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유령도시. 보통 인적이 없는 버려진 도시를 일컬을 때 많이 쓰는 단어다.
성윤은 그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단어를 설마 돈과 욕망의 도시인 암스트롱에서 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달에는 귀하기 그지없는 방금 조리한 음식들이 흘리는 냄새도, 프리미엄이 덕지덕지 붙어 지구보다 훨씬 더 엄청난 가격이 붙는 잡화도, 화려한 옷과 진한 화장으로 연결자들을 유혹하던 여자들도 전부 사라졌다.
있는 거라곤 사람들이 사라진 도시를 내비치는 암스트롱 천장의 옅은 전등 불빛 정도였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나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뒤에서 들려온 말에 성윤이 고개를 돌렸다. 현우가 진수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컨디션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우리 에이스께서 몸 관리라는 기본적인 일을 하지 못할 리 있나요.”
진수가 말했다. 언뜻 들으면 성윤을 척이나 떠받들어주는 말 같지만 현우는 그게 비꼬는 의미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적당히 하라며 그의 두통수를 툭 두들겼다.
그들은 목적지인 구 시작의 미궁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암스트롱도 색다른 매력이 있군그래.”
“저는 이렇게 영화처럼 인적 없는 곳에서 거닐어보고 싶었어요!”
진수가 반짝이는 눈으로 거리 이곳저곳을 쳐다봤다.
“상점에서 물건을 마음대로 가지고 나와도 된다면 더 좋고 말이죠.”
그건 어떤 의미로 로망이 아닐까.
주인공들이 더 이상 주인이 없어진 마트나 쇼핑몰에서 온갖 물건들을 자유롭게 가지고 나오는 건 좀비물을 포함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서 반드시 나오는 장면이 아니던가.
“암스트롱이 망한 것도 아니고 가게들의 주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니까 자중해라.”
“알고 있다고요.”
진수는 조금 아쉬운 눈초리로 주변 가게에서 눈을 뗐다.
셋은 곧 구 시작의 미궁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몇몇 연결자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난 작전과 어느 정도 기간이 떨어져 있는 만큼 대부분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몇몇 낯익은 사람도 보였다.
“여, 나이트! 잘 지내고 있었나?”
“이번에도 잘 좀 부탁해! 골렘 녀석들을 시원시원하게 잡아서 우리 재산 증식에 이바지 좀 해달라고!”
그들은 성윤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아무래도 같이 목숨 걸고 작전에 임한 만큼 짧은 시간 내에 상당히 친해졌던 것이다.
성윤을 처음 본 사람들도 호기심에 성윤의 주변에 어슬렁거렸다. 성윤과 안면을 익힌 사람에게 달라붙어 뭐라뭐라 질문을 하기도 했다.
“역시 나이트의 인기는 굉장하네요.”
진수가 말했다. 당연히 속에는 질투심이 가득 차 있었다.
현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이 지나 연결자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그 숫자는 저번보다 적었다.
‘정확히 열 명인가.’
“모두 모이셨군요.”
약속시간이 되어 도착한 시장이 연결자들을 둘러 봤다.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시는 분들이라 무척 반갑습니다.”
“암스트롱이 마비상태가 돼서 할 일이 없어져서 말이오. 다른 때 같으면 미적대느라 한 시간은 늦었겠지.”
“큭큭큭! 여자랑 뒹굴고 있었다면 반나절은 늦게 나왔을 수도 있고.”
“좋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여러분이 제 시간에 이렇게 약속을 지켰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보다 정말로 이 일을 끝내면 암스트롱의 부동산을 주는 거요?”
한 연결자가 물었다. 골렘 퇴치에 처음 참가한 사람이었다.
“물론입니다. 이미 저번 계획에 참가한 분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이 전부 취해졌죠. 안 그렇습니까?”
저번에 참가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자랑스레 자신이 받은 암스트롱의 부동산을 말하기도 했다.
조금 의심스러워하며 질문을 던진 사람도 보상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시장의 주위에 연결자들이 동그랗게 둘러섰다.
“일단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해주실 작전은 암스트롱에 대단히 중요한 작전입니다. 이것만 성공하면 저 경쟁 도시 인간들이 지긋지긋하게 떠벌리는 ‘안전하지 않은 도시’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떼버릴 수 있습니다.”
연결자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암스트롱에 남을 분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저 짜증나는 곳으로 옮겨 갔을 테니까요. 당연히 암스트롱의 발전은 여러분들의 이득으로 돌아오겠죠. 이번 작전은 그를 위한 중요한 한 걸음입니다. 그럼 우성윤 씨,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성윤이 앞으로 나가 시장의 곁에 섰다. 약간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나왔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분이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런던의 나이트입니다. 최초로 지구에 나타난 몬스터인 런던의 베히모스를 그레이스 공주님과 함께 타도했죠. 이분이 작전의 핵심이 될 겁니다. 저번 골렘 퇴치를 경험한 분은 아시겠지만, 골렘들이 이분을 엄청나게 사랑하시거든요.”
“그럼! 봤지!”
“만난 지 얼마 안 돼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이든, 결혼 한 지 오래 돼서 원숙해진 사랑이든 골렘의 나이트 사랑에 비하면 별것 아닐걸?”
저번 골렘 퇴치에 나선 사람들이 떠벌이자 ‘왁!’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요, 그래. 어쨌든 일반적으로 골렘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골렘, 정확히 말해 슈퍼 골렘을 미궁 밖으로 끌어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슈퍼 골렘은 미궁 안에서는 바로 재생해버리기에 퇴치가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녀석들은 유인하면 미궁 밖까지 잘 따라 오고 실제로도 그렇게 퇴치를 해왔습니다만, 이번에는 작전을 조금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일반 골렘은 최대한 미궁 안에서 퇴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궁 밖으로 내보낼 골렘은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시장은 연결자들을 한번 둘러 봤다.
“그리고 슈퍼 골렘만이 남으면 바로 미궁 밖으로 나와 암스트롱 바깥까지 유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래도 도시 안에서 싸우면 피해가 너무 많이 나올 테니까요. 슈퍼 골렘들이 도시 밖까지 나온다면 그때 총공격을 가해 퇴치해주시면 됩니다. 유인은 간단할 겁니다. 슈퍼 골렘들은 무조건 우 씨를 먼저 노릴 테니까요.”
“미궁에서 나오자마자 나이트가 전부 처리하면 되는 거 아뇨? 슈퍼 골렘들은 전부 나이트 손에 일격이라고 하던데.”
대 슈퍼 골렘 최종 병기인 성윤의 모습을 동료에게 들었던 연결자가 물었다.
“아무리 우 씨라도 단 일격에 모든 슈퍼 골렘을 처리할 순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비싼 돈 들여 다른 분들을 모으지도 않았겠죠. 아무리 우 씨가 대단하다고 해도 전투는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암스트롱에 피해가 가겠죠.”
“일단 작전대로 하긴 하겠는데 확답은 줄 수 없소. 만약 우리도 목숨이 위험하다면 암스트롱의 피해든 나발이든 발버둥쳐야 하니까.”
이번엔 다른 연결자가 말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암스트롱의 피해는 최소한이 되도록 노력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력해보지.”
“자, 그러면 설명은 끝입니다. 혹시 더 질문하실 분 계십니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작전을 실행합시다.”
시장이 선언했다.
***
쿠르르르르릉!
시장과 남은 민간인들이 안전한 쉘터로 대피를 한 후, 작전의 원활한 실행을 위해도시와 외부를 격리하는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슈퍼 골렘을 바깥으로 유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후우우우웅!
도시 안에 있던 공기들이 일제히 외부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며 거대한 비명을 지른다.
암스트롱 안에서 한 번도 볼 수 없던 광풍이 도시를 헤집었다.
스윽!
마지막 공기마저 도시를 빠져나가고, 암스트롱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미궁 입구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현우가 손짓을 했다. 연결자들이 움직였다.
지금껏 봉쇄되어 왔던 구 시작의 미궁에 다시 연결자가 들어선 순간이었다.
스윽!
다시 몸 주변을 스치는 공기가 느껴진다. 성윤은 굳게 마음을 다잡고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들의 눈에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보였다.
미궁이 봉쇄되어 청소를 하지 못한 시간이 꽤 흘렀다. 당연히 미궁 안에는 시작의 미궁이라는 칭호답지 않게 여러 몬스터들이 우글거렸다.
하지만 미궁에 들어온 연결자들은 대미궁에서 활약하거나 그와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다.
청소가 되지 않았더라도 고작해야 중하급 미궁밖에 되지 않는 곳의 몬스터가 상대가 될 리 없다.
시작의 미궁 입구 근처 몬스터가 몰살당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작한다!”
현우가 크게 소리치고는 신호를 줬다. 벽면에 다가간 연결자 한 명이 무기를 크게 휘둘렀다.
콰앙!
시원한 폭음이 터졌다.
후드드득!
벽에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직후, 미친 듯한 마나의 광풍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준비해!”
현우의 목소리에 연결자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들어 올리고 사방을 경계했다. 성윤도 마찬가지였다.
후웅!
빛이 나타났다.
‘일단은 한 대인가?’
성윤은 조금 안도했다.
암스트롱 습격 때 이미 슈퍼 골렘이 출현했었기에 여러 대의 골렘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러진 않을 모양이었다.
쿠웅!
빛이 사라지고 골렘이 미궁 바닥에 발을 디뎠다. 녀석의 보석 같은 여러 개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부셔!”
현우의 외침과 함께 연결자들이 움직였다.
콰아앙!
골렘의 눈에서 하얀 빛이 뿜어진다. 직선으로 내달리는 빛이 맨 앞에 있는, 방패를 든 연결자들을 덮쳤다.
쿠웅!
빛이 방패를 강타하며 방패의 주인들에게 묵직한 충격을 줬다.
하지만 방패는 밀리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해 현우가 골렘의 옆으로 돌아 들어갔다.
서걱!
일섬. 노도와 같은 빛줄기가 멈췄다. 현우의 깔끔한 칼질에 골렘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뭐야, 엄청 쉽잖아.”
상당히 긴장을 했었는지 너무도 허무한 전투의 결말에 한 연결자가 허탈하게 내뱉었다. 옆에서 저번 골렘 퇴치에 참여했던 연결자가 설명했다.
“일반 골렘이니까. 그리고 확실히 여기의 골렘이 더 약하기도 하고 말야. 그래도 방심하지 마. 실질적으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우웅!
그 말을 긍정하듯 여러 개의 빛이 미궁 안에 새로 생성됐다.
“작전대로 진행한다! 괜히 튀려고 개인행동 하는 새끼는 내 손에 죽는다! 방패 든 놈들은 철저하게 슈퍼 골렘을 막아서고 나머지는 일반 골렘들을 쳐 죽여!”
그렇게 명령을 내린 현우는 성윤을 돌아 봤다.
“자네는 미궁 안에서는 괜히 움직이지 마! 미끼는 가만히 있어야 다른 이들이 방어하기도 편하니까! 자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골렘들을 암스트롱 바깥으로 유인한 후다!”
“네!”
슬슬 심장의 고동이 느껴진다. 고양되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성윤은 이제는 완연하게 몸집을 키운 빛덩이를 노려봤다.
쿵!
골렘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중에는 당연히 슈퍼 골렘들도 끼어 있었다.
휙!
마치 고장난 로봇처럼 골렘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윤에게 쏠렸다.
그 비인간적인 움직임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온다!’
성윤은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이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새빨간 악의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것 같았다.
파앗!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골렘들이 바로 성윤을 향해 뛰어들었다. 진정한 의미의, 구 시작의 미궁 골렘 퇴치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