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미궁-195화 (195/354)

제195화

시원하게 쏟아진 스쿨로 인해 온도가 조금 내려갔으면 했지만, 오히려 습도만 높아져 후덥지근한 더위가 덮쳐들었다. 내리지 않은 만 못했다.

정말로 끔찍한 정글에서의 시간. 하지만 그것도 끝나는 날이 왔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을 때 일행은 자기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서둘러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습기는 잦아들었고 온도도 내려갔다. 그와 비례해 일행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리고 동굴을 나와 다음 층의 풍경을 시야에 담았을 때, 일행은 일제히 감탄사를 흘렸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푸른 수면 위로 점점이 작은 섬이 떠올라 있다.

물은 깊어봐야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얕았고 푸른 에메랄드 빛깔을 띠며 자신의 맑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도 섬 중 하나였다.

일행은 주변을 경계하며 물가 쪽으로 나갔다. 새하얀 백사장에 파도가 넘실댄다.

모래 위로 안간힘을 쓰며 올라온 파도는 곧 새하얀 포말과 함께 다시 바다로 끌려들어갔다.

“우와아~!”

마치 어린애처럼 에밀리가 바닷가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부츠를 벗고는 조심조심 바다에 발을 넣어 봤다.

“꺅!”

발끝을 자르르 흐르는 차가운 감촉에 그녀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젖혀진 후드 위로 갈색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남국과 비슷한 푸른 해변이라는 배경이 그녀의 매력을 한층 끌어 올렸다.

팀과 그레이스도 천천히 바다로 다가갔다.

팀은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밀려들지 않는 곳에 서서 바다 저편을 쳐다봤고, 그레이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신발을 벗어 맨발로 모래를 꾹꾹 밟았다.

어린 아이같이 좋아하는 일행들. 아마 위층의 정글에서 하도 고생을 많이 한 터라 더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정말로 당장 휴양을 즐기고 싶은 곳이네요.”

자신 곁에 다가온 성윤에게 그레이스가 말했다. 얼마나 즐거운지 그녀는 볼까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성윤도 푸른 바다를 쳐다봤다.

‘나중에 신혜랑 같이 가고 싶은 풍경이군.’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감탄을 하는 성윤이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그의 우선순위는 신혜였다.

나중에 짬을 내어 신혜와 따뜻하고 아름다운 남국으로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하던 성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러분. 좋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일할 시간입니다.”

그가 망치를 소환하며 말했다.

동료들이 급히 무기를 든다. 해변 저쪽에서 어기적거리며 움직이는 무언가들이 있었다.

잘못 본다면 바위가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몬스터 무리.

울퉁불퉁 단단해 보이는 회색빛 껍질과 둔탁한 열 개의 다리.

그중 두 개는 날카로운 톱날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집게였다.

“록크랩이군요.”

“저거 단단하다죠?”

성윤의 말을 팀이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받았다.

“바위라는 수식어가 붙은 놈들이니까요. 방어력만이라면 대미궁 초입에서도 수위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물가에 사는 놈들이 바위라니.”

“뭐, 몬스터의 이름은 전부 인간들이 대충 붙인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바위라는 수식어가 붙은 놈답게 속도는 상당히 느린 놈들입니다.”

지금껏 높은 기동력을 자랑하며 종종 비행을 하던 놈들까지 상대해온 성윤 일행에게 록크랩의 움직임은 거북이와 같았다.

“정신없이 빠른 놈들보다는 나으려나요?”

전면으로 나오진 않고 성윤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이 내밀어 록크랩을 바라보던 에밀리가 말했다.

“글쎄요. 일단 대미궁에 있는 놈들인 만큼 속도가 없다면 다른 쪽이 발달했을 겁니다. 실제로 녀석들은 방어력과 공력력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공격 속도도 빠르다고 하고요.”

공격력, 방어력은 몰라도 녀석들의 굼뜬 움직임을 보면 공격 속도가 빠르다는 말에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록크랩은 그 의문을 바로 풀어주었다.

부글부글부글!

일행에게 근접한 록크랩들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후욱!

거품이 앞으로 쭉 날렸다. 일행이 움찔했다.

성윤과 팀이 방패를 들려 했다. 하지만 딱히 공격은 아니었던 터라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게 록크랩의 거품이군요.”

팀이 날리는 거품 하나를 잡아 손으로 비벼봤다. 끈적하고 미끄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어느새 거품은 일행이 있는 주변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성윤은 바닥에 뿌려진 거품에 발을 대봤다.

미끌!

‘전투에 방해가 되겠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쓰는 미끄러운 비누거품 같았다. 전투에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진 않을 터.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얘기다.

스으윽!

거품 위로 이동한 록크랩이 배를 거품 위에 댔다. 그대로 다리를 이용해 몸을 쭈욱 미끄러뜨렸다.

“옵니다!”

팀이 방패를 들었다. 지금까지의 느릿한 록크랩은 없었다.

마치 썰매를 타듯 자신의 거품 위를 미끄러져다니는 록크랩의 속도는 상당했다.

순식간에 접근한 한 녀석이 집게를 들었다.

콰앙!

“크윽!”

집게가 팀의 방패를 강타했다. 집게가 딜린 록크랩이 두터운 다리가 순간 확 늘어났다.

자세히 보니 팔이 두터워 보인 건 여러 개의 관절이 붙어 접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이 쭉 펴지며 쏘아나간 집게는 그 자체로 커다란 탄환이었다. 게다가 리치마저 길었다.

“어이쿠!”

거기에 미끄러운 바닥은 방어조차 힘들게 했다.

“이거 장난 아닌데?”

균형을 잡은 팀이 다시 집게를 쳐냈다.

관절을 접어 집게를 회수했다가 다시 쏘아대는 록크랩의 공격은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보다 톱날같이 생겼으면서도 날카로움은 웬만한 회칼을 능가하는 집게도 위협적이었다.

다른 록크랩들도 일행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팀이 방패를 휘두르고 도끼를 휘둘러 녀석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카앙!

“젠장! 더럽게 단단하네!”

팀이 짜증냈다. 미끄러운 지면과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도끼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록크랩의 껍질은 단단했다.

성윤도 방패를 들어 록크랩의 공격을 방어해갔다. 그리고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앙!

집게와 맞부딪친 망치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집게를 산산이 부숴 저 멀리로 날려버린다.

집게를 잃어버린 다리가 의미 없이 허우적거렸다.

터엉!

성윤이 휘두른 방패에 록크랩 한 마리가 뒤로 밀려났다.

바로 망치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물러서세요!”

전면에서 록크랩을 막던 팀과 록크랩을 학살하던 성윤이 일시에 물러섰다.

콰드드득!

온도가 내려갔다. 미끄러져 다니느라 온몸에 거품을 묻힌 록크랩이었기에 냉기에 더욱 치명적이었다.

해변을 딛던 녀석들의 다리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갔다. 곧 멋진 얼음 동상 여러 개가 생겨났다.

“빌어먹을 자식들!”

꽤 고생을 했는지라 팀이 얼음 조각이 된 녀석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얼어붙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성윤은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록크랩 무리가 또 보였다.

아무래도 섬의 바닷가 근처에 꽤 많은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섬을 중심으로 사냥을 하다가 나가도록 하죠. 슬슬 나갈 시간도 됐으니까요.”

“그게 좋겠네요.”

옆에 있던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몬스터의 위협만 없다면 정말로 피크닉을 하고 싶은 장소예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반짝였다.

“나중에 한 번 다 같이 어디 지중해나 남태평양 쪽에 놀러 가볼까요?”

안 그래도 신혜와 같이 바다에 갈까 생각 중이던 성윤이다.

종종 만날 때마다 동료들을 잘 따르던 신혜를 생각하며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죠. 두 분에게도 한 번 운을 떠 봅시다.”

“네!”

그레이스가 예쁘게 웃었다.

***

한 달이라는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그들은 대미궁에서 나왔다.

그들은 7층인 섬을 넘어서 더 깊이 들어가려면 한 달보다 더 길게 공략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성윤에게는 해야 할 다른 일도 있었다.

“드디어 시작입니다.”

요즘 자주 보게 된 시장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번 시작의 미궁의 골렘들을 처리한다면 드디어 저 빌어먹을 것들의 ‘안전하지 않은’ 운운을 틀어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은 새로 지어지고 있는 경쟁도시를 일컫는 것일 터.

아무래도 시장은 경쟁 도시에서 암스트롱을 향해 날리는 비난을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

“아뇨. 오히려 접근성을 무기로 우세를 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도 이번 작전의 성과에 달려 있다.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성윤이 물었다.

“일단 암스트롱에서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내보낼 겁니다. 이미 전달은 모두 끝났고 며칠 전부터 천천히 일반인들과 저급 연결자들을 지구로 내려보내고 있죠.”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도시의 운명이 걸린 일에 어리광을 받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들이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건 도시의 허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반발하는 놈들은 전부 암스트롱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과격하다. 하지만 그건 시장이 지금의 상황을 무척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죄송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윤 씨를 미끼로 쓸 생각입니다.”

성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보면 부모를 죽인 원수를 본 것처럼 달려드는 녀석들을 생각하면 성윤은 아주 적절한 미끼였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성윤 씨의 곁에는 최상급의 방어 전문 연결자들을 붙일 생각입니다. 그리고 미끼가 되어 주시는 이상, 당연히 추가 수당도 지급할 예정이고요.”

“참가하는 연결자분들은 어떻게 됩니까?”

“안타깝게도 러셀 경과 브루스 씨는 이번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성현우 씨는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성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우가 참가한다는 소식은 반가웠지만 현우와 대비되는 러셀, 브루스의 불참은 상당한 전력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습니다. 대미궁 근처의 미궁에서 나오는 골렘들의 능력이 약하다는 건 확실시되고 있으니까요. 슈퍼 골렘 한 대를 러셀 경 혼자 여유롭게 막은 전적이 있으니, 우 씨와 성 씨가 있으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저쪽 도시의 경험을 봐도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 씨가 조금 착각하시고 계시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시장은 성윤과 눈을 맞췄다.

“예전 골렘 퇴치 때도 우리의 주력은 러셀 경도 성 씨도 브루스 씨도 아닌, 우 씨였습니다.”

최고위 연결자마저 대적하기 힘들어 하는 슈퍼 골렘을 무 자르듯 두 동강 내버리는 성윤의 활약은 분명 골렘 퇴치 작전에 참가한 자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러니 본인을 믿으세요. 성윤 씨가 참가한다면 솔직히 성 씨마저 빠진다고 해도 저희는 계획의 성공을 낙관하고 있으니까요.”

“…높은 평가가 좀 당황스럽군요. 하지만 알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해보죠.”

“감사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계획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성윤은 시장에게서 구체적인 골렘 토벌 계획을 듣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