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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미궁-238화 (238/354)

제238화

꽈악!

아루원의 주먹이 쥐어졌다. 핏발이 서고 이가 갈렸다.

주변 인물들이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지금 왕족의 젬을 사용한 거지? 예전처럼 자동반응이 아니고 본인 의지로.”

“뭐 저리 각성이 빨라? 빼앗긴지 얼마나 됐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루원이 째려보자 그들이 말소리를 멈췄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루원의 눈치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옛 왕족 중에서도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로군.”

“그때와 환경이 다른 걸 생각하면 훨씬 더 뛰어날 수도 있겠어.”

티오투도와 플루엘이 의견을 나눈다.

당연히 아루원은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둘은 당당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오히려 ‘어쩌라고’라는 눈빛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쉽군. 레비아탄에게 죽었다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었을 텐데.”

티오투도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플루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갑옷을 입은 자를 죽이기 위해 그들은 정보활동을 했다.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는 무척이나 유명한 자였던 것이다.

이름은 우성윤. 그의 얼굴을 봤을 때 플루엘은 깜짝 놀랐고 아루원은 입술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놀랍게도 그는 예전 동물원에서 소영이를 두둔해줬던 인물이었다.

잠깐이긴 하지만 소영이를 돌봐준 은인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플루엘은 슬펐다. 반대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자를 쳐죽일 수 있다며 아루원은 기뻐했다.

‘레비아탄에게 죽었다면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더러운 위선이다. 플루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위선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성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가자.”

상대가 몸을 추스르기 전에 쳐야 한다. 몸이 달은 아루원이 손짓했다. 하지만 티오투도가 그를 막았다.

“왕족의 젬을 발동시켰는데 덤비자고? 제정신이냐?”

“뭣도 모르면 입 닫고 있어.”

아루원이 짜증냈다.

“왕족의 젬이라는 건 만만한 게 아냐. 그렇게 쉽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막 각성한 저 놈이 힘을 쓸 수 있는 건 한순간뿐이야. ‘그것’에 반응해 발동했던 예전과는 달라.”

아무리 왕족의 젬을 사용하지 못 하더라도 아루원만큼 왕족의 젬을 잘 알고 있는 자는 없다.

아니, 사용하지 못하는 만큼 그는 언젠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을 상상하며 그 특징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됐어. 왕족의 젬을 막 각성시켰을 때는 한동안 깊은 무기력증에 시달리니까. 쉽게 죽일 수 있겠어.”

아루원의 말처럼 성윤이 주저앉아 가슴을 짚는 게 보였다.

몸이 흔들리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은 게 확실해 보였다.

여봐란 듯이 성윤을 가리킨 아루원이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후우! 후우!”

성윤은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 쉬었다.

심장 소리가 멎고 몸 안에 느껴지던 힘도 사라진 후에 갑자기 찾아온 통증과 무기력증.

호흡이 필요 없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게 됐다.

“어디 아파요? 혹시 부상이라도 당했나요?”

얼떨떨하게 레비아탄의 시체만 바라보고 있던 일행이 깜짝 놀랐다.

그레이스가 성윤을 부축했고 에밀리가 부랴부랴 성윤에게 치유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부상은 아닙니다. 아마도 레비아탄을 죽였을 때 쓴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윤은 주저앉아 갑옷을 역소환시켰다.

갑갑한 갑옷 속에 있으니 몸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레비아탄을 쓰러뜨린 건 성윤 씨였군요!”

걱정하는 와중에 팀의 눈이 빛났다. 머리가 터져 축 늘어져 있는 레비아탄을 한 번 보고 성윤을 다시 본다.

그의 눈에 존경심이 가득 어렸다.

하지만 성윤은 팀의 존경 어린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역시 이것 때문이겠지?’

그는 최근 새로 얻은 골드 젬을 내려다봤다.

짐작 가는 원인은 이 녀석뿐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본질을 꼭꼭 숨긴 녀석.

시간이 지나자 점점 몸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옅은 무기력증이 남았다. 아무래도 이번 미궁 공략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팀이 가져온, 레비아탄이 남긴 커다란 월석을 보관의 젬에 넣고 성윤이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려 할 때였다.

철컥! 철컥!

금속음이 들렸다. 일행이 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깜짝 놀랐네.”

상대가 몬스터가 아닌 걸 확인하고 팀이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레이스와 에밀리는 달랐다. 에밀리가 팀을 툭 건드렸다.

“긴장 풀지 마.”

“뭐 어때서 그래? 미궁에서 다른 사람이랑 만나는 건 시작의 미궁 때 많이 겪었잖아.”

“그 때도 말했었지만, 미궁에서 믿을 건 자기 파티 하나면 돼.”

“으음.”

에밀리가 하는 말이 영 정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리는 있었기에 팀은 살그머니 도끼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포위된 것 같군요.”

그레이스의 말에 팀과 에밀리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다 신음을 흘렸다.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주저앉아만 있을 상황이 아니다. 성윤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채찍질하며 일으켰다.

“우리한테 용건이 있나요?”

그레이스가 다가오는 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레이스가 다시 한 번 말하려 할 때였다. 성윤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말렸다.

“그만두세요, 그레이스 씨.”

그는 한쪽을 가리켰다. 성윤이 가리킨 곳을 본 그레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익숙한 모습의 인간들이 있었다. 검은 대검을 든 검은 갑옷의 인간과 커다란 활을 들고 있는 궁수.

예전 악마형 몬스터의 습격 때 나타났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성윤 씨와 암스트롱 연구팀을 습격한 자들이기도 하고.’

그들은 말없이 공격태세를 취했다. 일행도 한 곳에 모여 방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세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총 열 한 명인가.’

노곤한 몸을 이끌고 성윤이 습격자들의 수를 셌다.

암담하기 그지없는 숫자다. 상대의 수준이 낮다면 열 한 명의 숫자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만 상대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그레이스 씨. 큰 거 한 방 준비해주세요. 팀 씨. 일단 무조건 방어적으로 나갑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무구가 버텨 줄지는 모르겠군요.”

폭주의 빛을 줄기줄기 뿜고 있는 젬의 모습을 팀이 걱정스럽게 내려 봤다.

“그건 저나 다른 분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어요.”

“할 수 없죠.”

과연 성윤 파티는 이제는 노련한 연결자 파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이었다.

레비아탄이라는 강적을 가까스로 쓰러뜨리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물들.

절망할 만도 하련만 그들은 초조해할지언정 절망하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됐다.

상대 몇이 마법을 준비하는 게 보인다. 성윤은 그들을 향해 할버드와 도끼를 던졌다.

카앙!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 성윤이 던진 무기가 마법을 준비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자들에 의해서 튕겨 나왔다.

동시에 무기를 든 습격자들이 일행을 덮쳐왔다.

쾅! 쾅!

거친 파공음과 금속음이 장내를 울렸다. 자신에게 날아온 낫을 방패로 막은 성윤이 신음을 흘렸다.

‘무거워.’

자신의 몸도 상대의 공격도 무겁기 짝이 없다. 간신히 방패를 들어 막고 막고 또 막을 뿐이다.

반격은 엄두도 못 냈다.

공격 하나를 튕겨내고 살짝 다른 사람들을 봤다. 팀은 성윤보다는 상태가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뿐. 그도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가장 문제는 에밀리였다.

쾅!

“꺅!”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커다란 메이스가 그녀의 방패를 가격할 때마다 그녀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포위를 당한 터라 마법을 준비하는 그레이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도 방패를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나름 상위 젬의 방패를 가지고 틈날 때마다 방어 연습을 해 왔던 에밀리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성윤과 팀도 고전하는 상황. 그녀는 정말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칫!’

성윤이 급히 도끼를 들었다.

쾅!

옆에서 에밀리를 향해 날아 온 검을 튕겨냈다.

‘에밀리 씨를 노리는군.’

습격자들도 에밀리를 구멍이라고 인식한 듯했다.

점점 에밀리를 향한 공격이 많아졌다. 성윤과 팀이 옆에서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둘도 더욱 궁지에 몰렸다.

설상가상으로 마법도 습격자들 쪽이 먼저 완성했다. 가까이서 성윤 일행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던 자들이 일제히 뒤로 빠졌다.

촤악!

가까이 있던 물 덩어리에서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른다. 생명체처럼 쭈욱 늘어진 물이 해일처럼 성윤 일행을 덮쳐왔다.

“이런 빌어먹을!”

팀이 해일에 맞섰다. 성윤은 그레이스와 에밀리를 껴안고 팀의 등에 기대 힘을 보탰다.

콰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성윤 일행의 모습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급류가 물 덩어리들 사이를 흘러가며 날뛴다. 이곳저곳에 부딪치며 일대를 휩쓸었다.

촤아악!

격류는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게 법칙이라도 되는 양 슬금슬금 지면을 기어 가장 가까이 있는 물 덩어리에 흡수되었다.

위력적인 마법이 쓸고 지나간 곳. 성윤 일행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으으으!”

일행이 신음을 흘렸다. 수면 아래서 거센 물살이 수십 수백 개씩 소용돌이를 치며 일행을 쥐어뜯었다.

갑옷이 없었다면 물살에 갈가리 찢겼을 것이다.

그나마 그 거센 급류에 휩쓸렸으면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데 나뒹굴고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퍼엉!

불덩이가 쏘아졌다. 혜성처럼 붉은 색의 꼬리를 만들며 그것은 성윤 일행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직진했다.

“크윽!”

팀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방패를 전면에 들었다.

콰아앙!

“크아아아악!”

다행히 불덩이는 막혔지만 팀이 그 충격으로 나동그라졌다. 온몸에 김이 솟았다.

“팀!”

에밀리가 허겁지겁 기어가 회복마법을 준비한다. 팀은 고통 속에 허우적거렸다.

그레이스가 취소된 마법을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에 맞을 것 같진 않았다. 거기에 방해도 있었다.

슈욱!

그레이스를 향해 무정한 화살이 날아왔다. 성윤이 급히 일어나 방패를 들고 그레이스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콰앙!

“크윽!”

화살에 담긴 힘은 엄청났다. 성윤이 그대로 튕겨나갔다.

“성윤 씨!”

그레이스가 비명을 질렀다. 팀을 치료하던 에밀리가 안절부절못했다.

성윤은 공격을 막은 왼팔을 감싸 쥐었다.

‘부러졌어!’

급히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통증이 점점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태가 나아진 건 아니었다.

철컥! 철컥!

불길한 금속음. 다시 습격자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자가 있었다.

‘젠장!’

성윤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전투는 불가능했다. 죽음이란 글자가 다시 생생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건 당연히 신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혼하자마자 이 꼴인가.’

자신은 결혼에 무슨 악운이라도 낀 것일까. 성윤은 위기상황에서도 한숨 쉬었다. 하지만 그 덕에 머리는 차가워졌다.

‘그래.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딸을 위해서. 그리고 새로 얻은 어린 신부를 위해서도 지금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마땅찮은 것도 사실이다.

‘믿을 거라곤 이 녀석뿐이로군.’

정체불명의 황금색의 젬. 성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거기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젬은 반응이 없었다. ‘역시 안 되나’라고 생각한 순간.

우우우우웅!

그의 옆으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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