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200화 (200/354)

제200화

재호는 집에 들어왔다. 혼자 지내기에는 무척 넓은 집이다.

가정부가 매일매일 들러 정리정돈을 하는 터라 집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가족과 사는 집이 따로 있었지만 오늘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아 종종 별장처럼 사용하는 이 집으로 왔다.

양복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는다. 그리고 목에 걸린 넥타이를 잡았다.

순간 그는 넥타이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 같다고 느꼈다.

갑자기 열이 뻗쳤다.

“젠장!”

풀어 헤친 넥타이를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쿵! 쿵! 쿵! 쿵!

값비싼 넥타이를 사정없이 밟아댄다. 넥타이가 이리저리 구겨져 나뒹굴었다.

“헉! 헉! 헉!”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관리를 잘해서 아직 균형 잡힌 몸을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슬슬 찾아오는 나이는 확실하게 그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성윤처럼 몸이 완전히 젊었을 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빌어먹을!”

다시 뇌리에 떠오른 성윤의 모습을 욕설을 내뱉으며 지워버린 후 그는 소파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자글자글 생기기 시작한 주름이 느껴져 그의 성깔에 한 번 더 불이 붙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북돋워 성을 죽였다.

“후우~!”

폐 속의 찌꺼기를 모두 들어낼 것 같은 한숨.

무척이나 피곤했다. 실제로 그는 며칠 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꼬여버렸어.’

성윤의 기술을 빼앗아 세계에서도 몇 없는 대미궁의 월석을 가공하는 회사로 거듭난 것도 잠깐. 연이어 악재가 터졌다.

최초의 악재는 암스트롱의 슈퍼 골렘 습격으로 인한 월석 공급의 차질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재호는 그저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생겼다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결국 암스트롱은 복구될 것이고 월석 공급도 다시 안정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새로운 월면 도시를 만든다는 계획 때문에 완전히 전복됐다.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도움을 주는 연결자들이 암스트롱 출입을 거부당했고, 그중에는 대미궁에 출입하는 연결자들도 있었다.

자연스레 대미궁의 월석 공급이 줄었다.

‘그리고 우성윤 그 자식!’

근래에 급작스럽게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대미궁 월석 공급처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정범이 월석 공급 중단을 통보했다.

안 그래도 호흡 곤란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회사에 묵직한 펀치를 날린 꼴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건은 안 그래도 시끌시끌한 여론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날파리 같은 언론들의 질문을 피해 다니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광석!’

이젠 이름을 듣는 것조차 신물이 나는 성윤이 발견에 큰 이바지를 했다고 하는 새로운 에너지원.

그 발견에 월석 발전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대두됐고 한때 회사의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아직 실용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복구되긴 했다.

하지만 월석을 가공해 파는 그들에게 새로운 에너지원, 그것도 월석보다 더 효율 좋은 에너지원의 등장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판은 짜 놨어.’

어떻게든 그 광석이란 걸 구해보도록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놨고 웃돈을 주긴 했지만 대미궁의 월석을 계속 공급받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익은 감소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했다.

‘새 월면 도시에 투자하는 것도 어떻게든 됐고.’

이것에는 얄궂게도 성윤의 도움을 받은 감이 있었다.

새로운 월면 도시는 원래 그들의 이미지 상승을 위해 어떻게든 성윤을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성윤은 그들의 손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암스트롱의 문제를 수습하고 정상화에 큰 도움을 줬다.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 우성윤이라는 존재는 무척 얄미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성윤의 원수라고 전 세계에 소문이 난 재호의 투자를 받았다.

성윤을 엿 먹이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물론 그건 재호의 회사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투자를 받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 월면도시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만큼 조건은 굉장히 불리했다. 하지만 지금 재호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이걸 시작으로 새로운 월면 도시에 집중을 해야지. 암스트롱은 그 놈의 입김이 꽤 많이 들어가는 것 같으니까 나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야.’

이미 기호지세다. 후퇴할 곳은 없었다.

삐비비비빅!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이 벨소리는 공적인 일에 쓰는 전화가 아닌, 사적인 일에 쓰는 전화다.

핸드폰의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재호의 얼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전화를 받은 그의 말투는 거칠었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그에 못지않았다.

- 말할 게 있어.

목소리의 주인은 미연이었다.

“끊어. 지금 말할 기분 아냐.”

재호가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미연이 다급하게 말했다.

- 기다려! 내가 당신 부탁 들어준 거 잊었어?

부탁이란 성윤이 언론에게 입을 여는 걸 막아달라는 것. 하지만 그 말은 역효과였다.

“이런, 빌어먹을! 그건 정당한 거래였잖아! 돈도 다 받아 처먹었으면서 왜 또 지랄이야! 게다가 그 이후에 그 빌어먹을 놈의 회사가 거래를 끊어서 엄청나게 손해를 봤다고! 이건 어쩔 거야!”

-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당신이 내민 조건은 그 인간이 언론에 말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어! 그리고 그 인간은 언론에 말 한 마디 뻥긋 안 했고! 나머지는 계약 밖이야!

미연이 성윤, 지민과 만난 이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던 그들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언론에 입을 열지 않은 것 또한 사실.

미연은 그게 자신의 공이라면서 뻔뻔하게 재호에게 성과 보수를 타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재호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젠장!”

오늘만 몇 번째 욕설일까.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용건만 말하고 끊어.”

성윤을 사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힐 때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던 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를 보면 둘의 관계는 이미 개선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게 확실했다.

- 아버지의 회사와 물품 공급 계약을 취소했다고 하던데. 무슨 짓이야?

‘그것 말인가.’

미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는 월석 가공 장치의 부품을 만들어 월석 가공 업체에 공급하는 하청업체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위인 성윤에게, 미연과 성윤이 이혼한 후에는 딸의 내연남인 재호에게 물건을 팔아먹어 급격하게 부를 늘렸다. 철저한 인맥빨의 사업.

“지금 우리 회사도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당연히 부품 수급도 줄여야지. 무엇보다 너네 아버지네 회사는 불량률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아.”

-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줄이는 게 어디 있어! 안 그래도 사업 확장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데 요새 말이 아니시란 말이야!

“어이, 이미연. 지금 뭔가 착각을 하나 본데.”

거머리보다 더 끈질긴 여자. 지금 재호가 보는 미연의 이미지였다.

“네 아버지 회사의 물품을 받아준 건 네가 기술을 넘기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랑 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예전에 끝났는데 그것 때문에 불량률 높은 회사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도 요새 회사도 안 좋은 판국에.”

- 잠깐! 혹시 우리 회사와 계약을 완전히 끊을 생각이야?

“기회는 몇 번이고 줬어. 말을 안 들어 먹은 쪽은 그쪽이야.”

재호는 이번 기회에 평소 불만이 많았던 하청 업체를 몇 쳐낼 생각이었고, 거기에는 미연 아버지의 회사도 들어가 있었다.

- 기다려! 내가 아버지에게 말을 잘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일은 끝났어.”

재호의 목소리는 무척 차가웠다.

-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끝나지 않으면? 혹시 우성윤과 있었던 일을 폭로라도 하려고? 좋을 대로 해봐. 어차피 너랑 나는 공범이야. 내가 들어가면 너도 들어가. 그것만은 착각하지 말라고.”

그렇게 사치를 좋아하는 여자가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진 않을 터.

내기해도 좋았다. 재호는 그런 면에서는 미연을 마음 속 깊이 신뢰했다.

“알았으면 이제는 좀 조용히 살아. 더 이상 나에게 빌붙어 살 생각 말고. 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전해 드리고.”

그리고 재호는 전화를 끊었다.

“재수가 없으니, 원.”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짜증나는 인간이 더 화를 북 돋웠다.

‘설마 우성윤 그놈의 기술을 뺐고 대가로 좀 놀아줬다고 나랑 대등한 인간이 됐다고 생각한 건가? 이 모자란 여자는?’

그렇다면 정말로 분수도 모르는 여자였다.

하지만 미연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 그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

퍽!

출시된 지 얼마 안 되는 최신형 핸드폰이 침대에 나뒹군다.

미연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핸드폰을 노려봤다.

‘그 개자식이!’

모욕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재호의 목소리에는 분명 깊은 모멸의 빛이 어려 있었다.

미연은 씩씩대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떡하지?’

그녀의 아버지의 사업이 위기에 빠졌다는 건 사실이었다.

성윤을 팔아넘기며 미연이 재호에게 받은 돈과 대기업을 새로운 거래처로 뚫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그녀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재호를 믿고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을 때 때마침 암스트롱의 사건이 겹치며 회사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정범의 거래 중단으로 재호의 회사가 부품 수급을 줄여버리자 부도 위기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재호의 말을 듣는다면 이참에 거래를 완전히 끊어버리려 한다지 않는가.

더더욱 문제는 그 회사에 미연이 성윤을 팔아넘기고 받은 돈도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급히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이번에 재호에게 받은 돈도 상당수가 아버지의 회사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회사의 불량률이 어떻던가는 상관없다. 지금 미연에게 재호는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인간일 뿐이었다.

미연의 눈이 방 한편에 있는 조그마한 서랍 가장 아래쪽에 고정됐다.

***

따뜻한 남국의 바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부터 상상하게 될까?

에메랄드빛 바다? 파란 하늘? 새하얀 백사장? 야자나무가 드리운 이국적인 풍경?

하나 분명한 건 지금 성윤 일행이 있는 곳은 바로 그 상상 속에 보는 풍경이 모두 합쳐져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첨벙! 첨벙!

귀여운 수영복을 입은 신혜가 앙증맞은 튜브를 타고 연신 물장구를 친다.

새하얀 포말이 수면위로 가득 얼굴을 내밀며 신혜의 몸이 앞으로 나갔다.

“아빠! 나 수영 잘 하지!”

“그럼! 우리 딸 정말 잘하네!”

신혜의 옆에 있던 성윤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나 잠수도 잘한다!”

그러며 신혜는 물안경을 끼고 물 아래로 고개를 넣었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은 바다 아래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줬다.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새하얀 모래가 바다 아래에서 흔들린다.

“푸핫! 아빠! 저기 고기!”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한 신혜가 얼굴을 빼고 다급하게 말했다.

“고기? 물고기가 있어?”

“응! 저기 있어!”

흐뭇하게 딸아이의 물놀이를 보고 있던 성윤이 바로 반응했다.

그도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어 신혜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물고기 몇 마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물고기가 있네? 그럼 우리 몰래몰래 따라 다녀볼까?”

“몰래몰래?”

“그래. 저 물고기들이 어디까지 가나 보는 거야.”

신혜가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바다는 멀리 나가면 위험해! 빠져 죽을 수도 있어!”

종종 든 생각이지만 신혜는 정말로 아이답지 않은 면이 있었다.

아빠로서 이런 어른스러운 행동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종종 아이가 너무 아이답지 않게 행동할 때는 걱정스러운 적도 있었다.

혹시 어릴 때 받은 상처 때문일까,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신혜 말이 맞아요. 어쩜 아빠가 돼서 그런 것도 모를까요.”

성윤이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신혜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둘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지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