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그 말의 무게감이 좌중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현우가 나름 성윤과 친분이 있다는 걸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런 그가 현우가 의심스럽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껄렁껄렁한 분위기를 집어던진 브루스가 물었다.
그의 눈이 여느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고요했다.
“실례지만 여러분은 시장님께 저희를 습격한 습격자들의 이동 방식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들은 적 없는데?”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 여기저기 귀신처럼 나타나는 놈들이었지? 혹시 뭔가 밝혀진 거라도 있나?”
러셀과 브루스가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두 분은 아직 모르는가 보군.’
그 말은 곧 포털의 비밀을 시장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최강의 연결자라 불리는 이 두 분에게까지 말하지 않았나.’
러셀과 브루스 모두 각국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연결자다보니 아무래도 포털에 대해서 떠벌리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고대 도시 정찰 때도 끼지 않은 사람들이니.’
“그럼 정확하게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아니, 물을 것도 없나. 그 능구렁이 시장 놈이 숨기라고 한 게 뻔하겠지.”
브루스가 불쾌하게 내뱉었지만 성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러셀이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그레이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공주님도 알고 계신 일이었군.”
러셀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건 악의가 담긴 게 아닌, 놀림조의 말투였다.
물론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섭섭함에 부리는 투정 끼도 담겨 있었다.
“죄송해요.”
“아니, 괜찮다. 네가 본국에조차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니까. 괜히 죄책감 느끼지 마려무나.”
“한 가지 첨언하자면, 그레이스 씨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자는데 탐탁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반대하셨습니다.”
“그렇군.”
성윤의 말에 러셀의 작은 앙금마저 날아갔다. 그레이스가 성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어쩔 수 없나.”
“어이. 너희 공주님이 저쪽에 붙어 있다고 너무 쉽게 넘어간 거 아니냐?”
브루스는 아직 불만이 있는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러셀은 브루스의 투덜거림에 눈 하나 깜짝할 인간이 아니다. 그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럼 숨기고 있는 걸 빼고, 왜 자네가 그에게 의심을 품었는지 간단하게라도 말을 할 순 없나?”
“저희가 숨기고 있는 걸 현우 씨는 자체적으로 알아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현우 씨는 그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으음!”
시장이 직접 입을 막을 정도면 굉장히 중요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그걸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소리는 분명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솔직히 이 바닥에서 중요 정보를 독점해 이득을 취하려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래서 저도 조금의 의심을 품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말 하지 않고 있었던 거고요.”
“음, 돌출행동을 하긴 했지만 뭔가 뚜렷하게 잘못을 범한 건 아니란 거군.”
“솔직히 나는 파비온 놈들이 암스트롱의 뒤통수를 치진 않을 거라고 봐. 그저 뭔가 독점적인 이득을 볼 만한 일을 찾은 거겠지. 그놈들이 그런 걸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시장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뭐, 암스트롱이 처해있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녀석의 성격상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건 이해가 가긴 한다만.”
브루스가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러셀도 브루스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저 두 사람의 성격차가 이번 임무에 대한 반응을 갈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의뢰를 받았으니 하긴 해야겠지. 녀석들의 뒤를 쫓으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만약 그게 나쁜 일이라면 엉덩이나 걷어차 주면 되겠지.”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기지개를 켠 그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그럼 대충 끝난 거지? 움직이자고. 그게 토끼 사육장이든 드래곤의 둥지든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확실해질 테니까.”
그러며 그는 자기 파티를 이끌고 어기적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기 멋대로 회의를 끝내버린 브루스를 러셀은 못마땅한 눈으로 한 번 쳐다봤다.
하지만 브루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비온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시간이었다.
***
“제가 장담하는데 100% 들켰을 거예요.”
미궁 안을 움직이며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진수가 말했다.
“암스트롱이 병신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눈치를 못 챘을까요. 실제로 몇 번이나 무슨 일 있냐고 물어 왔었다면서요?”
“그랬다고 하지.”
“하여간 우리 사장님도 대체 뭔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진수는 현우에게 투덜투덜 불평을 했다.
갑작스러운 집합에 이은 대규모 원정에. 진수는 상당히 뿔이 나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아가씨 다 넘어 왔는데 이게 뭐예요. 짧게라도 발리에 가서 질펀하게 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파비온의 이번 행동이 그의 연애사정을 방해한 모양이다.
현우가 진수에게 눈짓을 줬다. 둘만 있을 때라면 병신 같은 사장에 대한 불만 따위 얼마든지 받아주겠지만, 지금 이곳엔 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비온의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은 진수를 불쾌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발작하는 놈이 저놈이고.’
진수에게 씩씩대며 다가오는 멧돼지 같은 놈을 보고 현우는 작게 낄낄거렸다.
“이 새끼, 다시 한 번 말해 봐!”
덥석!
현우가 멧돼지 같다고 표현한 사내가 진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거대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가장 먼저 드는 이미지는 그것일 것이다.
척 봐도 2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온몸에 붙은 근육이 그의 덩치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머리는 빡빡 밀었고 얼굴은 험악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겉모습은 적어도 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라? 기수 씨가 무슨 일이세요?”
우왁스러운 손에 멱살을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도 진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봐도 대놓고 빈정거리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 이 새끼가 지금 사장님을 대놓고 씹어댔으면서, 뭐? 무슨 일?”
“민주국가 사람이 할 말도 못 하나요? 아, 그러고 보니 기수 씨는 사장님의 충실한 개였지요? 이거 제가 잘못했군요. 아무리 짐승이라도 개 앞에서 주인 욕을 하다니. 확실히 제가 잘못했네요.”
그러며 진수는 개 흉내를 내며 ‘멍! 멍!’ 짖었다.
“이…새끼가…!”
그의 눈이 핏발이 섰다.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맞춰 진수의 표정도 사라지며 눈에 살기가 서렸다. 서로가 마력을 움직이려 하던 그때였다
텁!
기수의 팔을 현우가 잡았다.
“그만 둬라. 전투를 앞두고 내분을 일으켜서 어쩌잔 거냐?”
“넌 빠져!”
번뜩이는 눈이 섬뜩하다.
기수는 이성이 날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내분이 일어나면 사장님도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사장님. 그 말이 나온 순간 기수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단순한 녀석이라며 현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시비를 건 건 이 녀석이 먼저다.”
“그건 그렇군.”
현우가 진수를 바라봤다.
“네가 먼저 사과를 해라.”
“네네. 제가 무~지 잘못했습니다요. 앞으로는 사장님께 절대 충성을 맹세합죠.”
“김진수!”
현우의 억양이 조금 올라갔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느낀 것일까.
진수는 혀를 차며 손을 들었다.
“알았다고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번 사과도 진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기수도 이보다 더 사과를 받을 순 없다고 여겼는지 진수의 멱살을 놨다.
하지만 그냥 놓지는 않았다.
“…이 일은 사장님께 말씀 드리마.”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충고하건데, 이번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에 사는 새끼들이 언제 자신들이 당한 일을 암스트롱에 얘기할지 몰라. 암스트롱과 놈들의 적대가 끝까지 간다고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만약 그놈들이 암스트롱에 모든 일을 얘기한다면 우리는 끝장나는 거나 마찬가지야. 멍청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멍청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다급한 입장이란 걸 명심해라.”
그가 슬쩍 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전부 다 어느 분께서 예전 뒤처리를 잘 하지 못해 화근을 남겨둔 덕이지.”
“이거 참 부끄러운걸.”
현우가 낯간지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진수와 마찬가지로 그 어투에 진심이란 찾을 수 없었다.
그 태도에 기수는 울컥했다. 하지만 다른 화제가 생각났는지 다시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 정범이 딸년 회사 소속의 1세대 연결자와 친하게 지낸다며.”
“우성윤말인가? 나름대로 친분이 있긴 하지.”
“그 녀석의 처단, 사장님께서 내게 맡기시기로 했다.”
“그런가?”
현우의 반응이 심드렁했다.
자신이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기수의 얼굴이 다시 시뻘개졌다.
계속 현우와 진수를 노려보던 그가 콧방귀를 끼고 등을 돌렸다.
“네놈 새끼 교육 좀 똑바로 시켜.”
그리고 기수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진수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작아 바로 옆에 있는 현우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섣부르게 도발하지 마라.”
현우가 진수에게 말했다.
“네. 반성하고 있어요.”
물론 태도와 행동을 보면 신빙성 가는 발언은 아니었다.
작은 트러블이 있은 후 현우와 진수는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귀 밝은 다른 연결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슬리네요. 저 작자.”
진수가 말한 대상은 당연히 기수였다.
“어차피 나중에 다 죽을 놈들이.”
“원래 자기가 언제 죽을지는 대부분 모르는 게야.”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저 작자가 우성윤을 죽일 거라는데.”
이번 사건으로 동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기에게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이참에 한꺼번에 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여간 단세포라니까.’
현우는 그를 비웃었다.
“하려면 하라지. 난 도움을 주지도, 방해를 하지도 않을 생각이니까.”
말만 들으면 완전히 무관심한 것 같다. 하지만 진수는 현우의 눈에 기대감이 번들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그것도 저놈이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때의 얘기겠지.”
“그건 그렇죠.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거의 다 왔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다음 층일 거야.”
“그럼 아까 저 작자가 말한 현우 씨의 못다 한 뒤처리를 이번에는 깔끔하게 끝내볼까요?”
끈적거리는 농염한 살기를 숨길 생각도 없지 진수는 입술을 핥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