없습니다. 탈출 방법은 있으니까요.”
월석 채취를 방해받을까봐 걱정을 했을 뿐, 포털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이상 성윤에게 도주는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걱정 없겠네. 암스트롱에 잘 좀 말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브루스는 바위 위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
성윤 일행은 대미궁에서 나왔다.
이미 파비온은 철수를 끝냈는지 남은 건 이리저리 패인 월면주행차의 바퀴자국뿐이었다.
바로 암스트롱에 현 상황을 무전으로 간단하게 알렸다. 그리고 암스트롱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포털을 타고 이동한다면 빠르고 편리하지만 러셀, 브루스에게 포털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 끌고 온 월면주행차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암스트롱의 허락 하에 그들은 월면주행차를 이용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암스트롱까지의 거리가 반 정도로 줄었을 때였다.
차가 급정거를 했다.
뒷자리에서 쉬고 있던 성윤, 그레이스, 에밀리가 운전자인 팀을 쳐다봤다.
팀이 당황한 얼굴로 차창 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람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상당한 부상을 입은 듯 온몸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일행은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성윤이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꽤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다행히 살아는 있었다.
성윤은 그 사람을 안아 올렸다.
여성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성윤은 크게 놀랐다.
‘소영이 어머니?’
그녀는 얼마 전에 찝찝하게 헤어졌었던 소영이의 어머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