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234화 (234/354)

제234화

우주 공항에서 나오자 암스트롱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확 올라온다.

성윤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정해진 시간에 집에서 대기해야 하는 지루한 국가 방위 임무라도 암스트롱에 있는 것보다 지구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곧 찌든 공기에 익숙해졌다. 성윤은 오랜만에 보는 암스트롱의 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암스트롱은 여전했다. 큰 위기를 겪었지만 월석이라는 유혹적인 물건과 경쟁 도시의 몰락 때문에 암스트롱의 위세는 상당히 회복되어 있었다.

그의 걸음이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5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 술집부터 시작해 연결자들의 돈을 노리고 온갖 가게들이 입점해 있다.

미친 암스트롱의 물가와 비례해 이 건물의 월세는 무지막지하다.

한 달 월세만 수십 억. 왜 암스트롱 상층부가 암스트롱의 부동산을 놓지 않으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암스트롱 상층부가 암스트롱 부동산을 꼭꼭 싸안고 있는 것도 옛말이다.

‘내 건물이라….’

성윤이 묘한 눈빛으로 건물을 올려다봤다.

무지막지한 월세를 내면서도 들어오고 싶은 가게들이 줄을 선 이 건물은 바로 암스트롱에서 성윤에게 양도한 건물이었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암스트롱 곳곳에 성윤이 받은 건물들이 있다.

이제 성윤은 굳이 월석을 캐지 않아도 엄청난 재산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왁자지껄한 가게의 소음을 뒤로 하고 성윤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강제 의무가 부과되면서 다른 파티원들도 암스트롱의 부동산을 배정받았지만 달에 있을 때는 꼭 성윤의 집에 머물렀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파티의 특성상 그 편이 효율이 좋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첼시는 연구를 위해 나갔을 테고 파티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2층에 올라가 계단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예 놀이방으로 꾸며 놓은 곳이었다.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은 당구대가 먼저 들어온다.

사방에는 게임기나 체스 등 온갖 놀이 기구들이 즐비했다.

돈이 없어 지원소에서 소량의 영양제와 물을 공급받고 닭장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하는 최하급 연결자들은 꿈에도 바랄 수 없는 호사.

암스트롱의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벽에 세워진 큐를 잡고는 당구대에 당구공을 굴렸다.

곧 조용한 방에 당구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윤이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윤은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열려 있는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커다란 안경과 꾀죄죄한 연구복이 인상적인 여인.

첼시였다.

“안녕하세요, 성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첼시가 내민 하얀 손을 성윤이 붙잡고 위 아래로 몇 번 움직였다.

“한판 하실래요?”

첼시가 당구대를 가리켰다. 거절할 이유도 없다.

“그러고 보니 첼시 씨랑은 몇 번 쳐보지 못했군요.”

성윤의 당구 상대는 대부분 팀이었다.

편을 먹고 몇 번 쳐본 적은 있지만 둘이서만 쳐보는 건 사실 처음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얕보지 마세요. 저도 다른 세 분이 지구에 돌아가 있을 때 혼자서 꽤 쳐봤으니까요. 혼자서! 달에! 남아서요!”

아무리 임무 때문이라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자신 혼자 황량한 달에서 연구를 하며 지내는 울분이 쌓인 모양이었다.

첼시는 늘씬한 다리를 뒤로 빼고 자세를 잡았다. 울분을 담아 큐를 힘껏 내질렀다.

틱!

들려오는 매가리 없는 소리. 빗맞은 공이 대각선으로 설설 기어간다.

쿵!

첼시가 당구대에 머리를 박았다.

첼시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공은 빨간 공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성윤은 피식 웃고 큐를 잡았다.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네요.”

성윤이 멈칫했다. 첼시가 당구대에 엎드린 채 팔을 괴고 성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완전히 목석같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성윤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확실히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역시 결혼이 좋았던가 보죠?”

“…지민 씨에게 들었습니까?”

“들었죠.”

첼시가 콧방귀를 끼었다.

“그 비싼 행성 간 전화를 이용해서 답지 않게 수다를 떠는데, 어조는 평상시와 같았지만 그거 분명 자랑하는 거였어요.”

성윤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질투로 손수건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첼시가 당구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구대가 비자 성윤이 큐를 들어 올렸다.

딱!

경쾌한 소리가 나며 하얀 공이 빨간 공 두 개를 연이어 때렸다. 성윤은 몇 번 더 큐를 움직였다.

“지민이에게 들었어요. 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의 감정도 알고 계시다면서요?”

퍽!

둔탁한 소리.

성윤의 큐가 빗나갔다. 아까 첼시의 공이 그랬던 것처럼, 빗맞은 하얀 공이 빌빌 대며 기어갔다.

성윤이 동그란 눈으로 첼시를 쳐다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첼시가 웃었다.

“역시 변했어요.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표정 변화가 없던 사람이 지금은 꽤 표정이 풍부하게 됐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성윤의 표정 변화는 무척이나 적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첼시가 다시 큐를 잡고 하얀 공을 쳤다.

따닥!

아까와는 다르게 유려한 움직임을 그린 하얀 공이 붉은 공 두 개를 연달아 쳤다.

“지금까지는 성윤 씨의 과거사 때문에 많이 자제를 했지만, 지민이가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지금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이 될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저를 포함해서요.”

첼시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꾀죄죄한 겉모습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미모가 언뜻 언뜻 화려하게 빛났다.

“…전 결혼했습니다만.”

“연결자가 한 번 결혼한 것 정도가 뭔 대수라고요.”

딱!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과 함께 다시 공들이 부딪쳤다.

“그나저나 지민이에게 그 검은 갑옷에 대해서 아직 말하지 않았나 보더군요.”

주제가 바뀌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민감한 사안이니까요.”

“말하기 힘드시면 제가 말할까요?”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첼시씨도 말하기 곤란한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흐응. 역시 사랑스러운 아내에 대한 일이라 이건가요?”

아무래도 이 놀림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 같다. 성윤은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우상이와 우성이의 입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아, 둘 다 성윤 씨처럼 말하길 꺼려하려나?”

파비온에 있는 두 사람이라면 검은 갑옷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첼시가 말했다.

성윤은 예전에 장모님들과 만났을 때의 둘을 떠올렸다.

‘이놈이 누나를 행복하게 해 줄까.’하고 자신을 관찰하던 우상과 덮어놓고 씨근덕대던 우성.

“둘은 모르는 것 같더군요.”

“몰라요?”

첼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비온은 검은 갑옷 일당을 퇴치하려 했을 때의 주 전력이었잖아요.”

“당시에 둘은 없었습니다. 동인 씨와 현우 씨가 둘을 걱정해서 일부러 뺐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장모님들도 모르시는 것 같으니, 일단 뭔가 확신이 들 때까지는 조용히 있도록 하죠.”

장모님이라는 호칭에 다시 첼시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성윤은 묵묵히 당구공을 쳐댔다.

***

오랜만에 만난 파티원들은 반가웠다.

그날 저녁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바보처럼 웃고 지냈다.

첼시가 터뜨린 성윤의 결혼 사실에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곧 웃으며 축하해줬다.

분위기가 더 무르익고 술잔이 돌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파티원들의 접근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된 것은.

그건 아주 미약한 차이. 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미궁에 들어가기 전 커피를 사러 나온 성윤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더 노골적이 된 접근.

하지만 의외로 성윤은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설마 여성 불신이 전부 치료된 건가?’

성윤 자신도 느끼고 있던 심각한 정신병. 하지만 성윤 자신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놔두고 있던 병.

그게 어느새 치료되어 있던 것일까.

“호, 혹시 나이트이신가요?”

나온 커피를 들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성윤을 불러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카페의 종업원이 그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명해진 후부터 종종 있어 왔던 일이다.

성윤의 대답도 듣지 않고 확신한 종업원이 급히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싸, 싸인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전체적으로 귀염성 있는 모습의 여성이었다.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모습.

성윤은 멋대가리 없는 자신의 싸인을 휘갈겨줬다.

기뻐하는 종업원을 뒤로 하고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치료된 건 아니군.’

싸인하기 위해 종업원이 붙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의 여성 불신은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그에 성윤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오는 대미궁은 여전히 엄청난 규모와 기세로 일행을 맞이했다.

익숙한 대미궁의 층들을 빠르게 빠르게 치고 내려가는 성윤 일행.

하지만 대미궁 자체의 규모가 있다 보니 그들이 공략을 진행한 곳까지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대미궁을 완벽하게 공략할 힘을 가진다 해도 시간 때문에 불가능하겠어요.”

내려 온 미궁의 깊이와 걸린 시간을 계산하던 그레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4개월.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대미궁을 공략하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다.

팀도 거들었다.

“전투 시간을 빼고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해도 4개월로는 대미궁의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가기엔 턱도 없을 것 같은데요. 윗대가리들은 대체 뭔 생각인지.”

“철저하게 지구와 암스트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 거겠지. 별로 틀린 일도 아니고.”

에밀리의 말처럼 지구가 있고 암스트롱이 있어야 대미궁 공략이 가능하다.

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대미궁 공략은 꿈에나 가능하다고. 우리가 모자란 것이 있다면 고치면 되지만 이건 시간이 부족한 거잖아.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여기 있는 네 명 모두 암스트롱으로부터 상당한 이권을 보장받았기에 굳이 목숨 걸고 대미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미궁에 들어온 이유는 오직 하나.

대미궁의 완전 공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었다.

에밀리도 대답하지 못 하고 애꿎은 입술만 달싹였다.

“일단은….”

성윤이 입을 열자 동료들이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말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죠.”

성윤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료들도 목을 꺾었다.

크기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물덩이가 무수히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투덜대던 일행의 입이 일시에 닫혔다. 그건 거대한 바다가 무수히 허공에 떠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로 대미궁 안에는 물리법칙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요?”

“생각하지 마세요.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에밀리와 그레이스가 허탈하게 대화를 나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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