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254화 (254/354)

제254화

다시 들어간 첨탑 방의 모습은 예전과 같았다.

월석을 들이부은 장치와 더불어 섬뜩한 벽화도 그대로였다.

“아, 성윤 씨 오셨어요?”

월석 장치를 스케치하고 있던 첼시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그녀 옆에는 소장도 같이 있었다. 소장이 성윤을 보고 반색했다.

“성윤 씨! 마침 잘 됐습니다. 부탁드릴 게 있었는데 말이죠.”

“무슨 부탁입니까?”

“저 장치에 월석을 들이부은 후에 일부 장치가 작동을 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저 장치에 월석을 다시 한 번 투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윤의 말을 들어보면, 저 기계장치가 이 건물에 있는 기계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연료탱크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연료를 더 채워 넣으면 뭔가 더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소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려울 건 없죠. 하지만 굳이 제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이 장치는 성윤 씨가 발견하고 작동시킨 것입니다. 아무래도 성윤 씨가 넣는 것이 장치가 작동할 확률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성윤은 망설일 것 없이 보관의 젬에서 월석을 꺼냈다. 하지만 소장이 그를 막았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월석을 비교하면서 시험을 해보고 싶거든요. 월석의 등급이나 가공된 월석과 가공되지 않은 월석, 대미궁과 일반미궁에서 나온 월석 등으로 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성윤은 월석을 다시 집어넣었다.

“뭔가 발견하신 건 있습니까?”

“아직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이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 있던 소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죽어갔다. 옆에 있던 첼시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발견한 건 이 도시가 처음부터 이곳에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다는 정도일까요?”

“이곳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뇨?”

“그러니까….”

소장의 시선이 움직였다. 성윤의 시선도 자연스레 소장의 시선을 따랐다.

소장이 바라본 곳은 그 불길한 벽화가 그려진 곳이었다.

“마치 허공으로 던져져 이 미궁 안에 도시 전체가 처박힌 것 같습니다.”

거대한 사각형 형태의 계획도시로 보이는 이 고대 도시는, 한쪽이 뚝 잘려나간 것처럼 도시의 일부분이 벽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경계도 불규칙적으로 부서져 있었다. 마치 미궁에 억지로 쑤셔 넣어져 도시 경계 이곳저곳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형태였다.

성윤의 표정이 굳었다.

소장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안 것이다.

“저 벽화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는 부정해주길 바랐습니다만….”

성윤은 다시 벽화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비친 건 달의 중심에서 아득바득 발버둥치는 괴수의 그림이었다.

***

플루엘은 머리가 아팠다. 티오투도의 죽음 이후 그들, 월인들의 사기는 크게 하락했다.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고 다툼도 잦아졌다. 그럴 때 그들을 조정하고 이끌어야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지만, 문제는 그 리더조차도 흔들리고 있었다.

플루엘, 아루원, 티오투도.

이 세 명이서 리더의 자리를 맡고 있었지만, 티오투도는 죽고 아루원은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

남은 건 플루엘뿐. 하지만 플루엘도 티오투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상태다.

제대로 동료들을 이끌 수 없었다.

‘어쩌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플루엘은 해결 방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엄마?”

머리를 부여잡고 앉아 있는 그녀 옆으로 조그마한 소녀가 다가왔다.

“소영이 왔니?”

당장 얼굴에 잔뜩 들어찬 고민을 없애고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는지 그녀의 퀭한 얼굴은 여전했다.

소영이가 플루엘의 얼굴 이곳저곳을 들여다봤다.

그럴수록 플루엘은 얼굴에 지은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엄마, 어디 아파?”

“아니야. 엄마는 괜찮아.”

그녀는 아이를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아무리 힘이 든다 해도 아이에게 그걸 티낼 수는 없다.

그게 부모이고 그게 어머니란 존재다.

똑! 똑!

귀여운 딸의 온기를 느끼는 걸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다. 플루엘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 밖을 향해 말했다.

“누구세요?”

“나다. 플루엘.”

플루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소영이가 몸을 움츠렸다.

대답한 틈도 없이 그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허락도 받지 않고 집에 들어온 아루원의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가 어쩐 일이야, 아루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싸늘해진다. 소영이가 품속에서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루원을 노려보는 건 멈추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다.”

아루원이 소영이를 쳐다봤다.

“소영이는 잠시 방에 들여보냈으면 한다만.”

플루엘과 소영이는 놀랐다.

언제나 꺼림칙한 눈빛으로 소영이를 보고, 절대로 한소영이란 이름을 입에 담지 않던 그가 소영이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소영아, 잠시 들어가 있을래?”

소영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의 품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달리듯 향했다.

방문을 닫기 전 당황한 눈으로 아루원을 바라 본 건 덤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팔짱을 끼고 아루원을 올려 봤다. 아니, 노려봤다.

소영이에 대한 태도가 누그러진 건 좋지만 고작 그걸로 아루원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에는 이번에 그가 행한 병신 짓이 너무 컸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다.”

그는 의자 하나를 빼 앉았다.

플루엘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어?”

그녀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아루원이 헛소리를 한다면 이번에야 말로 저 밉살맞은 턱에 주먹을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누구 덕에 말리던 티오투도도 사라졌으니까.’

그녀는 내심 이를 갈았다.

“왕족의 젬을 가진 이와 접촉하고 싶다.”

뿌득!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설마 이 와중에도!’

그가 왕족의 젬에 집착을 갖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와중에도 계속 집착을 할 줄은 몰랐다.

‘티오투도가 뭐 때문에 죽었는데!’

백 보 양보해도 지금 그 얘기를 꺼내면 안 됐다.

“…넌 결국 그 생각뿐이구나.”

티오투도가 생명을 걸고 그를 구했음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플루엘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아루원의 말이 더 빨랐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조금은 처연한 표정을 짓고 아루원이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협력을 구하고 싶다. 너와 티오투도의 의견대로 말야.”

주먹을 치켜들던 플루엘이 그대로 굳었다. 그녀의 커진 눈망울이 또륵또륵 굴렀다.

***

성윤은 암스트롱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도시를 연구하는 연구원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연결자뿐.

그 외에는 인적 하나 없이 침묵에 짓눌려 잇는 고대 도시에서 지내다 암스트롱에 돌아오니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근 한 달 만에 받는 휴식. 포털을 열어야 하기에 다른 연결자들은 종종 교대되어 암스트롱에 돌아갔지만, 성윤은 계속 도시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성윤 일행도 성윤 혼자 두고 떠나려 하지 않아, 일행 모두가 한 달을 고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암스트롱 상층부는 한 달 만에 성윤 일행에게 휴가를 준 상태였다.

기간은 이틀. 그동안 포털이 작동하지 않겠지만, 연구원들은 부정적이지 않았다.

이틀 정도라면 도시에 틀어박혀 연구만 해도 된다는 투였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암스트롱에 왕복하지 않고 고대 도시의 집을 사용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건 연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의 배려로 얻은 꿀맛 같은 휴가에 음식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성윤은 지금 장을 보러 나온 상태였다.

오늘의 음식 담당은 그인 것이다. 그는 익숙하게 식료품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이 화사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성윤은 식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지구의 여타 마트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물건의 양은 많았다.

질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여기가 달이란 걸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가격은 미친 듯 비쌌다.

성윤은 식료품점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음식 재료들을 넣기 시작했다.

‘390, 870, 1252, 1570, 1924….’

가볍게 가격을 계산한다. 고작 몇 개 담았다고 아득하게 불어나는 가격.

‘여기서 몇십 개 빼돌리면 바로 수십 억대 횡령범이 되는 건가?’

역시 달의 물가는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성윤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성윤에게 있어 수십 억 정도는 며칠 분의 맛있는 음식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이 되어 있었다.

묵직한 시장바구니의 무게를 느끼며 카운터로 가 식품과 카드를 내밀었다.

억 소리 나는 금액이 찍힌 영수증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종이봉투에 가득 든 식품들을 들고 나가던 때였다.

“저기요.”

누군가 성윤의 등을 두드렸다. 성윤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하지만 성윤의 관심을 자극한 건 그녀가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소영이 어머님?”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영이가 무척이나 착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게다가 신혜도 무척이나 귀엽고 착한아이던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둘의 이야기는 제법 잘 통했다. 둘 모두 딸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둘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자식들을 칭찬하며 담소를 나눴다.

만약 성윤의 동료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입을 벌리고 놀랄 만큼 성윤도 친근감 있게 대화를 나눴다.

“플루엘.”

플루엘의 뒤에 서 있던 아루원이 재촉을 했다.

“아,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넘어 서로의 육아 노하우까지 넘어간 화제를 그녀가 황급히 수습했다.

성윤은 그제야 플루엘 뒤에 서 있는 아루원에게 신경을 돌렸다.

‘저 사람은….’

성윤의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졌다.

딸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소영이를 학대하듯 몰아붙였던 아루원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성윤의 눈에 비친 아루원은 상당히 독기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의 날카로운 기세가 상당히 사라져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괜찮을까요?”

플루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성윤은 시계를 봤다. 아직 여유 시간은 있었다.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늦지만 않으면 된다.

“잠시만이라면 괜찮습니다.”

서로의 딸과 인연이 있는 사이다. 평소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과는 다르게 성윤은 흔쾌히 허락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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