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툭 튀어나와 소용돌이치던 푸른빛은 곧 커다란 타원형의 구체를 이루었다.
지면에서 약 30cm 정도 떠 있는 그 구체는 길이가 2m 50cm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방어를 준비하던 성윤 일행도 성윤 일행을 끝장내려 한 플루엘 일행도 한순간에 그 빛의 구체에 시선을 빼앗겼다.
‘저건!’
아루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플루엘, 티오투도 그리고 다른 습격자들도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아루원은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대체 어떻게!’
저 푸른 빛의 구체는 자신과 일족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자신의 일족이 왕족이라는 대접을 못 받는 이유가 바로 저 푸른 구체를 불러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그걸 근본도 모르는 천한 것이, 그것도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불러내버렸다.
마치 자신과 일족의 무능력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
“막아아아아!”
그건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 비명과 절규에 가까웠다.
열등감과 질투심에 휩싸여 아루원은 활시위를 당겼다.
아루원의 비명 같은 명령에 다른 이들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황급히 성윤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물 마법이 성윤 일행을 너무 먼 곳으로 옮겨 놨다.
“빛 속으로 뛰어들어요!”
습격자들을 맞을 준비를 하던 일행이 성윤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들이 성윤을 쳐다봤다가 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심스러운 눈빛도 잠시. 그들은 바로 행동했다.
“먼저 뛰어 들어!”
팀이 푸른 구체 앞을 막아섰다.
에밀리의 치료에 몸에 입었던 화상은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방패가 조금 불안해 보였다.
성윤이 팀의 어깨를 두드렸다.
“팀 씨가 먼저 들어가세요!”
“하지만…!”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릅니다! 팀 씨가 먼저 안전을 확보해주세요!”
잠시 고민하던 팀이 성윤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렸으면 바로 행동으로.
팀은 두려움도 없이 푸른 구체 속에 몸을 던졌다.
스윽!
팀의 모습이 구체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이스와 에밀리가 놀랐다.
‘역시 포털이나 뭐 그런 걸까?’
성윤의 태도에서 대강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안 놀랄 수가 없었다.
팀의 뒤를 이어 에밀리가 들어갔고 곧 그레이스도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성윤뿐.
습격자들이 황급히 달려온다. 그들의 움직임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초조함이 보였다.
성윤은 조금 통쾌했다. 하지만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콰앙!
날아온 화살을 겨우겨우 막았다.
몸이 크게 뒤로 튀었다. 푸른 구체와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굴러갔다.
바닥에 뒹굴어 온몸이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화살을 막은 충격 때문에 회복했던 팔뼈가 다시 부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성윤은 바로 치유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다른 마법이 먼저였다.
퍼엉!
푸른 구체 앞으로 수도 없는 석순이 솟아난다. 기습적인 마법이었지만 습격자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성윤도 그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그저 잠깐 동안 발을 잡으면 충분했고, 석순은 충분히 제몫을 다했다.
콰앙!
힘이 넘치다 못해 신경질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습격자들의 공격에 석순들이 산산이 깨부숴졌다.
그들이 당장 성윤의 목을 치기 위해 뜀박질 쳤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던 건 네 장의 날개를 핀 채 푸른 구체 안으로 들어가는 성윤의 모습이었다.
쌔애앵!
푸른 구체를 향해 아루원이 쏜 화살이 날아갔다.
하지만 화살이 도달하기도 전에 푸른 구체가 사라졌다. 단 하나의 빛 덩이조차 남기지 않고.
퍼엉!
목표를 잃은 화살은 뒤편의 애꿎은 물 덩어리를 때리며 폭발했다.
놓쳤다. 습격자들은 허망한 얼굴로 푸른 구체가 사라진 지점을 쳐다봤다.
“이런 빌어먹으으으을!”
쿵! 쿵!
아루원의 비통한 외침과 험하게 발 구르는 소리만이 조용해진 대미궁 안을 울렸다.
***
쿠웅!
“크헉!”
푸른 빛 덩이를 지나쳐 온 성윤이 바닥에 충돌했다. 몇 번을 데굴데굴 구른 그의 몸이 겨우 멈췄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성윤은 젬에 들어가는 마력을 커트했다. 푸른 구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윤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성윤은 눈을 떴다. 동료 세 명이 모두 보였다. 모두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
“윽!”
안도를 하자 부러진 왼팔이 아팠다.
“다치셨어요?”
에밀리가 성윤의 왼팔에 달라붙었다.
“괜찮습니다. 가벼운 골절이에요.”
골절이란 게 절대 가벼운 부상이 아니지만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은 다르다.
성윤은 자신의 골절 부위에 치유 마법을 걸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져갔다.
그렇게 몸을 전부 추스른 후에 성윤은 일어섰다.
‘여기는 어디지?’
그들이 있는 곳은 어떤 방이었다. 사각형의 박스처럼 생긴 방은 꽤 넓었다.
족히 100평은 되는 것 같았다. 벽과 천장에는 온갖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문도 보였다. 낯익은 곳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방의 중앙. 커다란 꽃이 지면에서 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조형물이 보였다.
각도로 봐서는 성윤이 날아온 방향이 바로 저 조형물이 있는 곳이었다.
“저 위에 그 푸른 구체가 있었습니다. 성윤 씨가 도착한 이후에 사라졌고요.”
조형물을 가리키며 팀이 성윤에게 설명했다.
“일단 당장은 안전한 것 같군요.”
“네, 방 안에 위험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성윤의 말에 대답한 그레이스가 이번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성윤은 가볍게 디바이스를 들어 문제의 젬을 가리켰다.
“이 젬의 능력인 듯합니다.”
“분명 우릴 습격한 자들 중 궁수에게서 빼앗은 젬이라고 하셨죠?”
그레이스가 그 젬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팀과 에밀리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젬을 바라봤다.
“예전에 악마형 몬스터의 팔을 날려버렸을 때도 이 젬의 힘이 도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포털처럼 보이는 능력까지. 젬에 두 가지 능력이 동시에 깃들었다?”
그레이스가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게 사실이라면 젬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갖고 싶은 연구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능력인 듯하다니. 이번에도 제대로 된 능력이 생각이 나지 않는 건가요?”
“실은 그렇습니다.”
성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저 그 푸른 구체가 포털이고 이 젬이 열었단 것 정도밖에는 모릅니다.”
“또 사용하실 수 있나요?”
“모르겠습니다.”
알면 알수록 골 때리는 젬이다. 하지만 그 젬에 목숨을 구원받았기에 일행은 불만을 토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일단 나갈 방법은 저거 하나뿐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그레이스가 방의 유일한 문을 바라봤다.
벽, 천장과 같이 여러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에밀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미지는 곧 공포다. 문 밖에 있는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이 일행에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일단은 여기서 쉬죠. 나가더라도 전력을 좀 보충한 후에 나갑시다.”
성윤이 제안했다.
대미궁 공략 중 일어난 갑작스러운 레비아탄과의 조우. 그리고 바로 이어진 습격자들의 습격.
사람은 지쳤고 마법도 많이 소모했다. 그리고 폭주한 젬은 언제 깨질 모른다. 거기에 바깥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 상황.
성윤의 제안에 일행은 동의했다.
***
다행히 일행이 쉬는 동안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윤이 항상 보관의 젬에 여러 물자를 넉넉히 넣고 다니기 때문에 일행은 방에서 며칠 동안 보내는데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가장 큰 불편이 화장실 정도였다.
며칠 동안 최대한 몸을 쉬게 해 모든 컨디션을 그럭저럭 회복했다.
여기가 정체 모를 곳이란 걸 감안하면 충분히 원활한 휴식 기간을 보낸 것이다.
이제는 미지의 공간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었다.
쿠르르릉!
문의 무게는 꽤 무거웠다. 지진이 난 듯한 진동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린다.
일행은 살금살금 문 밖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나온 팀이 방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우오오!”
갑자기 팀이 입을 벌리고 감탄을 흘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건 뒤따라 나온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본 건 거대한 복도였다. 높은 천장과 넓은 폭을 가진 그 복도는 웅장하다는 느낌이 절로 올라올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복도에 발을 디뎠다. 그들이 걷는 소리가 커다란 복도 안에서 메아리쳤다.
사용한 지 한참이나 지난 듯 복도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창이 나 있긴 했지만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은 곳에 있었다.
복도의 벽면에는 예전에 사용됐음직한 횃불이 드문드문 꽂혀 있었다.
그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복도를 묵묵히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성윤이 걸음을 멈추고 신호를 줬다. 일행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들의 걸음 소리가 사라진 복도. 하지만 그들의 것이 아닌 낯선 소리 하나가 계속해서 반향 되고 있었다.
딱! 딱!
소리는 그들이 향하던 복도 저편에서 들렸다.
일행은 무기를 겨눴다.
딱!
상대의 정체가 눈에 들어 왔다.
“스켈레톤이에요.”
에밀리가 말했다.
일반 미궁에서 상당히 강한 축에 드는 몬스터. 하지만 일행의 상대는 아니다.
그들은 스켈레톤은 상당히 많이 잡아봤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스켈레톤은 그들이 여태껏 상대해온 스켈레톤과는 뭔가 달랐다.
“진짜 뼈밖에 없네?”
그들이 지금껏 만나왔던 스켈레톤은 모두 충실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팀의 중얼거림처럼, 눈앞의 스켈레톤은 그 무엇도 들거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일단 상대해보죠.”
성윤의 신호에 파티가 평소의 대형을 만들었다. 팀이 먼저 방패를 스켈레톤에게 거세게 밀어붙였다.
콰앙!
“어?”
팀이 깜짝 놀랐다.
그의 방패에 얻어맞은 스켈레톤이 허무하게 밀려났다.
아니,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바닥에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이거 왜 이렇게 약해?”
팀이 어처구니없어 했다. 스켈레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나온 월석도 무척이나 작았다.
그 후로도 일행은 스켈레톤을 몇 번이나 만났다. 하지만 역시 그것들도 팀의 방패 한 방에 허무하게 박살났다.
“별로 난이도가 높은 구역은 아닌 모양입니다.”
부러진 뼈들을 발로 차며 팀이 말했다.
그렇게 복도를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커다란 로비가 나왔다. 로비에는 이 건물의 현관인 듯한, 양쪽으로 여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일행은 잠시 눈을 마주더니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이익!
성윤과 팀이 문을 활짝 열었다.
“이건…!”
“우와아아아아아!”
그리고 놀랐다.
문의 바깥. 그들의 앞에는 달에서 볼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정체불명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