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성윤은 오히려 재호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재호나 이미연이 죽었을 때의 상황은 어땠냐?”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나요?”
진수가 반짝반짝한,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되묻는다.
퍽!
현우는 바로 진수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으갹!”
“토 나오니까 다시는 그딴 얼굴로 쳐다보지 마.”
진수는 부루퉁한 얼굴로 현우를 쏘아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척 하면 척이지. 지금 우성윤에게 원한을 갖고 이재호를 부추길 만한 인물이 또 누가 있냐. 거기다….”
현우는 진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네가 관련되어 있는 게 뻔할 뻔자잖아.”
“그렇게 티가 나나요?”
진수가 자신의 볼을 이리저리 주물러댔다.
“정확히는 몰라요. 우성윤이 창고로 들어간 다음에 살짝 들여다봤는데, 이재호에게 소개해준 놈들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뒤돌아 나왔죠. 빈틈을 보였으면 제가 죽이려고 했는데 말이죠.”
장난스러운 진수의 말투에서 스산한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겨났다.
“이재호에게 붙여준 놈들은 네 친구들이지? ‘선택받지 못한 자들’ 말이야.”
진수가 현우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속마음이 어떻든 현우를 공경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이던 그가 대놓고 살기를 뿜어댔다.
“…그 명칭은 치워주시지 않겠어요?”
“…실수했군. 취소하지.”
웃음기를 싹 뺀 채 현우가 사과했다.
잠시 동안 계속 현우를 노려보던 진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뭐, 일단 예전 제 동료들인 건 확실하죠. 지금은 달라졌지만요.”
“어리석었어. 지구에서 능력을 쓸 정도면 녀석들이라도 상당히 고급 인력을 투입한 상황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작 다섯 명 갖다가 우성윤을 처치하는 건 무리일 텐데.”
“제 말이요.”
진수가 현우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 보스께서 무조건 강행하라고 시키셨어요. 이재호는 우성윤과 오래 붙어 다니던 녀석이니 녀석에 대해 속속들이 알 거고 이제 독기까지 품었으니 녀석에게 실제 무력을 쥐어주면 성공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요.”
보스. 그들의 사장인 동인을 일컬음이다.
현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인간도 우리와 함께 한 지 얼마나 됐는데 고작해야 그 정도 수준의 연결자들을 쥐어주고 우성윤을 죽이라고 했는지, 원.”
“약점을 노리라는 면에서는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지원하라고 준 무력이 형편없어서 그랬지.”
“아무래도 우리 연결자의 강함의 척도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잘 감을 못 잡는 경향이 있으니까.”
“전투 장면을 봐야 뭘 잡아도 잡죠.”
이 세상에 퍼진 연결자의 전투 장면이라 봐야, 성윤의 베히모스전 같은 지구에서의 전투 장면이 다였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습격이 생긴 지금 그 장면은 슬슬 늘어나는 추세였다.
“게다가 그 다섯 놈도 멍청한 게,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우성윤을 잡을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 다섯 놈이 힘을 합치면 나름 런던에 강림한 베히모스 정도는 잡을 수 있긴 하거든요. 솔직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우성윤의 발전 속도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일 뿐이죠. 그래서 내 그렇게 충고도 했건만….”
진수는 혀를 쯧쯧 찼다.
“보스도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에요. 몬스터의 습격, 미궁의 이변, 마나나이트의 발견, 가가린, 양 시티의 괴멸 등, 지금은 한시도 쉬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우성윤의 일이라도 빨리 치우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게다가 ‘그놈’도 발견됐다면서요?”
“그래. 가가린·양 시티를 정리할 때 발견했다.”
“어라? 상당히 느긋하시네요?”
‘그자’를 발견했을 때 엄청 당황스러워하던 현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일 뿐, 어차피 나중에는 밝혀질 일 아니겠냐. 무엇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어찌할 여부도 없이 몰락할 우리 대단한 보스와는 다르게 우리는 본격적으로 몬스터 쪽에 붙어 움직이면 그만이니까.”
“그도 그렇군요.”
자신들과 동인은 처해있는 입장이 다르다.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의 고개가 TV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재호의 얼굴과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나오고 있었다.
히죽.
그 모습을 보며 재호에게 성윤의 죽음을 의뢰했던 후드를 쓴 자, 진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
철컥!
두터운 문이 열린다. 성윤의 눈에 방안의 풍경이 친근하게 들어 왔다.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이 집안을 훑었다.
“아빠!”
그의 표정이 탁 풀렸다.
“아빠다!”
와락!
신혜가 성윤의 품에 안겼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녀의 재회. 낯익은 아이의 감촉을 느끼며 성윤은 회포를 풀었다.
“성윤 씨!”
신혜의 뒤를 이어 선아가 달려왔다.
“이제 괜찮은 건가요?”
성윤이 잠시 갇혀 있을 때 지민과 함께 신혜를 돌봐준 게 그녀였다.
“괜찮아요.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일은 해결됐어요.”
성윤의 뒤를 이어 들어온 지민이 대신 대꾸했다.
성윤의 품에 안긴 채 손을 흔드는 신혜에게 그녀도 예쁘게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줬다.
성윤은 일단 선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혜를 돌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괜찮아요. 신혜는 말 잘 드는 아이니까 힘든 것도 없고요.”
선아가 ‘그렇지?’라고 신혜에게 되묻고 신혜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 잘 들어!”
성윤은 신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아빠의 등을 운동장 삼아 기어오르거나 품속에서 깔깔거리는 신혜를 어르며 성윤은 오랜만에 신혜와 놀았다.
지민과 선아는 그 모습을 푸근하게 쳐다봤다.
아무리 체력이 남아나는 아이라도 본격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연결자의 체력에는 당할 수 없다.
한참을 성윤과 놀다 신혜는 지쳐서 잠이 들었다.
천사처럼 잠든 아이를 자기 방의 침대에 눕혀 놓고 뺨에 부드럽게 키스한다.
이마를 한번 쓸어주고 성윤은 방을 나왔다.
거실에는 아직 지민과 선아가 남아 있었다.
성윤은 그녀들의 앞에 앉았다.
“정말로 괜찮은 거죠?”
선아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사람 아홉 명이 죽어나간 일이다.
치안 좋은 한국에서는 대량학살로까지 일컬어질 정도의 일. 선아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성윤이 선아를 안심시켰다. 지민이 부연설명을 했다.
“선아씨도 TV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건 일반 복수극 정도가 아니라 성윤 씨를 향한 테러였어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었나요?”
“맞아요. 이재호가 고용한 자들이 그들이죠.”
연결자의 씨를 원하는 자들은 많다.
연결자의 자식은 연결자로 각성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달에서 일을 하는 창녀들이나, 혹 일반인들이라도 연결자의 부모가 되기를 원해 연결자의 아이를 품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연결자의 씨라도 연결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 뿐, 100%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연결자로 각성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이라도 잘 보살피며 키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세상에는 일명 인간쓰레기란 것들도 있다.
엄청난 아이들이 버려졌다.
오로지 연결자의 부모가 돼서 그 호위를 업으려 했던 자들에게 이들은 필요 없는 아이들, 인생의 방해물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비참하게 자란 아이들은 부모를 원망했고 세계를 원망했고, 무엇보다 연결자와 달과 미궁을 원망했다.
그런 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테러 집단. 그들이 바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연결자가 되지 못해서 버려진 사람들 아니었나요? 성윤 씨를 습격한 사람들은 연결자였잖아요.”
선아가 물었다.
“각성이 무척 느린 사람도 있어요. 아마 그 사람들은 버려진 이후에 각성을 한 사람들일 거예요. 보통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연결자로 각성한 후에도 증오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당연한 일이죠. 아무리 연결자로 각성을 했다고 해도 자신이 걸어온 그 비참한 인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지민의 대답에 선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근본적으로 선한 그녀에게 버려져서 비뚤어진 아이들은 무척 마음을 아프게 하는 존재였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무서운 이유도 거기 있어요. 각성하지 못했다고 부모들이 버렸지만, 아무래도 연결자들을 부모로 둔 이상 연결자로 각성할 확률이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 무척 높거든요. 당연히 여타 테러 집단이나 무장 단체 중 연결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으로 꼽혀요. 이번에 이재호를 위해 다섯 명이나 붙은 게 그 증거죠.”
“무섭네요. 안타깝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우리에게 유리하던 상황이 한순간에 기울었어요. 성윤 씨를 죽이기 위해 악명 높은 테러단체까지 고용했는데 상황이 누구 탓이겠나요? 지구에서 디바이스와 젬을 사용하는 연결자에 한한 관대한 정당방위까지 더해서 이번 건은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게 됐어요. 뭐, 대성에서 아직도 아득바득 매달리고 있긴 한데, 이 이상 뭘 어쩌겠나요.”
지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확신어린 몸짓에 선아도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지민이 성윤을 보고 말했다.
“아직 성윤 씨가 달로 가는 것까지 허락되진 않았지만 그것도 곧 허락이 날 거예요. 암스트롱에서도 죄가 없으면 놓아주라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모양새니까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당분간은 휴가라고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당분간 푹 쉬세요.”
지민은 그 말을 남기고 선아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성윤은 잠시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그때 신혜의 방에 문이 열렸다. 눈을 비비며 신혜가 나왔다.
“일어났니?”
“우응.”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한 말투로 말한다.
신혜가 눈을 끔벅끔벅 뜨고 집안을 둘러 봤다.
“언니들은 갔어?”
“응. 갔어.”
신혜는 성윤의 앞으로 걸어가 성윤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누웠다.
성윤이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빠.”
“응?”
“엄마 죽었어?”
멈칫!
성윤의 손이 멈췄다.
“그런 얘기 어디서 들었어?”
“TV에서 봤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한 뉴스를 신혜가 본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이라고 모자이크도 하지 않고 사진을 있는 대로 뿌려댔으니 당연히 눈치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응. 엄마, 하늘나라에 갔어.”
“…….”
신혜는 말이 없었다.
성윤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자신의 머리에 있는 성윤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를 버리고 매도하고 관심을 끊고 철저하게 돈으로만 본 어미.
신혜도 미연을 보고 친근함보다 공포를 느낄 정도로 미연을 대하는 걸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다. 냉정하고 무서운 이미지의 엄마를 들춰내면, 오래 전의 상냥하고 자상했던 엄마의 추억이 나온다.
성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혜가 어떤 심정을 느끼는지, 우는지, 데면데면한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부여잡는 아이의 작은 손을 꼭 마주잡아주며 아이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