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253화 (253/354)

제253화

쏴아아아아아!

물줄기가 피부를 때린다.

중년의 거친 피부는 연결자로 각성한 후 사라지고 갓 태어난 아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매끄러운 피부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성윤은 어깨를 들어 올렸다.

얇은 검에 당한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흉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를 성윤은 살짝 쓸어봤다.

손끝에 남은 촉감이라고는 맨들맨들한 살갗의 감촉뿐이었다. 역시 치유 마법은 굉장했다.

물기를 닦아 내고 옷을 입은 후 성윤은 거실로 나왔다.

이미 다른 일행은 거실에 모여 있었다.

팀은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그 옆에서 에밀리가 팀을 툭툭 치며 자리를 확보하려 애쓰고 있었다.

“시간 맞게 나오셨네요.”

부엌 쪽에서 그레이스가 간단한 안주를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이미 피로를 풀기 위한 주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성윤은 그레이스가 내온 요리를 슬쩍 봤다.

‘공주님이 손수 만든 요리라.’

하도 먹어서 이젠 새롭지도 않지만 자신은 굉장히 호사를 누리고 있는 부류일 것이다. 그레이스의 음식은 맛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영국 음식을 내놓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녀 조국의 특성 때문이리라. 그녀의 명예를 위해 성윤은 눈을 돌렸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언제나처럼 다시 한번 술자리가 시작됐다.

역시도 이번에도 말문을 먼저 뗀 건 팀이었다.

“저 빌어먹을 자식들은 무슨 우리와 원수라도 졌답니까?”

신경질적으로 입에 술병을 가져간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건 평소의 맥주가 아닌 독한 위스키였다.

얼음으로 희석시킨 것도 아닌데 목 너머로 꿀꺽꿀꺽 잘도 넘겼다.

“안 그래도 요새는 손해가 이래저래 많은데.”

지구와 암스트롱을 지키기 위해 1년의 2/3를 통째로 날리는 만큼 그들의 손해는 막대했다.

다행히 암스트롱의 부동산을 배정받아 나름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는 있지만, 대미궁의 월석을 채취해 파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런 사치를 부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니. 새삼 생각하건데 정말로 대미궁에 들어가는 연결자의 수익은 엄청나다니까.’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합치면 말 그대로 억 소리가 나올 만큼 비싸다.

하지만 그런 비싼 음식들을 이제는 성윤조차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매번 차려 먹고 있었다.

성윤은 내심 박살나버린 자신의 경제관념에 고개를 저었다.

동료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하나같이 습격자들에 대한 성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윤은 대화에 잘 끼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현우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성현우는 분명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미궁에 남은 흔적과 현우가 미궁에 돌입한 시간, 그리고 현우의 말의 모순을 생각하면 적어도 현우는 포털을 목격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이유 포털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어.’

자의는 아니지만 성윤도 현우를 속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현우도 성윤처럼 포털이란 존재의 파급력 때문에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는데.’

전 친구와 전 아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경험은 아직 성윤의 판단 방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로남불이란 건 알고 있지만 지금껏 현우에게 갖고 있던 믿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단은 혼자만 알고 있자.’

하지만 그렇다고 성윤이 의심을 거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성윤은 현우에게 첫 의심을 품었다.

‘그나저나 이건 그 녀석의 각성 징조라고 봐도 되는 건가?’

성윤은 적금의 젬을 떠올렸다.

이번의 그 급박한 전투 때도 언제나와 같이 응답하지 않은 젬이지만 포털의 남은 흔적을 찾은 것도 이 녀석 덕이다.

‘이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아직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 젬을 떠올리며 성윤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

습격을 받은 이후에도 그들의 하루 일과는 같았다.

암스트롱에서 얼마간의 휴가를 주긴 했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암스트롱의 순찰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암스트롱의 안전이 최우선인 암스트롱 상층부는 그들을 놀게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또다시 습격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순찰 임무를 다니면서도 성윤은 짬이 날 때마다 계속 적금의 젬을 발동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의 노력은 보답 받았다.

“우와! 우와! 우와아아아아아!”

허공에 뜬 푸른 타원형의 구체 주변을 첼시가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소장도 감격스러운 눈으로 포털을 쳐다봤다.

“이거! 이거! 손 넣어 봐도 왜요?”

“상관없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스트로브! 그건 내가 먼저…!”

“빠른 사람이 임자예요!”

허둥지둥 다가오는 소장을 무시하고 첼시가 손을 넣어봤다.

포털 안으로 그녀의 손이 쏙 들어갔다. 다시 새된 비명을 질러대며 그녀가 손을 붕붕 흔든다.

소장도 황급히 포털에 손을 넣었다.

두 연구자가 방방 뛰고 있는 모습을, 시장은 두 사람과는 다르게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이게 포털이군요.”

그의 시선이 포털을 훑는다. 냉정한 행동.

하지만 그도 흥분감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지 그의 눈빛에는 기이한 흥분이 맴돌고 있었다.

“이걸 사용하면 우 씨가 발견했다는 고대 도시로 갈 수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포털을 사이에 두고 경쟁 아닌 경쟁을 하던 두 연구자가 시장과 성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당장 가죠!”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 올 기세의 두 사람을 시장이 말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두 분.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두 분의 주 연구 대상은 달의 지질이지 고대 도시가 아니잖습니까. 그 분야에 관해서는 전문가를 불러야죠.”

“으음.”

당장이라도 반발하고 싶었지만 시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명색하고 이성적인 과학자의 두뇌가 그들의 반발심을 억눌렀다.

하지만 원망까지는 억누르지 못한 듯 둘의 원망 섞인 시선이 시장에게 향했다.

하지만 시장은 무시했다. 저런 시선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암스트롱의 시장 자리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몇 가지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윤 씨.”

“네. 물어보시죠.”

“다른 곳으로 포털을 여는 것도 가능합니까?”

성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제가 젬의 능력을 완전히 끌어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 젬의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고대 도시로의 포털밖에 열지 못합니다.”

“유지 시간은 어느 정도 되죠?”

“유지하려면 계속 유지할 수 있지만, 열어 놓고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5분 정도 지난 후 닫히더군요. 그리고 제가 멀리 떨어지면 계속 유지할 수 없고요.”

“흠.”

시장을 턱을 쓸어 내렸다. 나중에 또 다른 능력을 각성시킬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성윤이 말한 능력으로는 그들이 우려했던 파급력이 나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군.’

하지만 성윤의 말처럼 지금의 능력이 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가 갖고 있는 적금의 젬은 여러모로 특이한 젬이었던 것이다.

“일단 연구단을 꾸리죠.”

생각을 끝낸 시장이 말했다.

“당연히 저도 거기에 들어가겠죠?”

“저도! 저도 들어가고 싶어요!”

소장과 첼시가 시장을 잡아먹을 듯 다가왔다.

신기한 물건만 봤다 하면 평소의 연구원다운 모습은 다 내쳐버리는 두 사람을 사장은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이편이 더 연구원다울지도 모르지.’

지구의 편안한 생활을 마다하고 달로 올라올 정도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걸 생각하면 두 사람의 반응은 정상적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두 분도 참가시켜 드리죠.”

“좋았어!”

환한 웃음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들의 지금 감정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고대 도시를 탐험계획이 정해졌다.

***

아직 포털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할 생각은 없었기에 시장은 능력보다는 입이 무거운 자들을 위주로 선정했다.

처음 성윤 일행을 포함해 고위 연결자들로 이루어진 선발대가 고대 도시를 한 번 정찰했다.

이번에도 도시에서는 강한 몬스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연구원들을 보호할 연결자들을 고용하는데 시장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인력이 부족한 건 대미궁에 출입 가능한 고위 연결자들이지 중급 연결자들은 얼마든지 고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파견된 연구 인력은 50명 정도의 규모였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고대 도시의 연구인지라 지구 문명과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목적도 포함하여 고고학자들이 많이 포진됐다.

당연히 그들은 도시를 보자마자 광희했다.

그들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마냥 쏜살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본인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도시에 달려드는 연구원들을 연결자들은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다행히 도시 안에는 연약한 스켈레톤만 돌아다니는 터라 호위에는 문제가 없었다.

연구원들이 그렇게 연구에 집중하고 있을 동안, 성윤은 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눈빛이 냉정하게 한 기계장치를 쳐다본다.

아마도 포털을 통제하는 장치라 짐작되는 기계였다. 여전히 홀로그램을 띄운 채 잔잔히 작동하고 있는 그것.

‘아마 이게 포털 발동의 열쇠일 것 같은데.’

성윤의 관심은 그 기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연구원들이 한 차례 쓸고 간 방이었지만 연구원들은 그 기계의 작동원리나 방법 등을 알아내지 못 했다.

그래서 일단 이 장치를 한 번 작동시켰던 성윤에게 맡겨놓고 그들은 다른 것들을 연구하러 떠난 상태였다.

당신 자신을 향했던 기대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워 성윤은 얼른 그 기억을 털어냈다.

터벅!

한 발자국 기계 앞으로 나아갔다. 기계도 적금의 젬도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성윤은 뭐라도 읽어내려는 양 떠있는 홀로그램을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홀로그램에는 여전히 붉은 빛으로 가득 덮인 건물의 단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곳은 얼마 없었다. 그중 세 개의 첨탑 중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첨탑은 가본 적이 없군.’

젬에서 알려주는 대로 첨탑 하나에 월석들을 가득 넣어놓을 때 한 첨탑에 가봤을 뿐, 다른 곳에는 발길도 주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그쪽에도 가볼까.’

지금 여기서 홀로그램과 눈싸움을 하고 있어 봤자 뭔가 발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첨탑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 만에 돌아볼 수 없는 규모도 아니다.

성윤은 첨탑 두 개를 순식간에 확인했다.

하지만 두 첨탑들에서는 별다른 특이한 점을 찾지 못했다.

단순히 첨탑에 있는 꼭대기 방일 뿐이었다.

‘하긴, 그렇게 단순했으면 다른 연구원들이 이미 실마리를 찾아냈겠지.’

성윤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바로 기계 장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예전에 월석을 넣어 발동시킨, 첫 번째로 들렀던 첨탑으로 올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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