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첼시는 들어온 네 명을 살폈다. 다행히 한 명이 없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내심 걱정됐던 마음을 쓸어내리면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조금 늦었네요?”
대단한 의미가 있어 말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네 사람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첼시도 그들과 인연을 맺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또 뭔 일이 있었네.’
이번이 대체 몇 번째일까. 그녀는 성윤을 쳐다봤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스펙타클한 경험을 겪고 있는 사람.
“일단 씻고 오세요. 저녁은 제가 차려드릴 테니까요.”
그래 봤자 빵을 데우고 인스턴트 음식 몇 개 내는 게 전부지만 막 미궁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요리를 직접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실제로 첼시의 요리 솜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별 이견을 내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식당에 모인 건 한 시간 쯤 뒤였다.
팀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맥주병을 들고 입 안에 부어 넣었다.
“크하~!”
오장육부에 스민 피로를 한숨에 토해낸다.
미궁에서는 당연히 술을 먹지 못했다. 일을 끝내고 와서 하는 한 잔은 말 그대로 생명수였다.
다른 이들도 맥주를 한껏 들이켜고 안주에 손을 뻗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인스턴트 음식이었지만 그들은 계속 입에 집어넣었다.
“슬슬 이번 여행의 무용담을 들려주시죠.”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첼시가 말했다.
“이번에 또 무슨 일 있었죠? 이 누나에게 숨길 생각 말고 말해 봐요.”
“사람을 사고나 치는 사람같이 말하지 말아주시죠.”
성윤이 살짝 반항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날아든 그레이스의 공격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생각한다면 우린 저런 말을 들어도 이상할 거 없어요.”
“특히 성윤 씨는 더 하죠.”
마무리는 첼시의 깨끗한 일격이었다.
팀이 크게 웃었고 에밀리와 그레이스도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말해드리죠. 어차피 첼시 씨에게 상담도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성윤은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 대미궁에서 습격을 당한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첼시의 얼굴에 머문 건 걱정과 습격자들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얘기를 꺼냈을 때, 첼시의 턱이 빠질 듯 내려왔다.
“포털이요?”
그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식탁에 엎드릴 듯 상체를 쭉 빼 물어왔다.
“포털라면 그 포털이 맞죠? 전혀 다른 장소를 이어주는 공간 이동 방법 말이에요.”
첼시의 눈이 희번덕였다. 연결자를 노리는 몬스터의 붉은 안광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모습.
평소의 칠칠치 못한 모습과는 달리 과학자의 영혼이 그녀의 안광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맞습니다.”
성윤은 골드 젬을 첼시의 앞에 내려 놨다.
“예전 한 습격자에게서 빼앗은 젬입니다. 이게 포털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더군요.”
“자, 자세히 관찰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보석을 쥔 것처럼 첼시는 조심조심 젬을 쥐었다.
젬을 천천히 돌려가며 관찰한다. 하지만 특별히 특징이라 할 만한 건 없었다.
첼시는 일단 젬을 내려놓고는 다시 성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어디로 이동했나요?”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성윤에게 다가왔다. 성윤은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정확한 장소는 모릅니다. 아마 달에 있는 곳이라고 추정은 되는데, 웬 도시로 연결되어 있더군요.”
“도시요?”
“네. 오래 전에 버려진, 고대 도시 같았습니다.”
첼시의 눈이 더더욱 발광했다. 그에 비례해 성윤이 조금 더 뒤로 물러났고 나머지 사람들도 첼시와 거리를 뒀다.
“고대 도시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나름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곳곳에 무너진 건물들도 많았고.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인적은 당연히 없었고요. 하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저희도 포털과 연결된 건물과 왕궁으로 보이는 건물밖에 보지 않았으니까요.”
성윤은 보관의 젬에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왕궁에서 챙겨온 조각품 같은 것들이었다.
그게 고대 도시의 유물이란 걸 알고 첼시가 이 잡듯 달려들어 샅샅이 살폈다.
고대 유물 같은 건 첼시의 전공은 아니지만 정체 모를 문명의 흔적이란 것 자체가 과학자의 피를 들끓게 했다.
성윤이 포털 건물과 왕궁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간간이 다른 동료들이 보충 설명을 했다. 조각상을 껴안듯 한 첼시가 그 상태에서도 용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번 발견에서 가장 충격적인 얘기가 성윤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포털을 열기 위한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 첨탑에 올라갔을 때 기묘한 걸 봤습니다.”
동료들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심각해졌다. 첼시 역시 분위기를 눈치 챘다.
“기묘한 거요?”
“벽화였습니다.”
첼시가 눈을 깜박였다.
“고대 문명의 역사를 간단하게 나타낸 것 같았는데, 문제는 벽화에 그려진 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 대미궁 공략 자체를 끝장낼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시니까 무섭네요. 어떤 내용이었죠?”
“요약하자면 고대 문명과 괴물 그리고 달의 탄생이네요.”
그리고 성윤은 벽화의 내용을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첼시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그녀의 눈에서 불타던 호기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근심과 걱정이 대신 채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데요.”
“네. 미궁 공략이 당장 중단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건 제가 연구소 소장님께 알려드릴게요. 그럼 자연히 시장님도 알게 되실 거예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그 이후로 별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성윤은 마력을 충전하고 포털을 발동시켜 그 도시를 탈출한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첼시는 작게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또 대단한 모험을 하고 오셨네요. 지민이가 아주 좋아하겠어요.”
성윤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성윤이 겪는 사건사고에 학을 떼고 있다는 건 성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첼시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잠시 연구소에 갔다 올게요. 당장 이 일을 알려야겠어요.”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알려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정도로 성윤 일행이 가져온 정보는 엄청났다.
“대미궁 공략과 큰 사건을 겪은 직후에 이런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아마 바로 성윤 씨 일행을 부르실 거예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길 권유드릴게요.”
그리고 바로 하루 뒤. 시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날아들었다.
***
성윤과 일행은 시청에 와 있었다. 언제나의 방에서 그들은 첼시, 연구소의 소장 그리고 시장과 마주 앉았다.
“대략적인 설명은 소장님께 들었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전혀 숨기고 있지 않던 시장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상대가 우성윤 씨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을 겁니다.”
성윤의 말을 믿을 증거가 없다. 포털은 스스로 열지 못한다고 하고 고대 도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증거랍시고 가져온 유물들이 있었지만 그걸 분석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게 뻔하다. 아니, 아예 분석조차 안 할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성윤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지금까지 많은 신뢰를 쌓아왔다.
실력은 최상급 인재들에게 밀리지만 시장이 여차할 때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카드는 두말할 것 없이 성윤이었다.
거기에 영국의 공주님이라는 신분을 가진 그레이스까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저희는 당신들을 믿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윤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이 일이 끝나면 그 도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좀 해줘요.”
성윤이 갖고온 유물을 만지작대던 소장이 성윤을 향해 말했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일단 그 포털을 열 수 있다는 젬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시장의 요구에 성윤은 젬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당장 소장이 달라붙었다. 조그마한 현미경을 꺼내 무슨 스토커마냥 젬을 조사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뱉으며 젬을 내려 놨다.
“솔직히 겉모습으로는 다른 젬들과 별 구분을 하지 못하겠군요.”
“다른 기구 같은 게 필요합니까?”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걸 연구소로 가져가서 정밀 검사를 한다 해도 별 소득은 없을 겁니다. 다른 평범한 젬들에서도 뭔가 알아낸 게 없었으니까요.”
소장 더불어서 첼시의 얼굴도 착잡함에 묻어났다.
국제 연구소랍시고 암스트롱에 연구소를 지어놓고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몇십 년간 연구를 계속했지만 정작 그들이 알아낸 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장인 맥그리거로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계속 성윤 씨가 갖고 계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번처럼 사용법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시장은 탁자 위의 젬을 바라보더니 다시 성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럼 이번엔 여러분이 발견했다는 벽화에 대해 말해보죠.”
주변 상황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일단 소장님께 묻겠습니다. 소장님은 그 벽화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첼시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다. 소장은 수염으로 거친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 그 벽화를 직접 보지 못했고, 봤다고 해도 당장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순 없습니다. 일단 증거가 없으니까요. 단….”
소장이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렸다.
“지금 달의 생성 가설 중 가장 유력한 가설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왔다.’인 건 확실합니다.”
“벽화의 내용과 맞는군요.”
시장이 심각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소장이 거들었다.
“솔직히 그런 뜬소문 같은 건 많았습니다. 미궁 자체가 미스터리한 존재니 당연하죠. 게다가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미노타우로스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힌 소머리의 괴물.
“알죠. 그것 때문에 미궁 공략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자들 때문에 불쾌해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데, 그들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시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현실을 외면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취급했던 자들이 맞고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확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는요.”
소장은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는 걸 경계했다.
“하지만 이게 미궁의 실체에 접근할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분명 있습니다. 지금껏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이 한꺼번에 풀릴지도 몰라요.”
몇 십 년 동안 막혔던 해답의 실마리가 지금 발견됐는지도 모른다. 소장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시장은 잠시 탁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성윤 씨.”
“말씀하시죠.”
“성윤 씨는 알고 계십니까? 포털도 그렇고 벽화도 그렇고. 신기하고 대단한 발견이라고만 칭하기에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요.”
주변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을 정도로 짙어진 침묵 속에서 성윤은 담담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